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633화 (616/730)

〈 633화 〉 633. 싱크홀(5)

* * *

“윽….”

몽롱한 의식이 각성하자, 델리아는 다리의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천천히 두 눈을 뜬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깜깜한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이다.

뒤늦게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응시했고 통증의 원인이 골절된 상태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골절된 다리 부분에는 검집을 부목 삼아 고정되어 있었다.

“누가…?”

지금까지 기절해 있었던 자신이 한 응급 처치가 아니다.

이내 델리아의 머릿속에 의문이 생겼다.

깜깜한 개미굴 안을 밝혀주는 불빛은 도대체 무엇인가.

“일어났나.”

그 의문을 해소할 틈도 없이,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읏!?”

무거운 중저음의 목소리에 흠칫한 델리아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야를 밝혀주는 횃불이 벽면에 고정되어 있고, 그 근처에 갑옷을 착용한 기사가 등을 기대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델리아는 그 기사의 얼굴을 알아보고 얼굴을 굳혔다.

“다, 단장님…?”

자신의 까마득히 위에 위치해 있는, 아르티아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

리오드였다.

화들짝 놀란 델리아가 조금씩 전후 사정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델리아는 작게 탄식했다.

천장이 무너지고, 지면이 갈라지는 개미굴의 붕괴 속에서 미처 후퇴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뛰어내린 리오드의 얼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리오드의 상태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더러워진 기사 갑옷은 언제나 고고했던 왕국 최강의 기사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심각한 외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델리아 자신 때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단장님! 저 때문에…!”

델리아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며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부주의하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리오드가 이런 고초를 겪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몰아넣었다.

“아니.”

리오드는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사죄를 받지 않았다.

“그냥 재난이었을 뿐이다. 어쩔 수 없었겠지.”

델리아는 이제 막 아르티아 기사단에 입단한 지 1년이 막 지난 여기사.

그 상황에서 아직 경험과 실력이 부족한 그녀에게 이 고립과 추락은 너무 버거운 재난이었다.

“잘잘못을 따진다면 이곳에 아직 경험이 부족한 너를 편성한 나와 카인의 잘못이겠지.”

탐색 원정대 병력을 편성할 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던전 공략에 대비하여 리오드는 정예만으로 병력을 편성하길 원했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입, 후임 기사들에게 무리한 희생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리오드의 생각에 비해 카인의 생각은 달랐다.

강요는 하지 않되, 그들에게 기회는 주어봐야 한다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아르티아의 기사단원들은 모두 리오드나 카인, 상위의 선임 기사들이 엄정한 심사를 통해서 입단을 허가한 정예의 전력들.

모두 제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는 실력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온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목숨을 건 실전 경험이었다.

리오드는 카인과 다른 선임 기사들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 결과 이번 탐색 공략 원정에 후임 기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렇기에 지금 리오드는 자신의 판단 미스를 순순히 인정했다.

“아, 아니에요!”

스스로를 자책하는 리오드의 말을 들은 델리아가 깜짝 놀라며 그의 의견을 부정했지만, 리오드는 그녀의 말을 계속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으면 움직이도록 하지.”

“네, 네…. 윽!”

휴식을 마치고 리오드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던 델리아는 오른쪽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작게 신음했다.

“도움이 필요한가?”

“아, 아니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깜짝 놀라며 리오드의 도움을 사양했다.

이 상황에서까지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전투라도 벌어진다면, 다리 한쪽이 불편한 자신은 전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리오드의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다행히도 통증은 참을 정도로 그렇게 심각한 수준까지는 아니다.

빨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상태가 악화가 될 터이지만, 응급 처치 덕분인지 지금 당장은 걸을 만했다.

“그런가.”

리오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개미굴 내부를 이동했다.

“다, 단장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문제없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그의 몰골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리오드는 태연히 평정을 유지했다.

“…….”

델리아는 무심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횃불을 비추어 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의 검은색 구멍 너머는 그 높이를 감히 가늠할 수가 없다.

저 높이보다 더한 높이에서 추락했을지도 모르는 자신이 한쪽 다리가 골절된 것만으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리오드의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도 리오드는 이렇다 할 외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

그것은 극한으로 단련된 육체를 우수한 마력량으로 강화하여 방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덕분.

굉장히 간단한 일이었지만, 아무나 할 수가 없는 경악스러운 일이다.

델리아는 선봉에서 리오드가 들고 있는 횃불의 빛을 의지하여 걸었다.

검집을 부목으로 고정하여 응급 처치를 하기는 했다지만, 골절상을 입은 오른쪽 다리가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욱신거렸다.

생각보다 상처의 악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리오드는 그녀의 걸음걸이에 맞추어 속도를 조절하면서 걸었다.

그런 배려에 고민하면서, 델리아는 결심을 굳힌 얼굴로 리오드를 불렀다.

“…단장님.”

“뭐지.”

“혹시 만약의 상황이 생기면…. 저를 두고 도망쳐 주세요.”

“…….”

각오를 다진 델리아의 말에 리오드의 발걸음이 뚝 멈춰 섰다.

델리아는 걸음걸이를 멈춘 리오드의 등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무리하게 데려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건…. 제 불찰이니까요.”

“그럴 수 없다.”

리오드는 등을 돌려 델리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의 눈빛은 매우 올곧았다.

“너 또한 내가 인정하고 입단을 허락한 나의 단원이다.”

그것은 그녀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에 대해 기사단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리오드는 부상자가 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단 한 명의 기사단원도 사망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신념과 이상은 굉장히 오만하고 무모했지만, 그것을 품은 것이 다름 아닌 리오드였기 때문에 그를 동경하는 기사들이 아르티아 기사단으로 모여든 것도 사실이다.

“움직여라.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해라.”

“…알겠습니다.”

델리아의 눈에서 한 번쯤 꺼져갔던 눈빛이 조금씩 힘을 되찾아 빛을 발했다.

이곳에서 살아나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설령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라도, 발버둥을 쳐보자는 결심은 오른쪽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아내고 걸음걸이를 옮기는 원동력이 된다.

이윽고 마침내 개미굴 내부를 활보하는 괴물들과 조우했다.

키애액!

날카로운 괴물의 비명과 함께 또다시 수십 마리의 인간 메뚜기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리오드와 델리아를 향해 날아들어 왔다.

리오드는 순식간에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칼날에 마력을 둘러 검기를 만들어 냈다.

서걱!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점프해오는 인간 메뚜기의 머리를 향해 매서운 검기로 무장된 칼날이 휘둘러졌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진해오는 인간 메뚜기를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검격은 날카로운 절삭력를 가지고 있었으며 평소와 달리 매우 고요했다.

‘…답답하군.’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마력을 이용하여 적을 분쇄하고 밀어버리는 것이 본래 리오드의 스타일.

하지만 이 개미굴 안에서는 리오드의 검술은 제약이 많았다.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광범위를 휩쓰는 리오드의 검격은 지반이 약한 개미굴을 다시 무너뜨릴 위험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날카롭고 매서운 검기로 상대를 양단하는 은현의 검술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본인의 스타일에 맞는 검술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 적합한 검술로 달려드는 괴물들을 압도했다.

정교한 움직임의 연속으로 수십 마리의 괴물들을 도륙하고도, 리오드는 숨 한 번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 경이로운 모습은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 그 자체.

한 손으로는 횃불을 들고 어두운 시야 속에서 불빛에 의지하여 다른 한 손으로 장검을 휘둘러 차근차근 인간 메뚜기들을 정리해나갔다.

하지만 막강한 힘을 가진 리오드라도 본인의 스타일이 아닌 급하게 흉내 낸 검술로 모든 인간 메뚜기들을 정리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인간 메뚜기 하나가 리오드를 지나쳐 델리아에게 달려들었다.

“큭!”

허공으로 날아오른 인간 메뚜기가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는 광경은 몹시 혐오스러워서 작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당황을 억지로 없애고 침착함을 되찾아 델리아는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크게 벌린 인간 메뚜기의 입안에 꽂아 넣었다.

키릭!

목 안쪽을 칼날로 관통당하여 고통에 비명을 내지르는 인간 메뚜기의 몸부림이 델리아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상태로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던 델리아의 신체가 결국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크…!”

자신의 몸을 깔고 죽어버린 인간 메뚜기 사체의 입안에서 검을 뽑아내고 사체를 치웠다.

황급히 몸을 일으켜 자세를 다시 잡으려 했지만, 두 번째 인간 메뚜기가 어느샌가 델리아의 머리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미처 검을 휘두를 여유도 없이, 델리아는 자신의 머리를 먹어치우기 위해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괴물의 머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두 눈과 코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입과 귀만이 존재하는 괴물의 머리는 몹시 기괴하고 혐오스럽다.

‘안…돼!’

이대로 있으면 처참하게 자신의 머리가 뜯어먹히면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델리아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성으로는 움직이라고 수십 번이고 외치고 있음에도,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만, 델리아의 머릿속 시간만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그녀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인가?’

델리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끝을 직감했다.

결국, 아무리 리오드가 전방에서 필사적으로 괴물들을 막아주었다고 하더라도, 미처 처리하지 못한 이 몇 마리조차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 자신의 한계.

부상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가 몹시 원망스러웠다.

“델리아!”

다급히 자신을 부르는 리오드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델리아는 코앞까지 다가와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괴물의 머리로부터 고개를 돌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그때.

[브류나크 창술]

[껍질 꿰뚫기]

콰직!

“…어?”

델리아는 돌풍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자신의 바로 위를 휩쓸고 지나간 소리와 존재를 느꼈다.

삶을 포기하여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자신을 먹어치우려는 인간 메뚜기의 몸을 사정없이 찢어발기고 날려버리는 감각은 삶을 포기하려 했던 델리아를 도리어 당황케 했다.

“방금 그건…. 창?”

뒤늦게 인간 메뚜기들을 모조리 처리한 리오드가 누군가의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옆을 지나치며 정확히 델리아를 먹어치우려는 인간 메뚜기의 몸체를 겨냥한 그 공격은 투창이었다.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개미굴 내부를 휩쓸고 지나간 곳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했다.

이내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들은 리오드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횃불을 가져다 대어 시야를 밝혔다.

“…너희였군.”

리오드는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은현과 차한성의 모습을 발견하고 작게 숨을 흘렸다.

자신을 보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리오드에게 은현이 핀잔을 주었다.

“도와주러 왔는데. 어째 표정이 안 좋아 보인다?”

“이런 곳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멍청이가 어디있나.”

그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은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이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도리어 은현을 어이가 없게 만들었다.

“너 임마. 지금 그거 너한테도 해당되는 말인 거 알고 있냐?”

곧바로 들어오는 은현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리오드는 코웃음을 치며 당당히 반론했다.

“나는 내 단원들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경우가 달라.”

“내로남불 개쩌네. 사위도 꼭 지 같은 놈을 골라 가지고.”

마지막에 중얼거린 은현의 말에 두 남자가 움찔 몸을 떨며 반응했다.

한명은 당연히 리오드였으며, 또 다른 한명은 이 이야기 속에서 ‘사위’에 해당할 터인 차한성이다.

“으, 은현님! 무슨 말씀을…!”

“…누가 사위라는 거지?”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세 남자를 바라보며, 델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한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었던 이 개미굴 속의 암울한 상황이 눈앞의 백발의 남자가 등장하면서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기사단을 지휘했던 기사단장의 모습이 아니라, 친구와 시답잖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리오드를 처음 보는 델리아에게는 몹시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