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0화 〉 640. 사육된 재앙(5)
* * *
배 속에 괴물을 수태한 여성들의 목을 찔러 숨통을 끊고 그녀들의 복부까지 찔러 태어날 괴물들까지 확실히 죽이는 작업은 최악의 기분이었다.
은현을 따라 리오드가 도우면서 거기에 차한성까지 가세했다.
‘…기분 더럽네.’
지구에서 죽고 이 대륙으로 전생 되어 새로운 삶을 부여받았을 때, 가장 적응이 되지 않았던 것은 이 대륙의 사고방식이다.
힘이 있으면 상대방을 겁박하고 착취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한다면 일방적으로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것이 당연하며 너무도 불합리하고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의 목숨이 사라져 간다.
이 세상에서는 이것이 당연하며 합리적이다.
차한성은 지구에서 가지고 있던 가치관으로 인해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서 이해하고 적응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도 적응 자체는 할 수 있었다.
모험가 활동을 하면서 다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기술들을 터득했고, 불합리한 일에 저항하고 악인들을 처치하는 것에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지금의 상황은 그 전제 자체가 틀리다.
저항하지 못하는,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던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차한성에게는 이 일은 너무도 저항감이 강했다.
심지어 많은 경험을 하면서 기사단장의 자리에 오른 자신의 상관, 리오드 조차도 이 여성들을 죽이는 것에 큰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리오드는 은현과 함께 여성들의 숨을 끊어놓는 것을 자처했다.
장검을 휘둘러 여성들의 목만을 정확히 찔러넣는 리오드의 모습에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이 가득했다.
그것은 차한성이 현재의 이 상황에 몹시 동요하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목을 꿰뚫는 칼날의 감각이 손을 타고 팔까지 전해져 오는 것에 다양한 감정이 뒤섞였다.
분노, 짜증, 미안함과 죄책감 등 굉장히 다양하다.
‘적이 아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정말로 기분이 더러웠다.
리오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써 평안한 안식을 만들어주는 것이 한계.
검을 휘둘러 여성들의 목을 절단하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지만, 조심스럽고 정중히 목에 칼날을 찔러넣는 리오드와 은현의 행동에는 사체를 최대한 훼손시키지 않으려는 고인들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 담겨 있었다.
차한성은 흘끗 은현을 바라보았다.
아직 저항감이 남아있어 순간순간마다 주저함이 보이는 리오드와 달리, 은현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고 신속했다.
여성의 목에 단검을 꽂아 넣고 숨통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면 자연스레 그녀의 복부에도 단검을 두 번 찔러넣었다.
배 속에서 태어날 괴물을 미리 죽여두는 것이다.
일련의 과정들이 주저 없이 신속하게 처리되는 것을 보고, 차한성은 은현이 이러한 경험을 몇 번이나 해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하는 사람일까.’
은현은 그런 생각이 계속 들게 만드는 남자였다.
자신과 같은 지구의 출신이라는 것과 별개로, 20년 전부터 리오드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여섯 영웅과도 친한 인맥을 가지고 있으며 강하기까지 하다.
그 또한, 이 상황이 구역질 나도록 싫을진대, 그것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꾹 참아내어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은 어딘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무엇 때문에 그는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은현에 대하여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단편적인 정보밖에 알지 못하는 차한성은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뒤이어 거대한 개미굴 내부에 있는 여성들을 모두 죽였을 때, 괴물들의 알껍데기를 모조리 파괴하는 작업을 마친 델리아가 은현에게 사과를 해왔다.
“자세한 사정이나 생각도 모르면서, 제 가치관과 기준으로 당신을 모욕했습니다. 정말로 사죄드립니다.”
진심으로 여성들에게 사과하면서 여성들의 목에 단검을 찔러넣던 은현을 본 델리아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굳은 얼굴로 자신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해오는 델리아를 보고, 은현은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오해나 비난을 받았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뒤늦게라도 알아차리고 자신에게 사과를 해오는 델리아의 심성에 은현은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다.
그녀는 기사로서의 정의와 사명감이 남들보다 좀 더 강하고 투철한 것뿐이다.
오히려 자신의 곁에 에린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감정이 격양됐을 에린은 다짜고짜 델리아의 뺨을 때렸을지도 모른다.
아까도 자신을 델리아에게 한 소리를 해주고 싶었던 베르단디가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육체를 현현하려 했던 것을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상황이 더 꼬였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저 사과를 봐서 넘어가 주마.]
그래도 델리아의 정중한 사과는 불편한 베르단디의 심기를 조금은 풀어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가자.”
은현은 휴식의 시간도 가지지 않고 곧바로 이동을 제안했다.
이런 개미굴이 몇 개나 더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한가로이 탐색을 진행할 수는 없었다.
같은 의견이었는지 리오드와 차한성, 델리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들의 체액과 사람들의 사체가 썩어 있는 이 장소에 오래 있고 싶지 않다는 사적인 마음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차한성이 발걸음을 옮겨 개미굴을 나가려다 순간 멈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
저들의 시체를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쉽게 죽고 사체가 간단히 길에 널브러지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죄도 없이 괴물들에게 처참하게 농락당하며 최후를 맞이한 이들을 방치하는 것이 맞을까.
하지만 그 고민도 잠시, 차한성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자신 또한, 다른 개미굴에 있을 다른 피해자를 수색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은현의 의견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네 사람은 그렇게 개미굴을 나와 통로를 이동했다.
이동은 매우 빠르고 신속했다.
지금까지의 탐색이 느린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휴식시간과 일정한 속도로 무난한 페이스를 조절했다면, 현재의 탐색은 휴식의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이동에 더 큰 비중을 두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당연히 개미굴 안을 활보하는 괴물들과의 전투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키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내는 괴물은 굴 내부를 활보하는 커다란 웜이었다.
길이가 3m가 넘고, 몸의 굵기도 제법 굵은 웜은 인간 메뚜기와 여성 거미처럼 사람의 특징을 크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한성과 델리아를 멈칫하게 만든 것은 웜의 머리 부분 때문이었다.
눈과 코, 귀 등이 달려 있지 않음에도 정확히 자신들을 마주하며 머리의 정중앙에 있는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그 입이 마치 사람의 치아를 연상시키는 모양새라 두 사람은 전신의 소름이 돋아 머뭇거렸다.
저것 또한 자신들이 보았던 그 굴속에서 인간 여성의 배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괴물들을 죽이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그 광경을 보고 난 이후이기 때문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
“정신 차려라!”
하지만 생사를 오가는 전투에서는 그 짧은 머뭇거림마저도 치명적인 실수가 되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리오드의 질책이 곧바로 날아왔다.
매서운 일갈과 함께 전방에 선 리오드는 양손에 쥐고 있는 장검에 마력을 실어 검기를 만들어냈고, 무서운 속도로 지면을 기어오는 웜과 대치했다.
요동치는 마력을 응축하고 전방의 웜을 향해 휘둘렀다.
자칫 잘못하면 이 굴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위력을 조절한 검기이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위력은 충분했다.
리오드의 목적은 이 개미굴 안에서 저 웜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개미굴 안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과 포지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올리비온 검술]
[바람베기]
리오드가 휘두른 검으로부터 해방된 마력의 검기가 전방으로 뛰쳐나가 거대한 웜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돌풍을 일으킨 매서운 검기는 평소 사용하는 리오드의 기술보다는 현저히 위력이 떨어졌으나, 웜의 입과 피부를 찢어발기기엔 충분한 공격력이다.
키아아악!
리오드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은 웜이 비명을 지르며 기다란 자신의 몸을 비틀었다.
얼굴과 앞부분의 피부를 찢고 살을 헤집는 격통을 느끼던 웜에게 두 번째 공격이 날아들었다.
[브류나크 창술]
[껍질 꿰뚫기]
비명을 지르는 웜의 커다란 입속으로 은현이 내던진 투창이 정확히 명중하면서 웜의 몸 내부를 관통하였고, 몸 안에 박혀있던 투창의 마력이 해방되면서 웜의 몸통이 풍선이 터지듯 부풀어 올랐다.
“아…!”
그 모습을 본 차한성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깨닫고 경악하고 있을 때, 투창을 던졌던 은현이 곧바로 세 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신의 무구]
[아이기스]
퍼어엉!
해방된 은현의 마력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풍선처럼 부풀어있던 웜의 몸통이 터져나갔고 매서운 공기의 파열음이 굴 내부를 가득 메웠다.
사방으로 튀는 괴물의 살점과 체액들이 그대로 네 사람을 덮쳤지만, 사전에 은현이 펼쳐둔 여신의 방패가 그들을 보호했다.
“저것들은 적이다. 주저하지 마.”
“…죄송합니다.”
“…네.”
차한성과 델리아는 짧은 리오드의 질책을 듣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하자.”
네 사람은 다시 내부를 탐색하며 이동했다.
위로 올라가 탐색 원정대와 합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개미굴 안에 있는 모든 괴물을 처리하는 것으로 목적을 수정한 네 사람은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매 3시간마다 약 5분씩, 휴식의 시간을 취하면서 반나절이 지나서 2개의 개미굴을 더 발견할 수 있었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괴물의 아기를 수태한 여성들을 모두 죽였다.
처음에는 강력하게 반대했던 델리아조차도, 이제는 세 사람의 행동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목숨을 끊어주는 것이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이라는 슬픈 사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계속 이동하여 세 번째 개미굴 안에서 괴물들을 정리하고 있었을 때, 은현이 이변을 감지했다.
빠른 속도로 정확히 이곳을 향해 접근해오는 무언가의 존재.
그것은 괴물이나 마수가 아니었다.
“…리오드!”
은현의 외침을 들은 리오드가 멈칫했고 주위를 둘러보기까지 걸린 시간이 1초.
그리고 은현 다음으로 뒤늦게 기척을 감지한 리오드가 델리아의 등 바로 뒤까지 접근한 무언가를 눈치채기까지 걸린 시간이 0.5초.
이후로 리오드는 망설임 없이 델리아를 향해 달렸다.
신체를 강화하고 리오드가 그녀에게 도달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0.5초.
리오드는 델리아의 등 뒤에서 그녀의 가슴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날카로운 무언가를 검으로 쳐냈다.
카아앙!
리오드는 자신이 쳐낸 날카로운 무언가가 허공으로 떠오르자 그제야 그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손톱?’
날카롭고 기다란 세 개의 무언가는 마치 짐승의 손톱을 연상시켰다.
이내 손톱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길었던 것이 줄어들어,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는 표현이 올바르다.
“하하, 역시 이곳까지 내려온 인간이라 그런가. 보통은 아닌 것 같군.”
이윽고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리오드의 예상대로 인간이 아니었다.
지면을 걷고 있는 것은 발굽이며, 털로 뒤덮여 있는 짐승의 다리를 똑 빼닮았다.
그러면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는 인간 남성의 나체.
리오드는 마지막으로 그것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제법 수려한 이목구비였지만, 두 눈은 인간의 눈과는 달리 안구 자체가 새까맣다.
그리고 머리 위에 달린 한 쌍의 물소 뿔.
리오드는 그것의 정체를 입에 담았다.
“…악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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