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3화 〉 623. 악의 잠식(2)
* * *
싸늘해진 마리우스의 말을 들은 국왕이 움찔 몸을 떨었다.
에레니아 신성국의 벤터 주교.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짚이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 놈이 어떻게 그 이름을…?”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뭔 짓거리지?”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아리아 왕녀의 머리채를 붙잡아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꺄악!?”
거칠게 바닥으로 머리를 처박히는 아리아를 보고 국왕이 몸을 떨었다.
“아리아!”
하지만 그의 전신에는 이미 수십 개의 칼날이 박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
“크윽…!”
바닥에 부딪힌 머리를 거칠게 짓밟으며 있을 수 있는 최대한의 굴욕을 선사하면서, 마리우스가 재차 물었다.
“다시 한번 묻는다. 네스를 어떻게 했지?”
“…….”
국왕은 이빨을 질끈 깨물며 마리우스를 노려보았다.
눈앞에서 딸이 치욕을 겪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증오심이 깊은 시선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국왕의 입가에서 한줄기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분노로 치를 떨고 있는 그가 이빨을 꽉 깨물며 전신을 떨고 있었다.
뼈와 살점을 가르는 칼날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다.
그 고통을 뒤덮을 정도로 깊은 증오가 마리우스를 향했다.
“으윽….”
마리우스가 다리에 힘을 실어 바닥에 고개가 쳐박힌 아리아 왕녀의 목을 조르자 그녀가 신음을 내뱉었다.
빨리 대답하라는 마리우스의 간접적인 행동에 국왕은 이를 갈면서 답했다.
“…네놈이 말하는…네스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국왕은 머릿속으로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마리우스가 입에 담은 벤터 주교는 국왕과도 관계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중 하나와 연결점이 존재했다.
현 국왕인 그에게는 총 세 명의 자식들이 존재했으며, 조만간 왕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던 첫째 왕세자나, 막내였던 왕녀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진짜 문제는 둘째 왕자였다.
그는 왕위계승권은 없었지만, 왕자라는 신분과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망나니 중의 망나니였다.
그런 둘째 왕자가 먼 거리에 위치한 에레니아 신성국에 위치한 벤터 주교와 어울려 다니면서 악랄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왕국의 주요 인사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에레니아 신성국 사이의 관계는 양호한 편이 좋으며, 잘못해서 그 관계가 틀어졌다간 베스타 여신을 모시는 신실한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으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이득이었다.
나라를 위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왕가와 고위 귀족들은 둘째 왕자의 악행을 모른 체했다.
어느 날 둘째 왕자가 국왕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사실을 고해왔다.
에레니아 신성국의 콜로라스에서 자신의 뒤를 봐주었던 벤터 주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시작으로 그와 함께했었던 악행들을 모조리 고백했다.
신전의 지원금을 빼돌리면서 사적인 이익을 챙겨 나눠 먹었다거나, 여성들을 불러 문란한 관계를 맺었다거나, 저급하고 사소한 악행들 전부를.
둘째 왕자의 망나니짓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던 국왕은 노발대발하며 그를 혼냈고,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벤터 주교의 사망 사실을 조사했다.
사건의 내용은 끔찍했다.
벤터 주교만이 아니라, 콜로라스라는 도시 전체가 갑작스러운 언데드의 습격을 받아 괴멸되었다는 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언데드라는 종족에 대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신성의 나라가 언데드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더더욱 충격적이다.
이 정보를 접한 왕국은 곧바로 에레니아 신성국 측에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리 중심부에 있는 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변방에 있는 도시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리 쉽게 언데드에 의해 도시가 괴멸될 수 있었는가.
콜로라스 도시는 에레니아 신성국의 외곽에 있는 변방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신성국의 중심임 중앙 수도로 향하는 외국인들의 방문도 적지 않다.
상인들이나, 외국 귀족들의 숫자도 적은 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에레니아 신성국의 해명이 꼭 필요했으나, 신성국 측은 그 원인에 대해서 계속 파악 중이나 제대로 밝혀낸 사실이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뿐이었다.
국왕은 벤터 주교의 사망이 아니라 도시 하나 전체가 괴멸된 이 사건에서 왕국의 둘째 왕자가 도대체 어떤 위험을 느낀 것인지 연관성을 알 수 없었다.
일단 국왕은 둘째 왕자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에레니아 신성국 측도 콜로라스의 괴멸 사건에 대해서 조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먼저 주목할 부분은 아마도 그 도시의 관리자였던 벤터 주교의 행적을 파헤치는 것일 터.
그 행적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자신의 왕국과 둘째 왕자의 존재가 거론된다면 이 나라의 권위는 실추되고 주위에서 많은 비웃음을 사게 되는 것은 불 보듯 하다.
국왕은 적지 않은 비리와 악행들로 얽혀 있는 벤터 주교와 둘째 왕자의 관계성을 모조리 지워내는 것에 급급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쌓이고 쌓인 업보가 되돌아오는 것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국왕으로부터 근신의 명령을 받고 있었던 둘째 왕자의 목이 왕궁의 앞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 재앙은 일어났다.
“아무리 물어도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혹시라도 당신은 알까 싶었지.”
죽여버린 둘째 왕자의 목을 잘라버리고 왕궁의 입구를 경비하고 있는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던져버린 것은 다름 아닌 마리우스였다.
근신 처분을 받은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국왕의 명령을 거스르고 밖으로 몰래 나왔으며, 그 결과 이 나라에 잠입한 마리우스와 맞닥뜨렸다.
당연히 둘째 왕자는 자신이 농락하며 하룻밤을 지냈던 여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일은 그에게는 너무나도 자주 있는 일이었고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모른다면 됐어.”
마리우스는 사납게 분노의 감정을 표출했던 눈빛을 거둬들였다.
당장이라도 전신에 칼날이 박혀 구속된 국왕의 머리를 잘라버릴 것만 같았던 살벌한 증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스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지만, 마리우스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이미 예상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망가져 버린 탓일까.
알 수 없었다.
어느새 마리우스의 두 눈은 다시 실실 웃고 있는 광기가 가득 차 있었다.
아리아 왕녀의 목을 거칠게 짓밟았던 발을 치우고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아 다시 질질 끌었다.
“아, 아악!”
아리아 왕녀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마리우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돌려 알현실을 나가려 했다.
“기, 기다려라! 크윽!?”
자신의 딸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가려는 마리우스를 본 국왕이 그를 불렀다.
다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전신을 관통한 수십 개의 칼날은 점점 더 국왕의 몸통을 휘저었다.
“아리아는…. 내 딸만큼은 제발…!”
“큭큭.”
하지만 마리우스는 낄낄거릴 뿐 왕녀를 질질 끌고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국왕은 과다 출혈로 곧 죽는다.
주요 장기들은 모두 건재했지만, 양쪽 팔다리 곳곳에서 흐르고 있는 피의 양은 절대로 적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리아 왕녀를 구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지고 흐르는 피의 양은 커진다.
국왕의 다급한 언성은 더욱 그를 기쁘게 할 뿐이었다.
“아, 아바마마! 도와주세요!”
머리채를 붙잡혀 바닥을 질질 끌려가는 아리아 왕녀가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전신에 수십 개의 칼날이 박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아리아아!”
절망으로 가득 찬 국왕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마리우스는 다시 왕궁을 나왔다.
“아….”
그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바닥을 질질 끌려왔던 아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왕궁의 바깥을 응시했다.
20살이 된 그녀는 왕궁 안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며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던 왕궁의 밖은 참혹했다.
부서져 내린 건물들과 그 위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연기들.
공기를 텁텁하게 만드는 자욱한 먼지.
바닥에 널브러진 끔찍한 몰골의 시체들과 피 냄새의 역함이 아리아의 비위를 자극했다.
“우읍!”
결국 바닥에 위액을 쏟아낸 아리아는 이 재앙을 만들어낸 원흉을 노려보았다.
“어떻게…이런 짓을…!”
마리우스는 눈물이 고여 있으면서,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아리아의 시선을 받고 피식 웃어 보였다.
“왜 그러지?”
“같은 사람이면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가 있는 건가요!”
“끔찍하다? 아, 그런가 끔찍하군.”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한 표정을 짓는 마리우스를 보고, 아리아는 더더욱 그를 경멸했다.
이해할 수가 없다.
어딘가 뒤틀려 있다.
저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게 맞을까.
아리아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무차별적인 학살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당신은…괴물입니다.”
“큭큭.”
하지만 그런 경멸과 혐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마리우스는 낄낄거리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 과정은, 이 대륙 전체를 죽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자신이 모시는 여신인 망자의 여왕이라는 메디아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의식이기도 했지만, 세상의 정화와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죽을수록, 그들이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고통을 표현하는 절망스러운 비명이, 역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참혹한 몰골의 시체가, 그것들이 풍기는 냄새가 마리우스에게 있어서는 정화의 과정과도 같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증오와 경멸, 혐오의 감정을 내비치는 아리아의 시선을 받을수록 그것을 더욱 즐겼다.
“신께서…. 당신을 꼭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뭐?”
실실거리던 마리우스가 자신을 올려다가 노려보고 있는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어떤 말을 퍼부어도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고 즐기기만 했던 마리우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싸늘하게 굳자, 아리아는 그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아무런 무력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신께서 당신에게 반드시 벌을 내릴 겁니다! 당신이 지은 업보들은 모두 당신에게 되돌아가…꺄악!”
마리우스의 곁에 있던 데스나이트가 아리아의 멱살을 붙잡아 그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커…흑!”
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고, 조여진 멱살이 기도를 틀어막아 아리아의 숨통을 점점 조였다.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려는 그녀의 가녀린 다리가 굉장히 애처롭다.
“제발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네.”
이내 마리우스와 아리아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리우스의 표정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웃고 있었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재앙에 만족하며 실실거리고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의 웃음에 담겨 있는 감정은 누군가에 대한 격정적인 분노와 원망이었다.
힘은 물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아리아는 마리우스를 성공적으로 자극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앞에서 ‘신’이라는 존재를 들먹인 것은 그녀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됐던 큰 실수였다.
“너희는 항상 무슨 일이 생기면 신이라는 존재부터 찾기 마련이지.”
자신이 대처할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모두 신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찾으며 자신을 구원해주길 기도한다.
예전의 마리우스 또한 그랬었기 때문에, 그 간절함이 얼마나 커다란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마리우스는 그 간절함이 얼마나 덧없어 쓰레기 같은 것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신이라는 것은 정말로 너희들을 구원해주던가?”
“크…윽….”
아리아는 데스나이트의 우악스러운 손에 숨통이 조여져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믿고 있다면 당장 기도를 바쳐. 그리고 신을 불러! 나를! 만, 십 만의 인간들을 학살한 나를 벌해달라고! 그렇게 염원해!”
마리우스 또한 신의 존재가 이곳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그 이유는 반드시 묻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나.
어째서 나의 가족들을 구해주지 않았나.
어째서 나를 구원하지 않았나.
그토록 간절했으며, 기도했건만 하늘은, 자신이 기도를 올렸던 신은 자신의 염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신들이 하계에 간섭할 수 없다는 제약 따위, 신계와 하계에 엮인 복잡한 사정 따위를 알 리가 없는 마리우스는 신성력이라는 기적의 힘을 제공하는 신의 존재를 증오했다.
아니, 실제로 자신이 모르는 사정 같은 게 있었더라도, 마리우스는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 과정에서 어째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마을 사람들이 불합리하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하고 불합리하다.
그러니까 마리우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이상과 가치관으로 이 세상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서 정화라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마을 사람들이 당했던 일들이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공평하고 합리적이었던 일이 될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재앙을 선사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상과 가치관을 현실로 실현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해준 메디아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여신’ 그 자체였다.
마리우스의 여신인 메디아의 염원은 단 하나.
어서, 현이를 보고 싶어.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를 직접 만지며 느끼고 싶어 한다.
이윽고 데스나이트가 아리아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커흑! 콜록! 콜록!”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기침을 토해내는 아리아를 뒤로하고, 마리우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머지않았습니다. 여신이시어.”
그렇게 재앙은 차근차근 주위를 집어삼키며, 마리우스의 이상은 대륙을 잠식해나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