〈 646화 〉 646. 영웅의 성장(2)
* * *
싸움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종료되었다.
일제히 난동을 부리던 촉수들의 움직임이 뚝 정지하며 바닥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마치 격렬한 고통을 호소하듯 무작위로 개미굴 내부를 뒤흔들었던 움직임이 너무도 갑작스레 정지했다.
에린은 그 원인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현이가 움직였구나!’
짜증으로 가득 찼던 에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자신에게 추잡한 감정을 품었던 괴물을 다름 아닌 자신의 남편이 처리해주었다는 사실이 가슴이 뛸 정도로 기쁘다.
모든 촉수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축 늘어져 쓰러지면서 전투가 끝났음을 깨달은 에린은 곧바로 자신이 소환했던 백귀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백귀님들! 정말 감사했어요!”
“불러주신다면, 언제든 주인의 부름에 응하겠습니다.”
다른 백귀들을 대표하여 아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에린의 인사를 받았다.
영혼으로 종속에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백귀들은 언제든 에린의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싸움터를 잊지 못하고 전장에서 계속 무기를 휘두르며 투쟁을 이어나가길 원했던 전사들.
백귀들에게 에린은 자신들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은인과도 같은 여성이다.
게다가 한번 사망했던 육체를 다시 되살려주기 한 특혜를 부여한 존재.
그만큼 주종 관계가 확실하며 충성심 또한 적지 않았다.
에린은 호의적으로 자신을 대하는 백귀들의 그 태도가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친근한 아저씨나 언니 오빠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백귀들이 그렇게 친근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아주 최근에 백귀로 부활하게 된 시에테는 아직도 대하기가 어려웠다.
“애송이.”
“네, 넵!”
그저 자신을 불렀을 뿐인데, 왠지 모르게 허리가 꼿꼿이 펴지고 군기가 바짝 들어가게 된다.
에린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에테의 부름에 답하며 긴장했다.
“정말로 그놈이 날 부르라고 시켰더냐?”
“그, 그럼요!”
에린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짓말을 내뱉었다.
여기서 자신이 멋대로 시에테를 소환했다고 말을 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정도로 단단히 혼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남편인 은현의 이름을 판 것은 그에게 정말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유독 은현에게 무른 시에테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꾸중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현이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대스승님은 현이를 엄~청 아끼시니까.’
은현이 시켰다고만 한다면 분명 자신을 심하게 혼내지 않을 거라는 타산적인 계산.
에린은 그 결과를 조용히 기다렸다.
“…흐음.”
하지만 시에테는 에린의 기대와는 달리, 이미 그녀의 거짓말을 간파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을 부활시켜준 은인이라고는 하지만, 에린은 자신이 검술을 가르친 은현의 제자라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자의 제자인 손제자에게 명령을 받는 스승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분이 내키지 않는다.
‘차라리 그 녀석이라면 모를까. 이 핏덩이는….’
차라리 은현이 자신에게 명령과도 같은 정중한 부탁을 해온다면 못 이기는 척 들어줄 수는 있다.
그것이 제자인 은현에게 시에테가 허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에 가깝다.
하지만 에린은 별개의 문제다.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나이나 경험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적은 에린에게 명령을 받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도 있지만, 단순히 은현의 아내라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시에테는 자각하지 못했다.
“…뭐 좋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마친 시에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요…?”
자신을 혼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했던 에린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렇게 눈치를 보면서도 자신의 거짓말이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시에테가 도리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그 녀석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거짓말인지는 아닌지는.”
“…….”
에린은 움찔 몸을 떨었다.
고개를 살짝 돌려 시에테의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 큰일이다. 거짓말인 거 들키면 어쩌지?’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은현이 시에테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으로 자신을 혼내지는 않겠지만, 그로 인해 시에테에게 혼날 은현을 생각하자니 어쩐지 양심이 찔렸다.
반면 시에테는 속으로 이번에 에린과 사람들을 도와준 대가로 은현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밥이나 먹고 검이나 한번 겨뤄보자고 해야겠군.’
최근에는 아내인 일리아나의 출산일이 다가오고 있으면서 다양한 일들을 동시에 진행하느라 많이 바쁜 제자 녀석은 이런 식으로라도 빌미를 만들지 못하면 얼굴 한번을 보기도 몹시 힘들다.
‘흥. 괘씸한 녀석.’
은현의 사정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은현에 대해 새삼 드는 서운한 생각을 억지로 가슴속에 삭히며 눌러 담았다.
“그래서? 지금 제자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냐.”
“아, 그게…. 지금은 따로 떨어져서 행동하고 있어요.”
에린은 이 거대한 촉수들을 조종하는 괴물의 위치를 추측했다.
아마도 본체를 쓰러뜨린 은현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바로 이동하는 건가?”
“음….”
에린은 대답을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아….”
그리고 전투가 완전히 끝나고 시에테를 제외한 모든 백귀들이 역소환되며 물러나자, 에이라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으며 긴장의 끈을 놓았다.
카인은 아직 검을 꼭 쥔 채로 주위의 경계를 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시름을 놓았다는 듯 호흡을 정돈하고 있었다.
‘어? 누군가가…. 이건….’
에린은 예민한 자신의 감각에 들어온 발소리를 들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발소리는 한 명 분의 소리.
그리고 발걸음의 보폭이나 소리의 간격, 둔탁한 소리로 판단해보니, 누군가가 한 명을 등에 업은 채로 이곳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 발소리의 주인은 머지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헉, 헉! 다들 무사하신가요!?”
“차한성님? 그리고….”
“한성아…!? 어…?”
에린과 에이라가 동시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개미굴로 들어오는 차한성은 등에 한 명의 동료 기사를 업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자연스럽고 친숙해 보여서, 에린은 슬쩍 에이라에게로 시선을 옮겨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에이라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둘이 꽤 친해졌네?”
자연스럽게 업어주고 이성 간의 접촉을 허락할 수 있게 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슬며시 지적하자 함께 등장한 차한성과 델리아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예…?”
“에, 에이라 선배님! 갑자기 개미굴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급하게 달려오다가 제가 다리를 다쳤거든요! 그래서 차한성 선배님이 업어주셔서 이곳까지 올 수 있었어요!”
뭐가 문제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 차한성과 달리, 딱딱한 에이라의 얼굴 속에서 재빠르게 상황을 이해한 델리아는 황급히 상황을 설명해야만 했다.
아무리 고립되어 의지할 사람이 차한성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사상이 기본으로 깔린 이 사회에서 이성 간의 접촉은 꽤 문란하다는 평가를 받는 편이었다.
차한성은 관계가 없지만, 특히나 델리아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귀족 가문 태생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델리아? 뭘 그렇게 다급히 설명하고 있는 거야? 상황을 보면 다 알잖아.”
“…….”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는 차한성의 태도에 오히려 델리아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여 줬다.
“내, 내려주세요! 이제 혼자 걸을게요!”
“뭐? 괜찮겠어? 다리 부상은….”
“괜찮아요! 정 힘들면 에이라 선배나 저 모험가분에게 부탁드릴게요!”
여기서 이 눈치 없는 남자에게 계속 업혀있다가는 더 숨이 막혀서 불편할 것만 같다.
‘바보네…. 저 사람도.’
에린은 멀찍이서 차한성을 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눈치는 밥에 말아 먹은 수준 하고는 은현만큼, 아니 은현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이 상황에서 딱딱하게 굳어있는 에이라의 얼굴을 보고도 무엇이 문제인지,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결국, 마지못해 에린이 나서서 차한성의 등에 업혀있던 델리아를 부축해주는 것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차한성은 작게 고개를 숙여 에린에게 고맙다는 듯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에이라와 카인에게 다가왔다.
“선배. 부단장님 급하게 말씀드려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한시라도 급히 전달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을 얼굴 표정으로 설명하고 있는 차한성을 보고, 에이라와 카인이 곧장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지?”
“이 개미굴 안에…. 악마가 있었습니다.”
차한성은 은현과 리오드와 함께 산란장을 파괴하면서 악마의 습격을 받았던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리오드가 홀로 남아, 그 악마를 상대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아버지가….”
“단장님이….”
리오드의 소식을 들은 에이라와 카인이 작게 중얼거리며 복잡한 낯빛을 띄웠다.
에이라는 당연히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카인은 페르니아스 왕국의 영토 내부에 악마가 숨어들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고민했다.
“내 제자 녀석은 어디에 있지?”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시에테가 차한성에게 물었다.
“은현님은…. 도중에 단독으로 움직이신다고 하시고 어딘가로 가셨습니다. 아마도….”
차한성은 주위를 둘러보며 혐오스러운 촉수 무리가 일제히 정리된 것을 파악했다.
이 상황이 은현이 움직인 결과라는 것을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두 분의 전언은 현재 개미굴 내부 곳곳에 퍼져있는 산란장을 파괴하고 모든 괴물을 배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개미굴 내부에 존재한 괴물들이 인간들을 잡아먹고 더욱 성장하기 이전에, 지상으로 나가 사람들을 습격하기 전에 이곳에서 정리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
은현과 리오드는 차한성과 델리아에게 이 전언을 공략 원정대원들에게 모두 알리도록 명했다.
“하지만….”
악마의 존재를 들은 에이라는 쉽게 승낙의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빨리 아버지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조금이나마 이성을 찾은 상태로 아까처럼 리오드를 찾으러 가자고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
단지 딸과 기사라는 위치의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녀석이라면 괜찮겠지.”
망설이는 딸의 마음을 설득해주는 말은 의외롭게도 시에테의 말이었다.
“어, 대스승님. 리오드님 아세요?”
에린은 시에테의 입에서 리오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줄은 몰랐는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오드나 차한성과 함께 은현이 시에테에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겨우살이’라는 검을 보여주었을 당시 에린도 같이 있었지만, 시에테가 리오드와 검을 겨루어보았던 적은 에린의 기억 속에는 없었다.
“최근에 한 번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보기 드물게 잘 단련된 검사였다. 제자 녀석의 친구이기도 하고, 제법 심지도 굳은 면이 있어서 한 수 가르쳐줬던 적이 있었지. 그건 물건이야.”
검술이라는 분야에서 가지고 있는 재능은 다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
나이는 마흔을 넘어가고 있음에도 그 기력은 전혀 쇠하지 않았고 아직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도 남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출중하고, 무엇보다도 리오드 본인이 가지고 있는 목표가 너무도 뚜렷했다.
친구이자 동경의 대상인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열망은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명예와 칭호를 거머쥐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성장을 추구한다.
단 하나뿐인 제자인 은현에게도 칭찬하는 것이 인색한 시에테치고는 상당히 후한 칭찬이었다.
“대스승님. 현이는 그렇게 칭찬해주지 않으셨는데….”
“재능이 있고 없고를 확실히 말했을 뿐이다. 애초에 내 제자 녀석은 칭찬해준다고 더 높게 날아오르는 녀석이 아니다. 아내라는 녀석이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아, 알고 있거든요!?”
마치 자신보다 은현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시에테의 무심한 도발에 에린이 발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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