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1화 〉 621. 올리비온의 막내딸
* * *
“필요한 건 다 챙겼니?”
“네. 모두 챙겼어요.”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새벽.
햇빛이 들지 않는 던전 안의 주택에서 은현과 아내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이유는 느닷없이 새벽에 걸려온 리오드의 통신 때문이었다.
테레지아가 산통을 겪기 시작했다.
긴급으로 전달해온 리오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은현 일행은 바쁘게 움직였다.
“잘 갔다 와.”
“네.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
이제 막 잠에서 깬 탓인지 엘레노아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어 보였다.
“푹 자고 있어. 상태가 호전되면 바로 돌아올게.”
이어서 은현이 릴리에게 부축을 받아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일리아나를 꼭 껴안았다.
애정을 담아 입술을 맞춰오는 남편의 행동에 호응하며, 일리아나는 웃었다.
“천천히 와도 돼. 나는 갈 수 없으니까 아쉬워.”
잔뜩 부풀어 오른 복부는 이미 일리아나도 만삭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른 임산부들에 비해서 배 속의 태아가 성장이 빠른 것은 일리아나가 가진 마녀의 특성 때문일까, 아니면 은현이 가진 신력이 어떠한 영향을 끼친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상 곁에서 부축해주는 릴리가 없으면 혼자서 거동하는 것도 몹시 어려운 일리아나는 리오드와 테레지아가 있는 올리비온 공작 저택으로 향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남편과 다른 아내들이 리오드의 저택으로 갈 수 있도록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해주는 것뿐이었다.
“좋은 소식 기다릴게.”
“응.”
은현은 자신을 배웅해주는 일리아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출산을 앞둔 일리아나를 두고 또 집을 나오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산통을 시작하여 곧 막내가 태어난다는 친구의 소식은 그만큼 기쁘면서도 급작스러웠다.
이윽고 릴리를 바라보며 재차 당부했다.
“릴리. 일리아나를 부탁할게.”
“네. 마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에밀리아를 시켜도 되니까요.”
정말 다행인 것은 이 주택 안에는 은현과 아내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호출하면 언제든 달려와 주어 명령을 수행해주는 인형들이 존재했다.
“걱정도 팔자야. 빨리 리오드한테 갔다 오기나 해.”
“…알았어.”
재차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은현에게 핀잔을 늘어놓고, 일리아나가 텔레포트 마법을 발동시켰다.
“다녀오겠습니다. 일리아나님!”
“그래. 아가. 잘 갔다 오렴.”
[여덟 자릿수 고위 마법]
[텔레포트]
은현과 엘레노아, 에린이 일리아나의 텔레포트를 통해서 순식간에 리오드의 저택으로 전이했다.
마법진으로 불빛이 환해지면서 세 사람의 주위를 뒤덮었다.
뒤덮은 빛이 사라졌을 때, 이미 주위의 배경은 일변해 있었다.
전이된 곳은 올리비온 공작 저택의 중앙홀이었다.
“왔군.”
급하게 소식을 전달하고 은현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리오드가 곧바로 반응했다.
은현은 곧바로 상황을 물었다.
“어떻게 됐어?”
“시종이 급하게 산파를 데려와서 지금 시작되었다.”
리오드는 곧바로 저택 내부에 급하게 준비한 분만실로 은현과 두 아내를 데려가면서 상황을 간략하게 전달했다.
“이런 차림으로 방문하게 돼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엘레노아와 에린이 본의 아니게 잠옷 차림으로, 이 늦은 새벽 시간에 공작 저택을 방문한 것을 정중하게 사과했다.
“아니. 시간도 시간이고 상황이 이런 만큼 어쩔 수 없겠지.”
정작 은현과 두 아내를 기다리고 있던 리오드도 잠옷 차림으로 남 말할 처지가 아니다.
마침내 분만실의 방앞에 도착하자 방문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에이라와 비몽사몽 한 상태의 엘리온을 발견했다.
“에이라 언니!”
“아, 에린. 그리고 두 분도 오셨군요.”
“안녕하세요….”
두 남매가 곧장 은현과 엘레노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전했다.
에이라와 엘리온도 잠에서 깨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잠옷 차림으로, 엘리온은 아직도 잠이 덜 깬 탓인지 하품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막 15살이 되는 엘리온은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자신이 어렸을 적, 엘리온을 낳았을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에이라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니. 괜찮아요?”
“괜찮지. 하지만 나보다는 어머니가….”
에이라는 흘끗 문안을 응시했다.
분만실 안에서 힘겹게 자연분만을 하는 테레지아의 상태가 걱정되었다.
“아이를 낳는 게 그렇게 힘든 거야?”
반면 출산에 대해 잘 모르는 엘리온의 경우에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적 엘리온을 낳았을 당시를 잘 기억하고 있는 에이라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주 힘든 거야. 특히나 지금 어머니는 연세도 있으시니까….”
엘리온을 낳았던 15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걸 위해서 우리가 온 거지만.”
정확히는 엘레노아를 데려온 것이 그 이유다.
은현은 리오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허락을 구했다.
“음.”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오드의 허가를 받자 엘레노아가 곧장 분만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기 성녀이자 사제로서 엘레노아가 사용할 수 있는 최상위의 축복은 분만에 오랜 시간 동안 힘을 쏟아부어야 하는 테레지아에게 큰 도움이 될 터다.
“언니. 저희는 방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요.”
“…응.”
에린은 곧바로 테레지아를 걱정하고 있는 에이라를 다독이며 방으로 이끌었다.
그러면서 웃으며 남동생인 엘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온도 갈래?”
“…갈래.”
엘리온은 살짝 시선을 피하며 에린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에린을 보자마자 잠이 확 달아나 볼에 홍조를 띄운 어린 소년의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오는 신수의 마력은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페로몬과도 같아 엘리온의 마음을 간질였다.
에린은 엘리온에게 있어 가장 나이가 근접한 여성이었으며, 성숙한 여성으로 첫사랑과도 같았다.
이미 그녀가 결혼하여 임자가 있는 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엘리온이 아직 나이가 어린 미성숙한 소년이기 때문이었다.
“히히. 가서 누나랑 놀자!”
그렇게 두 남매를 데리고 방으로 가는 에린의 뒷모습을 은현과 리오드가 조용히 지켜봤다.
세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아직 동이 트지 않는 새벽의 어두운 복도에는 은현과 리오드만이 남았다.
“…괜찮은 건가?”
“뭐가?”
“…아니다.”
리오드가 하는 말의 의미는 은현도 알고 있었다.
엘리온은 공작 저택 안에서도 다른 시종들이 인정할 정도로 매우 활발한 성격이다.
이외에도 다른 귀족의 자제들과도 자주 교류를 가지고 함께 검술의 수행을 하거나 교양을 배우는 등 사교성도 매우 좋다.
그중에는 이성 친구도 있을 진데, 그런 아들이 유독 에린의 앞에서는 숙맥처럼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간단히 추측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 어떻게 모르겠어.”
은현은 피식 웃으며 리오드의 말에 대꾸했다.
아무리 은현이라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냥 애잖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어쩌자고.”
딱히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린 소년의 순수한 감정은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원래 다 저러면서 크는 거 아니겠냐.”
“…흠. 네가 상관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냥 두겠다.”
어차피 에린은 은현과 결혼한 여자다.
엘리온도 시간이 지나면서 청년이 되고 성숙해진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을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다.
“에린한테는 말하지 마. 우리 애는 조금 눈치가 없어서.”
“그건 널 똑 닮았군.”
“…….”
은현은 비난의 화살이 느닷없이 자신에게 향해오자 두 눈을 치켜뜨며 리오드를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 자식이 갑자기 공격을?’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두 눈에 훤했다.
“…마침 둘만 있게 되었으니 잘 됐군.”
“음?”
은현은 갑작스레 이야기를 전환하는 리오드를 바라보았다.
“잠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흠. 그래.”
곧바로 집무실로 향한 리오드는 테레지아의 산통으로 인해 깨어 있던 시종 중 한 명에게 와인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마실 건가?”
“나야 상관없는데. 넌 괜찮겠어? 테레지아가 오는데.”
“엘레노아가 왔는데, 잘 해낼 수 있겠지. 테레지아라면 잘 낳아줄 거야.”
역시 아내의 출산이 세 번째라 그런가, 아무리 엘레노아의 축복이 기력이 쇠한 테레지아를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멘탈을 잡는 리오드의 내공이 돋보였다.
집무실로 시종이 와인과 두 잔을 가져와 간단한 과일 안주와 함께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은현은 리오드가 따라준 와인 잔을 받아들고 본격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최근 티르니스령의 북쪽 부근에 새로운 던전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알고 있겠지?”
“…알고있지.”
은현은 리오드가 입에 담은 화제를 듣자마자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랑단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대해 대비하고 있는 은현이 그 소식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티르니스 던전이라고 이름을 명명했다고 했었지. 아마.”
“맞다.”
이유는 단순하다.
티르니스령의 인근에서 출몰한 던전이었기 때문이다.
은현이 흑랑단을 통해서 이 던전을 자세히 조사하게 시켰던 이유는 티르니스령의 모험가 길드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이었다.
그 던전의 출몰이 보고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모험가들이 길드의 의뢰를 통해서 던전의 탐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총 네 차례의 던전 탐사가 진행되었음에도, 그 탐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던전 탐사를 진행했던 네 파티의 모험가들이 모두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던전으로 향하기 전, 모험가 길드에서 의뢰를 수주받고 출발하였던 것들이 가장 마지막 소식들.
하지만 그 이후로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탐사가 진행되던 던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후 모험가 길드는 다른 모험가들에게 의뢰를 넣어 티르니스령과 던전 주변에 혹시라도 있을 생존자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그 시도조차도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하고 헛수고로 끝났다.
“동위계 둘, 은위계 하나, 그리고 금위계 하나. 실종된 모험가 파티의 등급이지.”
처음과 두 번째는 간단한 던전의 탐사 임무로 배정하여 막 신참의 티를 벗어 던진 동위계 모험가들로 구성된 모험가 파티를 보냈으나 모두 소식이 끊기면서, 티르니스령의 모험가 길드는 사태의 심각성을 직시했다.
그리하여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베테랑의 축에 속하는 은위계의 모험가들을 보냈지만 역시나 소식이 끊겼고, 최후의 보루로 거금을 들여 비싼 금위계의 모험가 파티를 보냈던 시도 역시도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다.
결국에는 그 던전은 별도의 조치가 있을 때까지 출입을 금지한 것이 모험가 길드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
은현은 리오드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짐작했다.
그 소식이 페르니아스 왕국의 궁정 회의에까지 흘러 들어간 것이다.
“설마…. 이 던전 탐사 너희 기사단이 맡게 되는 거냐?”
“…그렇다.”
티르니스 던전은 모험가들 사이에서 최고위 전력으로 취급받는 금위계 모험가 파티가 소식이 끊겼을 정도로 한치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던전이다.
왕국의 영토 안에 출몰한 이 던전은 티르니스령이나 인근의 영지, 페르니아스 왕국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중요한 안건이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얼마나 위험한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가 없다.
그 측정할 수 없는 위험이라는 것은 당연히 공포와 두려움을 낳으며 점점 더 주위를 잠식해나갈 것이 틀림이 없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성가신 얘기네. 알았어.”
은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이 던전의 존재는 영 껄끄러운 것이었기에 이것은 좋은 기회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또 일리아나를 두고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점이다.
일리아나라면 너그러이 웃으며 자신을 보내줄 터이지만, 그럴수록 은현의 마음속에는 무거운 짐이 쌓여만 갔다.
“후우, 어째 집에 조용히 있을 날이 없냐.”
“…미안하군.”
“아니. 이건 탓하는 게 아니야. 그냥 상황이 계속 꼬인다 싶을 뿐이지.”
그렇게 자신의 팔자에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바깥에서 방문을 노크하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마님께서 출산을 마치셨습니다.”
시종은 애써 평정을 가장하려 했지만, 얼마나 빠르게 뛰어왔는지 목소리는 흥분과 거친 숨소리로 흐트러졌다.
무거운 분위기가 가득했던 집무실 안을 밝히는 희소식에 리오드가 와인 잔을 내려놓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따라 은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리오드의 뒤를 따랐다.
“테레지아는?”
“괜찮으십니다. 기력이 많이 쇠하셨지만, 엘레노아님의 축복 덕분에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계십니다.”
출산을 마친 테레지아의 상태가 양호하다는 소식을 듣고 리오드는 안도한 듯 가슴을 살짝 쓸어내렸다.
이미 세 번째 출산이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마흔이 넘은 이후로 하게 된 출산을 버텨낼 만한 체력이 있었을지,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리오드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물었다.
“…아들인가. 딸인가.”
“딸입니다. 공작님. 축하드립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