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0화 〉 620. 대관식(2)
* * *
궁정의 내부는 곧 시작할 행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날은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권이 교체되는 대관식의 날.
즉, 유리아 페르니아스가 공식적으로 왕위를 물려받는 날과 자리이다.
이 나라의 주인임을 뜻하는 왕좌는 현 국왕이었던 안드레아 페르니아스가 사망하면서 현재 공석의 상태.
그 공석의 옆에는 왕비인 디아네 페르니아스가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것은 디아네 왕비가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자세한 사정을 잘 모르는 귀족들에게는 왕위를 이어받게 만들려 했던 아들을 잃었음에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냉혈한 같은 여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대 국왕을 비롯하여 역대 왕들이 묻혀있던 섬, 오르비스에서 있었던 사건들과 당시 디아네 왕비의 모습을 본 이들에게는 그녀의 내면에 있는 공허함을 읽어 냈다.
디아네 왕비에게는 이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헬레나 후비가 가진 자식과의 왕위계승권 싸움에서도 완벽히 졌고, 자신을 지지했던 귀족 세력들은 하나같이 비리와 악행들이 적발되어 잘려나갔다.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아들, 데미안마저도 초대 국왕 오르타스에게 육체를 잠식당하여 진즉에 사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디아네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저 ‘왕비’라는 껍데기만 남은 지위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지위마저도 포기할 수 있게 된 디아네 왕비의 속마음은 굉장히 공허했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조화로 만들어진 웅장하고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관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자, 많은 대화로 북적였던 궁정의 내부는 순식간에 엄숙함이 자리 잡았다.
마침내 이 행사의 주인공이나 다름이 없는 유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주인에 걸맞도록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드레스를 착용한 채로, 많은 행렬을 이끌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레드 카펫을 밟으며 왕좌를 향해 걸어갈 때마다 궁정 안을 가득 채우는 악기 소리는 더욱 웅장해져 갔다.
마침내 계단을 밟고 올라가 디아네 왕비가 앉아 있는 왕좌의 앞에 도착했다.
“…….”
유리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디아네 왕비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미리 정해져 있었던 행사의 순서처럼, 디아네 왕비가 유리아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다.
사망한 국왕을 대신하여 왕위를 물려주는 자도, 물려받는 자도,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으며 조용히 웅장한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내 연주가 거의 끝나갈 즈음, 디아네가 작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이날이 왔군요.”
“…….”
유리아는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있는 디아네의 중얼거림을 확실하게 들었다.
악기의 연주에 묻힐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감정의 무게가 절실히 느껴진다.
하지만 유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두 눈을 감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방해되는 것들은 모조리 치워버리고 경쟁 상대였던 자신의 남동생을 견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써왔던 그녀를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동정을 하기는 했다.
평생을 아들이 왕이 되는 순간만을 보고 살아왔건만, 실상은 자신의 머나먼 선조가 아들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디아네 왕비는 유리아에게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더라도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밟으려 했던 상대에게 왕위를 직접 물려줘야 하는 그녀의 결말은 너무도 비참하다.
이윽고 왕비의 자리에서 일어난 디아네 왕비는 시종의 부축을 받아 아래로 내려왔고 아무런 말도 없이 쓸쓸하게 퇴장했다.
혼자가 된 유리아가 꿇고 있던 한쪽 무릎을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순간 휘청일 뻔하여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아 씨…. 이거 생각보다 무겁네.’
머리 위에 씌워진 왕관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던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순금으로 제작된 왕관이니 당연하겠지만, 설마 자신이 이것을 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그녀도 예상치 못하였으리라.
‘‘왕관의 무게를 버텨라.’ 이딴 소리가 전혀 근거도 없이 나온 소리는 아닌가 보네. 아차.’
실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궁정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현재 대관식에 참여한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오로지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을 자각하고 연설을 시작했다.
“…최근 페르니아스 왕국은 아주 힘겨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병폐들을 모조리 척결했던 사건을 의미했다.
대관식에 참여한 많은 귀족들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그 사건을 입에 담을 줄은 생각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유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설을 이어나갔다.
“밝힐 수도, 내색할 수도 없었던 아주 부끄러운 실책이었죠.”
비리를 저지르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던 부패 귀족들을 바로 척결하지 못하고, 나라가 병들어가는 것을 바로 잡지 못한 것은 이 나라의 주인이나 다름이 없는 왕가의 일원으로서 부끄러운 사실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유리아는 그것을 시작부터 인정했다.
“힘들고 병들어 있는 이 나라를 다시 밝고 건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무리겠지요.”
왕위를 이어받기는 했지만, 아직 왕국 내부의 모든 귀족들이 유리아의 즉위에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에, 누군가는 그녀가 왕으로서 받은 교육의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에, 누군가는 그녀에게는 아직 이르다는 등의 우려도 컸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유리아는 자신의 능력과 성과들을 보여주고 그 귀족들을 인정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자신이 통치하는 이 나라는 괜찮다는 것을 직접 과시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그러니…. 앞으로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나라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왕이 신하들에게 ‘명령’이 아닌 ‘도움’을 청하는 그 발언은 예상외의 것.
연설이 끝나자 귀족들은 예상치 못했던 연설의 내용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짝
한 귀족이 그 술렁임을 잠재울 정도로 커다란 박수갈채를 터뜨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듯 박수갈채가 주위로 전염되듯 터져 나왔다.
어느샌가 궁정의 내부는 유리아의 연설로 술렁였던 소리를 잠재우는 박수 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웅장한 악기들의 선율이 박수갈채의 끝을 장식하면서 한 귀족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유리아 여왕 폐하! 만세!”
“만세!”
“만세!”
자신의 즉위를 축하하는 우렁찬 목소리를 따라 하듯 박수갈채와 함께 그 축하 소리도 함께 울려 퍼졌다.
하지만 정작 여왕이 된 유리아는 그 축하를 솔직히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 씨…. 오글거려 죽겠네.’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만세를 외치다니, 진짜로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유리아는 연설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타고 내려와 도망치듯 궁정을 나왔다.
많은 시종과 호위들이 뒤를 따라오는 행렬이 이어졌지만, 개인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알렉스과 세리아를 제외한 모든 인원을 물렸다.
이제는 정식으로 여왕이 된 그녀를 단 두 명이 호위한다니 아니 될 일이었지만, 유리아가 으름장을 놓자 시종과 호위들은 어쩔 수 없이 여왕의 명령을 받아들여야 했다.
세리아는 왕녀 시절부터 유리아를 호위해왔던 기사이고, 알렉스는 유리아가 알고 있는 지인 남성중 몇 안 되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였다.
“후우….”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댄 유리아는 옷섶을 살짝 풀며 갑갑한 숨을 토로했다.
“왕녀님. 체통을….”
“나 이제 왕녀 아니야. 여왕이야.”
“그러니 더 아니 될 행동이지요. 누군가가 지금 여왕님의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아, 그때는 제대로 할게. 나 숨 좀 쉬게 해주라. 제발.”
유리아는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잔소리를 늘어놓는 세리아에게 억울한 듯 항변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있어야 할 걸 생각하면 너무 갑갑해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아.”
세리아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알렉스.”
“네. 여왕님.”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면 안 돼요?”
이전에도 알렉스는 유리아를 왕녀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갑자기 그 익숙했던 호칭이 바뀌니 거리감이 확 느껴졌다.
하지만 이전처럼 왕녀라고 불러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차라리 이름으로 불러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부탁했지만, 하지만 알렉스는 고민도 하지 않고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한 나라의 여왕인 그녀를 호칭이 아닌 이름만으로 부르다니, 군주와 신하의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칫.”
조금은 고민을 하는 시늉이라도 해줄 텐데, 곧바로 거절을 해오는 그의 반응이 굉장히 서운했다.
“왜요. 우리끼리만 있잖아요.”
“…저희끼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알렉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유리아는 곧바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
“아, 저 나가 있으라고요? 그러죠. 뭐.”
유리아의 시선을 받은 세리아가 잽싸게 문을 열고 집무실을 나갔다.
최근부터 둘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세리아는 더는 이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여왕인 그녀를 호위하는 임무를 망설임 없이 내팽개쳐두고 나가는 호위 기사를 벌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유리아는 절대로 세리아를 혼내지 않으리라.
“이제 됐죠?”
“네. 여왕….”
“이름.”
“유리아님.”
“흐음. 좋아요.”
‘님’자가 살짝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거야 원래부터 항상 붙어 있었던 경칭.
무엇보다 알렉스가 자신을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유리아는 좋아진 기분으로 알렉스에게 첫 명령을 내렸다.
“내일부터 이곳으로 출근하세요.”
“예?”
“내일부터 알렉스는 크라시르 기사단으로 복귀합니다. 임무는 세리아와 함께 제 전속 호위 담당이에요.”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알렉스는 느닷없는 인사 변경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본래 그의 임무는 여왕으로 즉위할 예정인 유리아를 교육하는 것.
그녀가 여왕이 된 이상, 소공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알렉스는 아르미타스 공작령으로 복귀해야만 했다.
아무리 여동생인 엘레노아에게 영주 대행이 아닌 영주 권한 자체를 넘겼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혼자서 영지를 이끌어가기엔 힘이 들 것 같아 도와줄 예정이었는데, 이런 식의 인사는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여왕…. 아니. 유리아님. 저한테는 돌봐야 하는 영지가….”
“그건 이미 엘레노아랑 이야기가 끝났어요. 이미 흔쾌히 허락해주셨거든요. 물론 엘레노아 뿐만이 아니라, 아르미타스 공작께도 허락은 받아두었습니다.”
“…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알렉스가 되물었다.
“아시겠어요? 이건 이미 결정된 사안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절차라는 게…. 이런 식의 막무가내로 인사를 변경하시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뭐가 문제죠? 알렉스는 이전부터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었잖아요. 그 자리로 복귀하는 것뿐인데.”
“명분이란 게….”
“명분이야 만들면 돼요.”
책임과 부담에 짓눌려 여왕의 자리를 기피하고 있던 유리아는 이미 어느 샌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 알렉스가 이 인사 변경 받아들이지 않으면 여왕 안 할 거예요.”
“…….”
즉위한 지 1시간도 되지 않아서 퇴위하겠다고 으름장을 내놓는 유리아의 언행은 완전히 어린아이의 생떼나 다름이 없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실현할 수 없는 협박이었지만 그 생떼를 부릴 정도로 강압적인 그녀의 의지는 알렉스에게 절실히 전해졌다.
“알겠…습니다. 일단 저는 그럼 준비를 해야 할 게 있으니 먼저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이만.”
알렉스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집무실을 나가자, 교대하듯 세리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얘기는 잘 끝나셨나요?”
“응.”
“굉장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는데요?”
“…….”
유리아는 굳은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은가?”
오르비스 섬에서 있을 때부터, 아니면 어쩌면 이전부터 알렉스를 이성으로 의식하기 시작한 유리아의 마음은 복잡했다.
전혀 근거가 없었던 자신의 ‘미래 예지’를 믿어주고, 자신을 지지해주며 힘이 되어주었던 알렉스는 자신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믿음직스러운 남자였다.
그래서 가능하면 자신의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담아 알렉스를 크라시르 근위기사단으로 복귀시켰다.
그가 근위기사단을 나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이복형이자 이제는 가문에서 폐적당한 애슈턴의 비리와 만행을 책임지기 위해서였으며,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를 근위기사단으로 복직시키면, 유리아는 알렉스가 기뻐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는 것에 실망했다.
아니면 앞으로도 자신과 함께해달라는 것을 너무 돌려 말해서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바보.”
“…….”
유리아가 서운함에 못 이겨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 세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집무실을 나오던 알렉스의 입가가 살짝 호선을 그리며 기쁨을 미처 감추지 못했었다는 걸 보기는 했지만, 그것을 유리아에게 전해줄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짜증나.’
썸을 타고 있는 두 커플 사이에 낀 솔로의 기분은 참 복잡 미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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