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632화 (615/730)

〈 632화 〉 632. 싱크홀(4)

* * *

“도, 도와주세요!”

갈라진 지면 사이로 낙하하던 도중, 은현은 위에서 들린 남성의 비명을 들었다.

다급히 도움을 요청하는 익숙한 목소리에 흘끗 고개를 돌려 위쪽을 응시하자, 은현의 시야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차한성이었다.

은현은 자신이 리오드를 따라 몸을 던진 것과 동시에, 차한성 또한 재빨리 자신의 뒤를 따라 몸을 던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그 이유다.

‘…이 사람이 왜?’

아래로 낙하하고 있는 와중인 차한성의 얼굴에는 여유가 없었다.

마치 안전장치를 하나도 착용하지 않고 번지 점프대 위에서 몸을 던진 것처럼 그는 잔뜩 동요하면서 은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따라온 건지….’

은현은 살짝 귀찮아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하는 차한성을 내다 버리지는 않았다.

인벤토리 안에 갖춰둔 로프를 소환하여 차한성을 향해 휘둘렀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로프의 끝에 달린 쇠구슬이 그대로 차한성의 팔에 휘감겨졌고, 그것을 눈치챈 차한성도 눈을 빛내며 로프의 끝자락을 움켜쥐면서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했다.

그렇게 차한성과 자신의 사이를 연결한 은현이 단검을 소환하여 벽면에 박아 넣고 팔에 힘을 실어 아래로 낙하하는 속도를 최소화시켰다.

마력으로 둘러싸인 칼날은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면을 쉽게 파고들었고 단단히 고정됐다.

이윽고 반대쪽 손으로 와이어가 휘감긴 차한성을 끌어당겼다.

“큭…!”

은현의 도움으로 추락은 면할 수 있었지만, 차한성은 아슬아슬하게 전신의 마력을 방출시켜 신체를 강화했고 벽면과 충돌하면서 생기는 데미지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암벽을 등반할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갈라진 벽면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은현은 하강 장비인 레펠을 벽면에 설치했다.

“천천히 하강합니다. 허리 부근에 로프를 두르고 단단히 고정하세요.”

“예!”

조금씩 안정을 되찾은 차한성이 은현의 지시에 따라 허리에 로프를 둘렀고 벽면의 미세한 틈 사이에 손과 발을 집어넣어 고정하면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자칫 잘못하여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곧바로 은현이 자세를 잡아 로프를 고정하는 것으로 차한성의 추락을 방지했다.

은현의 보조가 없었다면 차한성은 진즉에 끝이 보이지 않는 이 바닥으로 추락하여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새삼 자각한 차한성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아래로 천천히 하강했다.

이미 이 아래로 뛰어내릴 것을 결심하고 행동한 이상 후회하는 것은 늦었다.

약 20분을 넘게 암벽을 타고 내려가고 있음에도, 바닥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조금씩 몸이 적응하여 여유를 찾자마자, 차한성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리오드에 대한 안위였다.

“단장님은….”

이보다 더한 높이에서 떨어진 리오드와 후임 기사는 정말로 무사할 수 있을까.

“살아있을 겁니다.”

차한성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위에서 천천히 하강하고 있던 은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차한성을 격려하기 위한 배려가 깃들어 있지 않았다.

절대로 리오드가 이렇게 쉽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마치 차한성이 하고 있는 걱정이 전혀 쓸데없는 것이라는 양, 그가 가지고 있는 리오드에 대한 신뢰는 몹시 두텁다.

“리오드를 걱정하기 전에, 본인 걱정부터 하시죠. 일단 이곳을 내려가고 지면을 밟는 게 최우선입니다. 리오드와 그 후임 기사분을 찾는 건 그 이후에요.”

은현의 말은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정론이었다.

현재 차한성 또한 자칫 잘못하여 발을 헛디디기만 해도 바로 골로 가버릴지도 모르는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는 상황.

그런 지금 도대체 누가 누구를 걱정한다는 말인가.

“…알겠습니다.”

차한성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 암벽을 내려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것을 끝으로, 은현과 차한성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약 2시간 동안 암벽을 타고 내려가자 마침내 두 사람은 지면을 밟을 수 있었다.

“후우….”

드디어 지면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차한성이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계속해서 긴장하여 몸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던 탓인지, 몸의 피로는 착용하고 있는 갑옷마저도 무겁게 느껴질 정도다.

제대로 된 수색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차한성은 극심한 정신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드시죠.”

숨을 몰아쉬며 텁텁한 지하의 공기를 억지로 들이켜고 있었던 차한성에게 은현이 생수가 들어있는 병을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차한성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두 손으로 은현이 건넨 생수통을 받아들였다.

마개를 열고 곧바로 내용물을 목구멍 안으로 들이켜던 차, 차한성이 멈칫하며 놀란 반응을 보였다.

“이, 이건…?”

평범한 생수가 아니었다.

맛이나 시원한 것을 떠나서, 피로로 찌들어있던 머릿속이 맑아지고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며 컨디션을 회복시킨다.

차한성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은현을 바라보자, 은현은 곧바로 그의 의문을 해소시켜주었다.

“기력을 회복시키는 약초와 엘레노아의 신성력이 깃들어 있는 생수입니다. 몸과 마력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도움이 된다기보다….”

도움이 되는 수준을 넘어서 간단히 상회하는 회복력에 차한성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시중에 판매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매길 수 있을 만한 효능.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넸다는 사실이 몹시 충격적이었다.

“이런 비싼 걸….”

“파는 거 아닙니다.”

“예?”

“무슨 일이 생기면 저보고 쓰라고 엘레노아가 개인적으로 신성력을 부여해준 거죠.”

“…….”

차한성은 더더욱 할 말이 없어져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것을 자신이 마셔도 괜찮았던 걸까, 심히 고민이 되었다.

차라리 피곤한 상태로 수색을 하는 것이 마음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차한성의 마음은 복잡했다.

지금이라도 뱉어내어 이 생수통을 가득 채울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지만, 자신이 인간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걸 신전의 허락도 없이 판매했다가는 에레니아 신성국에서 제재가 들어올 겁니다.”

차기 성녀 후보인 엘레노아가 신성력을 사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챙겼다는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차한성은 은현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반드시 비밀로 하겠습니다.”

가슴을 옥죄이는 깊은 미안함도 잠시, 망설이고 있던 차한성은 남아있던 생수도 모조리 입안으로 털어 넣으면서 몸과 마력을 회복했다.

“왜 따라오셨습니까?”

차한성이 다시 몸을 일으키자 은현이 그제야 자신을 따라온 이유를 물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차한성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차한성은 리오드에게서 직접 검술을 배우면서 제법 강자의 축에 속하고는 있었지만, 레펠로 하강을 하면서 은현에게 도움만을 받고 지면에 도착한 그는 은현에게 민폐만 되었을 뿐 그닥 도움은 되지 못했다.

은현의 입장에서 차한성의 행동은 너무도 무모했고 어리석었다.

그것을 자각하고는 있는지 차한성도 면목이 없다는 듯 민망한 얼굴로 은현의 질문에 답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단장님이 델리아를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뛰어내린 걸 보자마자, 저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델리아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리오드가 구하려 했던 후임 기사의 이름인 듯했다.

리오드의 명령은 후퇴였다.

하지만 차한성은 그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

리오드와 델리아가 추락하는 것을 보고,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머릿속에 최악의 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는…. 에이라 선배가 우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슬픔에 잠긴 에이라의 얼굴이.

차한성은 에이라의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후퇴하라는 리오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고민할 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

은현은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차한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인간. 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말을 하는 거야?’

생각해보니 차한성이라는 이 남자는 다른 평행 세계에서는 ‘주인공’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남자.

그렇기 때문인지 이상한 보정 효과가 들어간 기분이었다.

리오드와 에이라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생각지 않고 움직였다는 사실은 꽤 기특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은현은 그 어리석음을 거침없이 지적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 무모했습니다. 제가 없었으면 차한성님은 이렇게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거야 은현님이 뛰어내린 것을 보고 저도 망설이지 않고 뛴 거죠.”

“…뭐요?”

“일단 뛴다면, 은현님이 어떻게 해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당당하게 자신에게 전력으로 의지하겠다는 의사를 들은 은현이 도리어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까 전에 했던 말과는 다르게 굉장히 한심한 태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고 도리어 당당했다.

“제 뭘 믿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단장님께서 믿고 의지하시는 분이 은현님이시지 않습니까.”

엘프의 숲 인근에서 리오드에게 검술을 배우면서, 차한성은 함께 행동하는 리오드와 은현의 관계를 눈여겨봤다.

자신이 보아왔던 리오드의 모습은 왕국에서 가장 강하고 고고한 아르티아 기사단장이었다.

가족인 테레지아나 에이라, 엘리온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제외하고, 리오드는 그 누구에게도 사적인 관계 형성을 하지 않았다.

그런 리오드가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신뢰와 유대를 형성하여 마음을 허락했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은현이다.

이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서 리오드와 대등한 친구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는 은현이 유일했다.

한때 같은 동료였으며 함께 활동했던 일리아나나, 아니에스, 제라드와도 비슷하지만 리오드와 은현은 유독 특별하다.

차한성이 리오드를 자신의 목표로 삼고 있듯, 리오드 또한 은현을 자신의 목표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잡기 위해 지금도 검을 놓지 않고 정진하고 있었다.

차한성은 그런 리오드와 은현의 관계를 알아보았다.

“저는 은현님을 믿는 게 아니라, 은현님을 믿는 단장님의 판단을 믿고 행동한 겁니다.”

은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저한테 의지만 하고 제대로 된 계획은 없다는 것으로 들립니다만.”

“하하. 팩트로 맞으니까 이거 좀…. 아니. 많이 민망하네요.”

가차 없는 은현의 지적에 차한성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강하면서는 한심한 모습을 보여드렸지만, 저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단장님을 구하러 가시는데, 꼭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수 있어요. 그러니….”

차한성은 쓴웃음을 지었던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저를 데려 가주셨으면 합니다.”

정중한 그의 부탁에 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 많이 닮았다 싶었는데….’

계획이나 이성보다 먼저 본능과 몸으로 움직이는 이 막무가내식의 행동.

과거에 자신이 함께했던 젊었을 적의 리오드를 쏙 빼닮았다.

‘어떻게 된 게 사위도 꼭 지 같은 인간이 찾아왔어.’

그래서 꼭 에이라 때문만이 아니라, 리오드가 유독 차한성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이유는 젊었을 적 철없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흔하디흔한 동족 혐오 같은 것.

“…배려하지는 않을 겁니다. 잘 따라오세요.”

“감사합니다!”

은현은 차한성과 함께 리오드와 델리아라는 후임 기사의 수색을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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