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9화 〉 619. 대관식(1)
* * *
“흐응. 그래서 이번에는 그 옛 친구인 인형을 부활시키려고?”
“그럴 생각이야.”
집에 온 은현은 오랜만에 아내들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제는 잔뜩 부풀어 무거워진 배를 이끌고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일리아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낯설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이전에는 타인이나 왕국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무관심한 태도로 방관을 하는 매정한 여자였으나, 남편이 생기고 가족이 늘어나면서 배 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된 그녀는 굉장히 온화하고 인자한 어머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 물론 바로 그 작업에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야. 작업하게 될 때는 네 도움도 받고 싶으니까.”
“내 도움?”
“그야 아르키스의 심장은 하나의 아티팩트이기도 하니까.”
그것도 이 거대한 던전의 내부를 유지할 수 있는 거대한 동력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품고 있으며 생산해내는 아티팩트다.
“이 던전의 코어를 다시 착용시켜주면 작동하지 않는 거야?”
“그건 힘들어. 아르키스의 몸 자체가 기능을 정지한 건 심장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이유들 때문이니까.”
그녀의 심장 자체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문제가 있었다면 지금도 이렇게 던전의 동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어? 현아. 그 심장이란 게 문제가 없었다면, 왜 다시 만들겠다는 거야?”
“심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 심장이 기능 정지의 원인은 맞았거든.”
정확히는 무한한 동력으로 방대한 마력을 방출하는 심장의 출력을 아르키스의 몸이 버티지 못했다.
은현과 함께 행동하면서 아르키스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소체와 부품을 정비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많은 인형을 제작하였던 인형사로서 스스로를 고칠 수 없었던 그녀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이번 기회에 아르키스의 심장을 만들면서, 그 녀석의 소체도 다시 제작할 생각이야.”
사실상 그녀의 외관만 변하지 않지, 그녀의 내부는 완전히 새것으로 교체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은현이 아르키스의 심장을 다시 제작하려는 이유는 출력을 조절하여 그녀의 소체와 부품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욱 튼튼하고 견고한 부품들을 다시 제작하고, 더욱 강력한 동력원인 심장을 제작함으로써 그녀의 전력을 더욱 강화시킬 계획이었다.
내구적인 영구성까지 더하면서, 은현이라는 정비사까지 있는 셈이니, 은현이 있는 한 아르키스는 두 번 다시 정지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르키스의 심장과 부품을 다시 제작하는 건 꽤 나중으로 잡았어. 지금은…그럴 상황이 아니니까.”
은현은 흘끗 잔뜩 부풀어 오른 일리아나의 복부를 응시하며 웃었다.
“가능하면 출산 이후 산후조리까지 끝내면서 네 몸 상태가 완벽히 회복되면, 그때 제작할 생각이야.”
인형의 부품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줄 예정인 새로운 후임 인형사도 정해졌다.
세실리아에게 인형사의 지식을 전수하고 교육하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들어갈 터.
일리아나가 아이를 낳고 컨디션을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는 만반의 준비를 해둘 생각이었다.
“그렇구나.”
일리아나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집에 있을 생각이야. 그동안…. 내가 너무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것 같아서.”
은현은 면목이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임신 소식을 접하면서 정말로 기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외부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아내의 케어를 엘레노아와 릴리에게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은현은 적어도 지금만이라도 일리아나와 함께 시간을 가지면서 곧 태어날 아기에게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좋아. 그 마음가짐은 마음에 드네. 용서해줄게.”
일리아나는 웃으며 너그럽게 반응했다.
애초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기 때문에 이해는 해주고 있었지만, 그래도 남편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던 것은 맞다.
이제부터라도 자신과 배 속의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 주겠다는 게 고맙고 기쁘다.
◆ ◆ ◆
“왔다…. 진짜 왔어….”
“…….”
페르니아스 왕국에서는, 대외적으로 경사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는 날.
평소 여왕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아왔던 집무실 안에서, 유리아는 굉장히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내일이 그토록 오지 않도록 바라고 바라왔던 대관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유리아 페르니아스 그녀 자신이, 여왕의 자리를 정식으로 물려받고 그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유리아는 바라왔다.
“진짜로 어떡하지….”
결국, 한숨을 쉬던 알렉스가 유리아에게 물었다.
“왕녀님. 왜 그렇게 긴장을 하고 계신 겁니까?”
“그야 그렇잖아요. 내가 여왕이라니. 알렉스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서 지금까지 많은 노력을 해오셨지 않습니까.”
본래 왕녀인 유리아에게는 왕위 계승권 자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위로는 정실의 아이이자 장자인 데미안 왕자가, 그 아래에는 측실의 아이이자 자신의 남동생인 에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왕인 안드레아 페르니아스가 공식적으로 사망하면서, 페르니아스 왕국 깊숙이 숨어있었던 추악한 뿌리의 진실이 드러났고, 결국엔 초대 국왕 오르타스에게 몸을 빼앗긴 데미안 마저도 죽어버렸다.
다음 왕위의 계승은 에반 왕자가 이어받아야 하는 것이 옳은 순서였으나, 아직 15살도 되지 않은 남동생은 이 나라를 이끌고 나가기엔 너무 미성숙하다.
“그야 어쩔 수 없었잖아요. 나밖에 없었으니까….”
은현에 의해 강제적으로 등을 떠밀려 왕위를 이어받겠다고는 했지만, 역시나 정작 왕위에 오르는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왕, 여왕이라는 것은 이 나라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백성의 목숨을 책임지는 자리와도 같다.
자신의 선택 하나로 누군가는 웃는 행복을 거머쥘 수도 있지만, 반대로 누군가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책임의 부담이 가중되어 가슴을 옥죄어 왔다.
유리아에게 있어 왕가와 왕의 자리는 도망치고 싶으나, 절대로 도망쳐서는 안 되는 족쇄와도 같았다.
“나는 최대한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목표였는데….”
유리아는 무언가 책임을 지는 것을 싫어한다.
책임을 진다면 그만큼 맡은 바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혹시나 실패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두렵다.
심지어 그 실패라는 것의 결과가 백성들의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맡은 일은 수행하고 좋은 결과를 끌어내야 하는 그녀의 성실함과 책임감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옥죄이는 모순적인 상황.
무책임하고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성정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그래도 유리아의 경우에는 그 성정이 좀 과하다.
이러나저러나 유리아도 자기 자신이 몹시 귀찮은 여자라는 것은 자각하고 있었다.
받아들여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게 되지 않는다.
“하아.”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 한숨이 나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죠. 하하.
갑자기 넉살 좋게 웃음을 흘리는 은현의 얼굴이 머릿속으로 떠올라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을 왕위로 밀어 넣은 그 얄미운 면상을 떠올리자니 주먹으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 가득했다.
심지어 겨우 라면 하나로 속아 넘어갔던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서 자존심이 상했다.
“실례합니다~.”
이윽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아와 알렉스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동시에 돌아갔다.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환상이 현실로 나타난 건가?”
“음?”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유리아의 중얼거림을 들은 은현이 알렉스를 보며 물었다.
“무슨 상황?”
“…내일 있을 대관식 때문에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하신 것 같다.”
알렉스는 구태여 왕가의 일원과 허락된 일부만이 들어올 수 있는 궁정 안에 태연히 모습을 드러낸 은현을 나무라지 않았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외부인의 침입을 허락해버리는 이 상황은 자칫하면 왕가와 왕국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동이라도, 상대가 은현이라면 의미가 없다.
알렉스와 은현은 그런 것을 나무랄 사이도 아니고, 은현의 경우에는 이 부분에서 선을 넘지 않고 잘 지키는 남자였다.
“아아.”
쓴웃음이 가득한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은 은현은 현재 유리아의 심경이 어떤 상태인지 이해했다.
“저 진짜로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유리아가 번뜩이는 눈으로 은현을 보며 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굉장히 심상치 않음을 느낀 은현은 그것이 가벼운 부탁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를 알고 있는 은현이나 알렉스는 그 부탁이 그녀의 입장에서는 중요할지라도, 실없는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얼굴 한 번만 때리게 해주시면 안 돼요? 진짜 그쪽이 너무 얄미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갑자기 왜 그러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리아나한테 괜히 혼나고 싶지 않으시면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럴 때 스승님을 방패로 뒤에 숨는 건가요! 진짜로 짜증나!”
은현은 진심 어린 조언으로 유리아를 설득한 것이었지만, 유리아의 입장에서는 은현이 일리아나의 뒤에 숨어서 자신을 약 올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진정하시죠. 왕녀님.”
아니나 다를까, 일상이라는 듯 알렉스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의 실랑이를 중재했다.
이윽고 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뭐, 내일이 대관식이니까. 나도 왕녀님의 상태를 보러 왔지.”
하지만 보다시피 여왕의 자리에 대한 부담이 생각보다 무거웠는지 유리아는 살짝 패닉 상태였다.
“혹시 만에 하나, 지금이라도 왕위를….”
“그건 안 됩니다.”
“그렇죠! 알고 있었어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게 즉답할 것까지는 없잖아요!”
본인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단칼에 거절해오는 은현의 대답을 들은 유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서러운 기분을 느꼈다.
“뭐 너무 부담을 느끼지 마세요. 저나 알렉스도, 두 공작 가문을 비롯한 다수의 귀족들이 왕녀…. 아니 여왕님을 도울 겁니다.”
“대관식은 내일이에요. 벌써부터 여왕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진짜 싫어….”
유리아는 벌써 자신이 여왕으로 불릴 것을 상상하자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어쩐지…. 이거 진짜로 바지사장 느낌이 강한데…. 당신 또 날 앞세워 두고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죠?”
“그런 게 있을 리가요.”
은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의 목적은 왕가와 아르미타스, 올리비온의 두 공작 가문을 앞세워 앞으로 있을 재앙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지, 다른 꿍꿍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왕가를 비롯해서 가장 권력이 강한 권력자들을 뒤에서 조종한다니, 이거 완전 비선실….”
“저 그런 인간 아니라니까요.”
실제로 은현은 앞으로 있을 재앙을 대비하려는 것뿐이지, 유리아나 다른 두 공작 가문을 앞세워 사적인 이익을 취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미 돈은 평생을 쓰고도 남을 정도로 많고, 솔직한 본심은 내정을 탄탄하게 정비하고 전력이 강화된 페르니아스 왕국이 알아서 재앙을 이겨내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면 자신은 아내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면서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은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들을 해두는 것이다.
은현은 화제를 전환하여 내일 왕위를 물려받을 예정으로 심란한 유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럴 때는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기분을 좀 푸는 건 어떻습니까?”
“…….”
유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은현을 노려보았다.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가벼운 태도로 말하는 은현을 보는 유리아의 눈빛은 ‘이 인간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의미가 가득했다.
“알렉스. 여왕…. 왕녀님을 공작령으로 모셔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괜찮다. 오늘 하루 쯤은….”
알렉스도 많이 심란해하는 유리아를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은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보좌하는 알렉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은현은 유리아에게 물었다.
“라면. 끓여드릴까요?”
“…먹을래요.”
유리아에게 은현은 정말로 얄미운 인간이었지만, 음식에는 죄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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