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2화 〉 642. 사육된 재앙(7)
* * *
“…에린?”
은현은 자신의 영혼을 술렁이게 만드는 기묘한 파장을 감지했다.
그 이변을 베르단디 또한 눈치챘다.
[이건….]
급격한 감정의 물결이 격정적으로 흘러들어와 마음속을 술렁이게 했다.
그것은 자신과 사도의 권속으로 영혼이 연결된 에린의 감정.
에린의 영혼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은현이 순간 멈칫하여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도대체 에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2년 동안 모험가 활동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이렇게 격정적인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에린이 이 정도로 무언가에 겁을 집어먹다니,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그러신가요?”
은현이 얼굴을 굳히며 행동을 멈추자 차한성과 델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은현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은현이 대답할 틈도 없이, 이변은 곧바로 일어났다.
쿠구구구
개미굴의 천장이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무언가가 이 위를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차한성과 델리아가 몸을 딱딱히 경직시켰다.
“죄송하지만, 속도를 좀 더 높여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은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속력을 높였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차한성과 델리아가 긴장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 사람은 굴 내부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위를 향해 올라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잡았다.
이 개미굴 내부에 존재할 산란장들을 차례차례 파괴하는 것보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두운 통로 속에서 수십 갈래로 나뉜 갈림길들을 수십 차례나 만났지만, 감지를 통해 위로 향하는 길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은현은 망설임 없이 달렸다.
어떻게 길을 탐색하고 있는 것인지, 차한성과 델리아가 막힘없이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은현을 보며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경이로웠던 것은 점점 빨라지고 있는 은현의 속도다.
속으로 에린을 걱정하고 있는 은현은 조급한 마음에 무의식적으로 점점 더 가속하고 있었다.
‘베르단디님.’
이윽고 은현은 속으로 자신의 여신을 불렀다.
◆ ◆ ◆
에린의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 안에 깃들어있던 방대한 신수의 기운이 외부로 방출되었다.
“에, 에린…!”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떨고 있는 에린을 본 에이라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감정의 폭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신수의 힘을 사용하고 있는 현 상황은 최악의 상황 중에 일어난 단 하나의 행운과도 같은 일.
“현아아아! 도와줘어! 저거 싫어!”
울먹이면서 은현을 찾으며 무의식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발동했다.
[호족 요술(?? ??)]
[백귀야행(???行)]
에린의 허리 아래 부근에서 마력으로 형성된 백은의 아홉 꼬리에 일렁이기 시작하는 푸른색의 불꽃들이 점점 커지며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기사들로 형체가 바뀌었다.
구미호로의 변신과 백귀들을 소환한 것은 에린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으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로서 본능에 의한 행동.
소환된 백귀는 따로 명령을 받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이 소환된 이유와 역할을 이해했다.
어째서 에린이 저렇게 공포를 느끼며 울먹이고 있는지도.
백귀들을 지휘하는 검사 백귀, 아서가 검을 들어 올려 다른 백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우리의 주인을 지키고 적을 섬멸해라.”
“오우!”
“하하! 싸움이다!”
어떤 백귀는 기운찬 대답을 돌려두었으며, 어떤 백귀는 전장에 소환된 것이 그저 즐거운지 환호했다.
구덩이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백귀들과 에린, 에이라와 카인이 있는 곳을 짓뭉개기 위해 날아왔다.
“퍼시벌.”
“음.”
본인의 체구만큼이나 거대한 그레이트 소드를 든 백귀.
퍼시벌이 전방으로 서며 맹렬한 기세로 내리찍어오는 거구의 촉수를 그레이트 소드로 튕겨냈다.
콰앙!
묵직한 중압감에 의해 퍼시벌의 몸이 뒤로 밀려났지만, 그레이트 소드에 의해 가로막힌 촉수 또한 궤도가 틀어지며 아무것도 없는 지면을 분쇄했다.
그 충격 한 번으로 인해, 개미굴 내부가 거칠게 뒤흔들린다.
두 백귀들이 아직 공포에 떨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에린의 호위로 남았고, 이외의 백귀들은 촉수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일제히 행동에 나섰다.
다른 백귀들에게 지시를 내린 아서 만이 그대로 고개를 살짝 돌려 바닥에 주저앉은 에린의 상태를 관찰했다.
“현아….”
무의식적으로 구미호로 변신하여 백귀들을 소환한 에린은 그에 대한 자각이 없는지 넋이 나간 모습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애타게 찾는 것처럼, 하염없이 은현의 이름을 부를 뿐.
아서는 저렇게 뒤흔들린 멘탈을 고쳐주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에이라와 카인 또한 에린의 멘탈이 부서진 원인이 이 개미굴의 구멍들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십 개의 촉수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원인을 파악해도, 저 원인이 어떠한 결과로 에린의 멘탈을 건드린 것인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에이라와 카인에게 저 촉수들은 그저 크기가 커다랗고 징그러운 생물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 촉수들의 근원인 본체에서 느껴지던 감정을 읽어 들인 에린에게는 저 괴물은 전혀 다른 존재였다.
애초에 에린은 평범한 인간들보다 예민한 감각과 함께 이성을 가진 존재에 대하여 감정을 읽어 들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신수의 후계자.
타인들과 달리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식 자체가 조금 틀리다.
에린은 저 촉수들의 근원인 본체에서 읽히는 감정에 공포를 느꼈다.
‘범하고 싶다. 유린하고 싶다. 저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내 씨앗을 심어 아이를 낳게 하고 싶다.’
등 하나같이 추잡하고 더러운 정욕의 감정들.
그 감정의 크기는 평범한 인간 남성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비유하자면 하늘 위를 뒤덮는 거대한 구름과도 같았다.
‘무리야.’
에린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레반테인을 뽑기도 전에, 싸움을 포기했다.
저 커다란 감정의 격류에 휩쓸려 공포로 인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지금껏 강하고 거대한 마수들을 몇 차례나 처리해본 경험도 가지고 있었지만, 저것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마수들은 이성이라는 것이 없으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전투와 생존에 전념하여 싸움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저 커다란 감정 자체를 만난 것은 에린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저 거대한 촉수들이 자신의 몸을 더듬고 유린하며 도저히 입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심한 짓들을 할 것이라고 상상하니, 손발이 떨려서 움직여지지 않는다.
“현아…. 도와줘. 제발….”
그래서 하염없이 은현만을 찾았다.
“에린…! 안돼! 어서 일어서…!”
다급히 에이라가 에린을 재촉하였지만, 에린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무서운 중압감으로 덮쳐오는 거대한 촉수가 다시 그들을 깔아뭉개고 다지기 위해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촉수가 에린과 에이라를 짓뭉개며 다진 고기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서걱
거대한 촉수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그대로 쓰러지며 지면에 충돌했다.
머리 위를 뒤덮고 있던 촉수를 아서가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양단을 내버린 것이다.
그 깔끔하고 위력적인 백귀의 검격은 기사로서 검술을 연마한 에이라와 카인을 놀라게 할 수준.
‘단장님과 동급?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위력 자체는 전력을 다한 리오드와 비교를 하지 못하지만, 유려하게 흘러갔던 그 검술의 완성도 자체는 웬만한 기사의 수준을 압도한다.
저 백귀는 검기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저 정도의 공격력이라는 것은 자신의 상관인 리오드와 제법 견줄 수 있을 만한 실력을 갖춘 검사라는 것을 뜻한다.
‘그 양반의 주변은 모두 저런 강자들만 널렸군.’
어떠한 형태로 에린에게 귀속된 ‘귀신’ 또는 ‘영혼’의 부류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 든든한 원군인 백귀들은 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 비추는 희망의 빛과도 같다.
“주인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아서의 말은 에이라나 카인에게 향한 말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촉수를 정리해버린 검사 백귀.
푸른색 불꽃이 일렁이는 투구로 둘러싸인 아서의 얼굴은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인지 시선을 파악할 수 없었으나, 그의 고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에이라는 누구를 보고하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서의 고개가 향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역시나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서는 자신의 주인인 에린이 은현과 사도의 권속 계약을 맺어 신력을 일부 받아들인 탓에,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영체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모습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곳에 존재하는 여신의 존재는 아서에게도 느껴졌다.
[나에게 맡겨두어라.]
에린의 앞에 영체화의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베르단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히 신력의 존재만을 느끼고 있을 뿐, 베르단디의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서는 베르단디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영혼이 종속되어 있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맡겨두고 아서는 눈앞의 적을 배제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저희와 함께 적의 섬멸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에이라는 아서의 부탁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촉수 괴물의 본체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감정의 격류를 읽어 들이고 공포로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에린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이라면 괜찮습니다. 이미 주인의 부군께서 보내신 분이 와 계시니까요.”
“네…? 그게 무슨….”
에린의 부군이라면, 그것은 은현을 뜻하는 말일 터.
하지만 여신인 베르단디의 존재를 알아챌 수 없는 에이라에게는 여전히 영문모를 소리였다.
에이라는 빠르게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에린은 자신보다 강한 전력인 백귀들이 지켜줄 터이니, 아마 자신이 지켜주는 것보다 더욱 안전할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라는 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알겠어요. 부단장님!”
“그러지.”
작게 고개를 끄덕인 카인이 먼저 앞장을 섰고 에이라가 검을 뽑은 채로 그 뒤를 따랐다.
백귀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촉수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신수 아이야.]
“베, 베르단디니임….”
에린은 상냥하게 자신을 끌어 안아주는 베르단디의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포근함에 둘러싸인 에린은 가슴 속에 가득 차 있던 공포의 감정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지만, 그 근원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나에게 이야기해 보거라.]
“저, 저 괴물이 저를…!”
에린은 저 촉수 괴물들이 이어져 있는 본체가 자신을 향해 어떠한 감정들을 품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렇구나.]
사정을 들은 베르단디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위로했다.
신수의 힘으로 특별한 능력을 각성시킨 에린은 다른 인간들과 달리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감정을 읽어 들일 수 있는 이 능력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베르단디는 차분히 에린을 위로하고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신수 아이야. 힘들겠지만…. 지금은 일어나야 한다.]
“하, 하지만….”
에린은 몸을 떨며 망설였다.
도저히 자신의 몸을 탐하기 위하여 추잡한 정욕을 불태우고 있는 저 거대한 괴물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저 강하고 거대한 괴물이라면 에린도 이렇게 겁을 먹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저 괴물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생리적으로 정말 무리였다.
[지금은 아이도 많이 위태롭다.]
“혀, 현이가요…? 다쳤나요!?”
[아니. 몸이 문제가 아니다. 정확히는 마음의 문제지.]
베르단디는 괴물의 아이를 배 속에 수태한, 죄 없는 무고한 여성들의 목숨을 끊으면서 은현의 마음속에 또다시 균열이 가기 시작했음을 직감했다.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면 할수록,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고 자책하면서 자기혐오에 빠지기 직전의 단계.
이럴 때 은현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베르단디 또한 안타까움에 낯빛이 흐려져 있었다.
“현이가….”
지금 은현의 마음속이 어떤 상태인지 에린은 짐작할 수 없었지만, 베르단디의 말은 거짓이 아니리라고 확신했다.
짧은 고민을 앞에 두고, 에린은 결심을 굳힌 눈으로 빛을 발했다.
[마음을 정한 모양이구나.]
“…네. 현이가 그런 상태라면 저도 여기서 무서워서 벌벌 떨 수만은 없어요.”
에린은 꼭 끌어안고 있던 베르단디의 품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이 상황을 바로 정리할 수 있겠느냐?]
“지금 깨달은 건데…. 전 혼자가 아니잖아요.”
에린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불러들인 백귀들이 에이라와 카인과 함께 거대한 촉수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런 괴물을 혼자서 상대해야만 했다면, 에린은 분명 멘탈이 깨지면서 전신은 공포로 마비가 되고 그대로 전의를 상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신이 전의를 상실한 동안 필사적으로 싸워주고 있는 자신의 백귀들과 에이라, 카인이 있었다.
“…진짜 쪽팔려. 현이가 알면 날 혼낼지도 몰라.”
괴물이 품고 있는 거대하고 추잡한 악의에 사로잡혀, 자신 혼자만이 아무것도 못 하고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하고 나니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무섭다면 자신과 함께 싸워줄 동료들을 부르면 된다.
다행히도 자신의 방어본능으로 인해 소환된 백귀들을 보고 에린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부를 수 있는 백귀는 이제 아홉 명을 제외하고도, 또 한 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스승님을 부르자! 그리고 현이가 시켰다고 하는 거야!’
저 괴물을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건 생리적으로 도저히 무리였던 에린은 자신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묘수를 떠올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검사를 소환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