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1화 〉 641. 사육된 재앙(6)
* * *
“아, 악마….”
차한성은 경직된 채로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리오드가 아니었다면, 악마의 손톱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고 순식간에 이곳에서 끝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상상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큭큭.”
낄낄대며 웃고 있던 악마를 마주하고 리오드는 행동을 망설이지 않았다.
배제해야 하는 적을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리는 것은 쓸데없는 사치다.
리오드는 곧장 악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이쿠!”
아래에서 위로 그어지는 깔끔한 올려베기는 상대방을 반으로 가르는 공격력을 가진 매서운 검격.
하지만 악마는 여유를 보이며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리오드의 검격이 허공을 갈랐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바람을 가르면서 생기는 돌풍이 전신을 덮쳐오는 감각은 그 위력을 상상케 할 정도였다.
“핫…!”
리오드의 검격을 바로 코앞에서 피부로 실감한 악마는 환한 웃음을 띠며 들뜬 목소리를 흘렸다.
이윽고 다시 기다랗게 성장시킨 악마의 손톱이 그대로 훤하게 드러난 리오드의 복부를 관통하는 매서운 찌르기가 이어졌다.
자신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고, 순식간에 들어오는 반격을 눈치챈 리오드 또한 다리를 움직였고 허리를 비틀어 날카로운 손톱을 피해냈다.
서로의 공방을 한 차례씩 주고받고 리오드와 악마가 뒤로 물러서며 서로에게서 거리를 유지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아무런 말도 없이 마주했다.
한 마디도 오가지 않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지만, 둘이 생각하는 것은 똑같았다.
‘강하다.’
‘강하네.’
서로 단 한 차례의 공방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리오드와 악마는 서로의 수준을 가늠했다.
그 끝을 알 수는 없었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공통된 생각과 달리, 둘의 반응은 갈렸다.
리오드는 악마를 앞에 두고 경계의 태세를 풀지 않으며 노려보고 있었고, 악마는 리오드를 보며 여유로운 태도로 호전적인 웃음을 띠고 있었다.
“은현.”
리오드는 그렇게 악마를 마주하며 은현을 불렀다.
“먼저 가라. 이놈은 내가 맡겠다.”
짧게 선언하는 리오드의 말에 은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진심이냐?”
“그게 맞는 판단이라는 걸 네가 모르지는 않을 텐데.”
“…….”
은현은 속으로 고민했다.
리오드의 판단은 대체로 올바르다.
현재 자신들은 개미굴 안에 얼마나 있을지 모를 산란장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 급선무.
게다가 한시라도 빨리 탐색 원정대원들과 합류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 이 악마 하나에게 붙들려 있는 것은 그렇게 좋은 전개가 아니었다.
차라리 넷이서 상대하여 저 악마를 빠르게 처리하는 수도 생각해보았지만, 리오드는 차한성이나 델리아는 저 악마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남고 기동성이 좋은 은현과 두 사람이 다른 산란장을 모조리 파괴하고 탐색 원정대원들과 합류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 리오드의 판단이다.
그 판단의 근거는 기본적인 전제로 저 악마를 리오드가 혼자서 막아내고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조건이 깔려있어야 한다.
리오드는 허투루 허세를 말하는 남자가 아니며, 그것을 가능케 할 자신이 있었다.
이윽고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응시하며 고민하고 있는 은현의 시선을 느낀 리오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믿어라.”
“…알았어.”
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자신을 믿어달라는 친구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상하 관계가 아닌,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등한 위치에 서 있고 싶은 동료이자 친구의 신뢰를 바라는 말에 은현은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차한성과 델리아를 바라보고 악마가 서 있는 입구 쪽을 눈짓했다.
“…….”
두 사람은 그 눈짓의 의미를 깨닫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 또한 리오드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자신의 상관이자 왕국 최고의 기사.
믿지 않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선행하여 달리기 시작하는 은현에 이어, 두 기사가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은현은 개미굴의 다른 통로를 향해 달려나가면서 계속해서 악마를 주시했다.
혹시라도 들어올 방어에 대하여 대비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악마는 그 경계를 허무하게 만들 듯 은현과 차한성, 델리아에게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악마의 시선은 오로지 자신과 대치한 리오드에게만 꽂혀 있었다.
그 시선에 깃들어 있는 것은 강자와 대치한 전사의 호전적인 눈빛.
은현과 두 기사는 그렇게 아무런 방해도 없이 산란장을 나가 이동했다.
역겨운 악취가 가득한 산란장 개미굴 내부에 둘만이 남게 되자, 리오드는 악마에게 물었다.
“…꽤 간단히 보내주는군.”
“큭큭. 내가 저것들을 쉽게 보내준 게 그렇게 의외였나?”
“…….”
리오드는 꽉 쥐고 있던 검에 힘을 실으면서 대답 대신 매서운 눈빛으로 악마를 노려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악마가 이곳을 나가 이동하려는 은현과 자신의 두 부하를 노린다면, 곧바로 그 행동을 저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악마는 너무도 간단히 세 사람을 보내주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간단하지. 너를 죽이고 바로 쫓아가서 죽이면 되니까.”
악마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감이 찬 목소리로 말했다.
“넷 중에서 네가 제일 강하겠지? 너만 정리한다면 이 굴 안으로 기어들어 온 개미 새끼들을 정리하는 건 일도 아니야.”
적을 친다면 그 머리를 노려라.
가장 강한 상대를 쓰러뜨린다면 그 아랫것들을 정리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게다가…. 이 굴 안에 있는 악마가 나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거든.”
설령 자신이 리오드를 빠르게 정리하지 못하더라도, 자신 이외의 또 다른 악마가 이미 행동을 개시했으니 공략 원정대원들이 정리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난 약한 것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지금 내 관심은 오직 너뿐이지.”
악마는 손가락으로 리오드를 가리키며 웃었다.
“이곳에 기어들어 온 인간들은 하나같이 약해 빠졌었거든. 내 공격을 제대로 대응해낸 것은 네 녀석이 처음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리오드가 빠르게 죽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강했다.
리오드는 자신과 목숨을 건 사투를 이어나가며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열망을 띄우는 호전적인 악마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
악마의 본심을 들은 리오드가 단단히 유지하고 있던 경계를 약간 느슨하게 풀고 웃음을 흘렸다.
“흠?”
악마는 어째서인지 긴장의 끈이 느슨해진 리오드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어떤 말이 그가 긴장을 풀게 된 원인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악마는 호기심을 가지며 리오드의 질문을 기다렸다.
“이 굴 안에 있는 또 다른 악마는 너보다 강한가?”
“음? 아니. 내가 더 강하다.”
“그런가. 그렇담 안심이군.”
“…무슨 의미지?”
이번에는 반대로 리오드가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자 심기가 불편해진 악마 쪽이 인상을 찡그렸다.
“네 녀석이 보내준 내 친구가 나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지.”
“…….”
은현이 그 악마 쪽을 상대해준다면 그쪽은 아마도 무사히 사건이 잘 해결될 것이다.
리오드가 갑작스레 되찾은 여유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현의 존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즉 내가 이곳에서 너를 처리하기만 한다면, 이 굴을 공략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뜻이다.”
자신감이 넘치는 리오드의 말을 들은 악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자신보다 하등한 인간인 주제에, 설마 자신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 건방짐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높게 평가해줬다고 주제를 모르는군.”
악마는 양손의 손톱을 길게 성장시켰고 이를 갈며 리오드를 노려보았다.
손끝에서 자라난 열 개의 날카로운 손톱은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며 살벌한 빛을 뿜어냈다.
“본래 네 놈의 그 육체는 나의 주군이신 구시온님께 바칠 육체로 온전한 상태로 제압하고 싶었지만, 건방진 그 입을 함부로 놀린 대가를 치르도록 해주마.”
“쉽지 않을 텐데.”
리오드는 장검을 쥔 양손에 힘을 실어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서로를 마주하기를 아주 짧은 순간, 둘의 모습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고 다시 둘의 모습이 드러났을 때는 서로의 공격이 충돌한 상태였다.
카아앙!
기사와 악마의 격돌을 시작으로, 매서운 힘의 충돌로 휘몰아치는 폭풍이 산란장의 내부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 ◆ ◆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에이라는 몸 안쪽부터 밀려 올라오는 구토감을 참지 못했다.
복부가 볼록하여 배 속에 아이를 가진 듯한 나체의 여성들과 몸속의 영양분이 모조리 빨려버린 여성들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굴의 내부는 끈적한 체액으로 뒤섞인 알껍데기가 가득하다.
마치 곤충의 부화장을 거대한 크기로 확대해놓은 것만 같았다.
“웁…!”
결국, 에이라 바닥에 위액을 쏟아내고 있을 때, 에린과 카인 또한 역겨움을 참아내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특히나 에린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감각이 민감한 만큼, 충격 그 자체인 시각적 비주얼과 코를 타고 들어오는 역겨운 냄새가 더더욱 심했다.
그런데도 에이라와 달리 그 역한 구토감을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감각에 걸리는 무언가의 기척 때문이었다.
역한 구토보다도 더욱 거슬리는 것은 이 존재의 기척.
‘뭐야? 이건 도대체….’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는 곳은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에린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이 개미굴 전체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 굴 전체가 괴물의 내부라고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
전신의 피부가 오싹 소름 돋아 몸을 떨게 했다.
쿠구구구
이윽고 세 사람이 있는, 산란장을 연상시키는 개미굴 내부 전체가 거칠게 진동했다.
“무슨 일이…!”
에이라는 속을 게워내고 황급히 몸을 일으켜 허리춤의 검을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경계의 태세를 취했고, 그것은 카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싫…어….”
오직 에린만이 긴장과 두려움으로 몸을 벌벌 떨며 바닥에 주저앉아 전투의 태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린!? 왜 그래!?”
에린의 상태가 이상함을 느낀 에이라가 다급히 에린을 불렀지만,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찬 에린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산란장 개미굴의 천장과 벽, 지면 곳곳에 뚫려있는 수십 개의 구덩이로부터 무언가들이 스멀스멀 올라와 존재를 드러냈다.
“저건…. 도대체…?”
길게 뻗은 검은색의 굵은 촉수들이 하나가 아닌 수십 개.
꿈틀거리며 산란장 내부를 누비고 있는 촉수들을 보며 카인과 에이라가 경악했다.
본체로부터 이어진 촉수들의 크기를 보면, 괴물의 본체가 얼마나 커다란 크기를 가졌는지 도저히 가늠되지 않았다.
어째서 저런 것이 이런 지하 안에 존재할 수가 있는 걸까.
도저히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괴물의 일부를 마주하고 카인과 에이라가 경악하고 있을 때, 에린이 공포로 물든 얼굴로 외쳤다.
“싫어…! 오지 마!”
“에린!”
어째서 에린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에이라는 더욱 당혹스러웠다.
에린은 신수의 힘을 각성하면서 타인의 감정 일부를 읽어 들일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이성을 가지고 있는 괴물의 감정이 고스란히 에린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수십 개의 거대한 촉수를 가진 괴물의 본체는 에린을 향해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
그 감정은 아주 간결한 단 하나의 감정.
수컷이 암컷을 보고 품는 욕정이었다.
평범한 여성과 달리 신수의 기운이라는 특별한 힘을 품고 있는 에린이라면, 더욱 강력하고 튼튼한 자손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 터.
먹음직스러운 기운을 가득 품고 있는 눈앞의 가녀린 여성을 범하고 유린하여 그 배 속에 자신의 씨앗을 주입하고 싶다.
욕정이라는, 괴물이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추잡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에린은 괴물의 그 감정을 모두 받아내지 못하고 절규했다.
“도와줘어어! 현아아아!”
거대한 괴물이 품고 있는 감정에 의해 멘탈이 무너진 에린이 절규하며 은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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