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3화 〉 643. 사육된 재앙(8)
* * *
콰아앙!
거칠게 뒤흔들리는 진동과 어두운 내부.
“…흠?”
일변하는 배경 속에서 눈을 뜬 시에테는 인상을 찡그리며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쥐었다.
자신이 어딘가로 소환되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핏덩이가 날 소환한 거로군.’
이 현상은 시에테의 예상 속에 상정되어 있던 현상이었다.
현재 자신이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잘 수 있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게 된 경위에는 여신에게서 특별한 권능을 부여받은 에린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에테는 살아있는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엄연히 에린의 권능으로 구현된 만큼 백귀의 상태로 에린에게 귀속되어 있는 상태다.
“대스승니임!”
아니나 다를까 에린이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자신을 부활시켜준 은혜도 있고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은현도 아니고 자신의 제자가 키운 새파란 핏덩이가 자신을 부린다는 것은 그리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대스승님! 저 괴물 좀 혼내주세요! 저한테 못된 생각을 품고 있는 아주 나쁜 녀석이에요!”
“…흐음.”
시에테는 에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촉수의 무리를 응시했다.
꾸물거리는 거대한 촉수들이 백귀들과 에이라, 카인과 함께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다.
이윽고 시에테가 다시 시선을 옮겨 에린을 쳐다보았다.
“…….”
“왜,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잔소리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시에테는 일단 저 싸움을 빨리 끝내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갑작스레 영문도 모른 채로 이곳에 소환하게 된 경위를 묻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만약 시원찮은 이유로 자신을 소환한 것이라면, 시에테는 에린의 이마에 꿀밤을 먹여 단단히 혼을 내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읏….”
잔소리가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린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애써 그 반응을 감추려 했지만 시에테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드는 어린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허리춤에서 검을 빼든 시에테는 곧장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백귀들과 촉수들의 무리에 뛰어들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에린은 떨리는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저 거대한 괴물을 자신이 혼자 잡는 게 아니라, 백귀가 있고 에이라와 카인이 있으며, 시에테가 있다.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며 허리춤에서 레반테인을 뽑았다.
신수의 힘을 개방하여 정갈한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시에테의 뒤를 따랐다.
‘저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돼.’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면 자신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금위계 모험가라는 명예와 위상에 걸맞지 않은, 은현의 제자라는 명성에 금이 가는 것만큼은 에린의 자존심이 절대로 허락지 않았다.
그 결심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베르단디의 말 때문이었다.
‘빨리 처리하고 현이한테 갈래!’
은현의 마음 상태가 위태롭다는 이야기는 거대한 감정의 격류에서 흘러나오는 공포조차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용기를 심어주었다.
“언니이이이!”
에린은 목청을 높이며 에이라를 불렀고 흔들린 멘탈을 붙잡아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정신차렸구나.’
울먹이며 은현만을 찾고 있던 에린이 뒤늦게라도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깨닫자 에이라가 미소지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에이라는 몸을 옆으로 던지듯 빼면서 자신을 향해 내리쳐오는 거대한 촉수의 묵직한 타격을 피해냈다.
쿠웅!
지면과 충돌하여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지면이 거칠게 떨린다.
곧바로 자세를 잡아 무너졌던 균형을 다시 되찾고 쓰러지는 것을 방지한 에이라는 바닥과 충돌한 촉수를 베어냈다.
“하앗!”
에이라의 검격으로 촉수의 몸통 일부가 잘려나간 사이.
권투사 백귀, 트리스탄이 기합을 내지르며 그 촉수의 틈새 사이를 파고 들었다.
이윽고 있는 힘껏 주먹을 내지른다.
퍼엉!
권격에 담겨 있던 마력이 해방되면서 묵직한 타격이 갈라진 촉수의 틈새에 직격하여 터뜨렸다.
그 공격력은 이미 모그라프령에서 에이라 또한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역시나 근접한 거리에서 피부로 느껴보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눈앞의 권투사 백귀 뿐만이 아니다.
전투에 임하여 촉수들을 처리하고 있는 백귀들의 전투력 하나하나가, 아르티아 기사단의 상위 선임기사들을 가볍게 상회한다.
아마도 리오드나 카인, 그리고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실력조차 겨루지 못할 수준.
그리고 그 백귀들의 전력을 가볍게 능가하는 여검사가 싸움에 참전했다.
[시에테 검성술]
[매화(?花)의 바람]
잔잔한 선풍을 휘감은 검격은 유려하면서도 빠르고 깨끗하기 그지없다.
고요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시에테의 칼날이 전방에 위치한 거대한 촉수의 몸통에 직격한다.
서걱
깨끗하게 절단된 촉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시에테가 촉수를 베고도 몇 초가 지나서야 벌어진 일이었다.
‘…진짜 대단해.’
바로 옆에서 시에테의 뒤를 따라 달려오고 있던 에린에게는 보면 볼수록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검술이다.
은현에게서 검의 기초를 배우고, 갤러해드에게서 세검술의 심화를 배운 에린은 아무리 노력해도,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경지.
칼날의 수십 배나 되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촉수를 완전히 갈라버리는 시에테의 검술은 은현의 검을 연상시키는 유려함과 깨끗함이 가득했다.
생각해보면 에린이 시에테를 보면서 은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에게 검을 가르친 것은 시에테였으니까.
하지만 시에테에게 검을 배운 은현에게서 똑같이 검을 배운 자신이 ‘시에테를 따라잡을 수 있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면 에린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공격의 시작되는 지점부터 촉수를 베는 일련의 동작들은 두 눈으로 보고 인식했음에도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것.
저것은 축복받은 재능과 노력이 어우러져야만 도달할 수 있는 달인의 영역이다.
하지만 그 검술을 이해하고 그 역량과 수준을 파악하게 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에린의 성장은 확실했다.
‘나도…. 나도 현이의 제자야.’
에린은 레반테인을 쥔 손에 힘을 실어 꽉 쥐었다.
은현이 시에테의 제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듯이, 에린 또한 은현의 제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스승을 생각하는 그 마음과 자부심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라, 에린은 확신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에린은 자신의 레반테인에 검기를 둘렀다.
“에잇!”
청염이 일렁이는 여우불로 뒤덮인 레반테인을 휘둘러 거대한 촉수의 몸통을 갈랐다.
레반테인의 칼날에 깃들어있는 청염이 순식간에 촉수의 몸통에 옮겨붙어 모조리 불태우기 시작한다.
◆ ◆ ◆
멘탈을 다시 잡고 고군분투하는 에린의 소식은 베르단디를 통해 다시 은현의 귀에 들려왔다.
‘…그렇군요.’
기운을 차리고 촉수 괴물에게 대항하기 위하며 노력하고 있다는 에린의 이야기를 들은 은현이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은현은 에린 쪽과 빠르게 합류하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은현님?”
은현이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추자 차한성과 델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전방의 은현을 바라보았다.
“먼저 가시죠.”
“…예?”
쿠웅!
천장 위에서 느껴지는 거센 진동은 이 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
급박한 상황에서 따로 단독행동을 하겠다는 은현의 말은 델리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 길을 쭉 따라 올라가시다 보면 위쪽과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가서 기사분들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쉬지 않고 몇십 분을 달린 탓인지, 숨이 턱까지 차올랐던 델리아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하, 하지만….”
한 명의 이탈은 밸런스의 위태로움과 자신과 차한성에게 더 큰 부담을 짊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
게다가 은현의 무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델리아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결정 권한이 없다는 것을 델리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권유나 허락을 받기 위한 말이 아닌, 일종의 통보다.
“알겠습니다.”
은현의 이탈로 인해 불안해하는 델리아와 달리, 차한성은 담담히 그 통보를 받아들였다.
“서, 선배님!”
“괜찮아.”
불안해하는 델리아를 다독였다.
은현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판단을 내리는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행동에는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존재한다.
“가보겠습니다. 은현님도 조심하세요.”
“네. 두 분도요.”
은현은 서둘러 다시 달려가기 시작하는 두 기사를 뒤로 하고, 짧게 읊조렸다.
“나와.”
어두운 구덩이 속에서 작은 그림자가 스멀스멀 올라와 모습을 드러냈다.
불꽃처럼 일렁이는 그림자는 조금씩 형체를 갖춰나갔고 은현의 앞에 나타난 것은 악마였다.
“어떻게 알았어?”
살색이 드러나는 선정적인 복장과 허리에서 돋아난 한 쌍의 검은 악마 날개.
잘록한 허리와 고혹적인 몸매를 그대로 과시하는 악마의 머리에는 한 쌍의 산양 뿔이 달려있었다.
인간을 유혹하며 정기를 뽑아먹는 서큐버스였다.
악마는 은현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네 악취가 이렇게 심하게 나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대놓고 비웃는 은현의 태도에 악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한낱 식량과도 같은 존재에 불과한 인간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이 불쾌한 듯 보였다.
“건방진 인간이네.”
악마는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여 은현에게 다가갔다.
악마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주위를 잠식해나가며 서큐버스의 고유 능력이 발동되었다.
[서큐버스 고유 능력]
[매혹의 눈]
기운을 접한 것만으로 상대방의 이성을 잠식하여 세뇌시키고, 악마의 노예로 만드는 아주 강력한 능력은 이 구덩이 안으로 모험가들을 유인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쓰였던 능력.
‘맛있어 보이는 인간이야.’
악마는 눈앞의 백은발 남성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체격도 다부지고 얼굴도 제법 잘생겼다.
품고 있는 기운도 어딘지 모르게 탐스러운 과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향기를 흘리고 있다.
‘죽이는 건 아깝네. 평생 노예로 부려먹을까.’
저 정도의 외모라면 세뇌시켜서 자신의 시중을 들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윽고 은현과 악마의 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악마는 스스럼없이 은현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지금껏 중급 악마인 자신의 세뇌에 저항을 해왔던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악마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변은 너무도 쉽게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은현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려는 악마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한테 세뇌는 안 통해.”
“…어?”
그 행동은 굉장히 느렸지만, 악마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지금껏 단 한 명도 저항하지 못했던, 자신의 세뇌를 간단히 깨부숴버리는 최초가 등장한 지금, 악마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벙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현은 굳은 얼굴로 자신이 붙잡은 손목의 주인인 악마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요염한 행동과 육체적인 관능미를 동반한 서큐버스의 세뇌라고 하더라도, 여신의 가호로 강력한 정신방벽을 가지고 있는 은현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은현은 흘끗 시선을 위로 옮겨 자신을 흘겨보고 있는 베르단디를 바라보았다.
‘…저 이번에는 유혹 안 당했잖아요.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베르단디님.’
구미호에 의해 정신방벽이 뚫리면서 아주 잠깐 유혹에 넘어갔던 사건으로 심각하게 토라져 있었던 베르단디에게 필사적으로 해명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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