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3화 〉 613. 이성의 괴물(4)
* * *
카아앙!
경쾌한 금속의 충돌 소리.
한 자루의 검과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맞부딪치면서 생기는 충격의 여파가 숲 주변을 뒤흔든다.
“하하.”
그 중심에 서 있는 시에테는 기쁨의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백귀로서 부활하면서 사용할 수 있게 된 신수의 마력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검을 가지게 된 것이 기쁘다.
자신의 기술을 받아내면서 오히려 반격을 해오는 호적수가 나타났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제자라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기쁘다.
최고의 검으로 최고의 검사를 상대하는 것은 검술의 끝을 추구하는 시에테에게 있어 최고의 즐거움이었다.
카아앙!
전심전력을 다 하여 자신을 공격해오는 은현의 칼날을 쳐내고, 시에테는 곧바로 반격을 시도했다.
숨이 가빠지고, 전신에 흐르는 혈류의 흐름은 점점 가속한다.
심장의 고동은 쿵쾅거리며 시끄럽게 두들겨지고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감정을 고양시킨다.
단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자칫 잘못하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 속에서, 은현과 시에테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은 높은 영역에 다다른 검사들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크…!”
허를 찔러오는 매서운 일격에 신음하면서, 은현은 그 공격을 방어했다.
몇십 번을 당해도 시에테의 검격은 항상 매섭고 정확하다.
시련을 통해서 이 공격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그대로 당해버렸을 살벌한 검격.
은현은 이를 꽉 깨물고 그녀의 검술에 대항했다.
그 광경을 멀리서 관전하던 세 사람 중, 에린이 리오드에게 물었다.
“현이가…. 천재가 아니라구요?”
“그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인가요? 현이는 대단해요.”
“대단하지. 하지만 대단한 건 저 녀석이 해온 노력이지. 저 녀석의 재능이 아니다.”
“…….”
에린은 리오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남편이자 스승인 은현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천재였다.
자신과 만난 이래, 은현은 단 한 번도 실패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고, 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척척 해결해낼 힘을 가진 남자.
에린에게 있어 은현은 영웅이었다.
그런데 지금 은현과 가장 친한 친구일 터인 리오드가, 은현의 재능을 부정하고 있다.
“아무리 리오드님이라도…. 현이의 험담을 하시면 일리아나님한테 다 이를 거예요.”
“…저 녀석의 험담을 늘어놓은 게 아니다만.”
리오드는 느닷없는 에린의 경고에 인상을 찡그렸다.
차마 자신에게 화를 내지는 못하겠고, 그래서 떠올린 방법이 일리아나에게 일러바치는 것이라니.
꽤 유치하고 귀여운 발상이기도 했지만, 여기서 일리아나가 화를 내게 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굉장히 귀찮다.
딸뻘의 여성에게 변명을 늘어놓아야 한다니, 왕국 최고의 기사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리오드는 그것보다도 일리아나의 귀에 이상한 오해가 들어갔을 경우의 상황이 더욱 귀찮았다.
“…재능이 아니시다면 어떻게 저 움직임이 가능하신 겁니까?”
차한성이 굳은 얼굴로 물어보았다.
흔한 말로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재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차한성은 그 말이 허구임을 알고 있다.
이 세상은 도저히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야 하며 그 노력이 빛을 보지 못하고 바스러져, 사라져 가는 목숨이 너무도 많다.
카아앙!
차한성은 경악의 감정이 섞인 눈으로 은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보았다는 표현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올바르지 않다.
시에테는 물론 은현의 움직임을 두 눈에 담으려 해도, 둘의 모습을 제대로 쫓아가기조차 쉽지가 않다.
‘저것이….’
차한성은 생각했다.
리오드와 같은, 아니 리오드를 뛰어넘는 수준에 속해있는 검사들의 싸움이라는 걸까.
저런 이들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면 자신의 검술은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저건 저 녀석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리오드는 차한성의 물음에 답했다.
“너는 보통 검을 휘둘러 공격을 할 때, 어떤 생각을 하지?”
“…어떻게 하면 가장 큰 데미지를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죠.”
“그렇다면 공격을 받게 될 때는?”
“어떻게 하면 데미지를 받지 않을지, 최소화를 시킬지를 생각하고 그에 맞는 움직임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이건 공격과 수비에 대한 기본과도 같다.
상대방에게 공격을 가하여 데미지를 주면서, 자신은 데미지를 받지 않는 것.
검술뿐만이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주먹질의 싸움이나 마법전에서도 통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
“그렇다면 너는 저분의 검격을 막을 수 있을까?”
리오드는 은현이 상대하고 있는 시에테를 보며 물었다.
“…아니요.”
차한성의 그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고민도 없이 즉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도 시에테의 검격이 차한성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검격은 물론 잔상을 남기고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는 그녀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어떻게 그녀의 공격을 막을 수가 있을까.
차한성은 모그라프령에서 시에테가 아주 짧은 순간에 사람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오우거 좀비의 몸통을 토막 내 썰어버렸던 충격적인 광경을 떠올렸다.
그 토막난 시체가 얼마든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겠지. 나라도 저분의 공격을 온전히 막아내면서 반격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다, 단장님께서도…?”
순순히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리오드를 보고 차한성이 놀란 모습을 보여주었다.
깔끔하게 인정하는 그의 얼굴에는 분함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으며 담담했다.
“하지만 저 녀석은 그걸 해내고 있지.”
은현은 시에테의 공격을 버거워하면서도 모두 막아내고 있었고, 심지어 반격을 가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건 저 녀석은 저분의 공격이 보인다는 뜻이다.”
“…그렇겠죠.”
하지만 보인다고 다가 아니다.
노도와도 같은 시에테의 연격을 막아내고 미세하게 드러나는 빈틈을 찾아내어 반격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간단할 리가 없다.
이와 같은 공격과 수비, 반격의 연속이 단 몇 초 동안 수십 번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
“저 녀석이 강한 이유는 생각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하게 강인한 육체도, 밀도 높은 강대한 마력도, 타고난 검술에 대한 재능도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은현이 시에테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아슬아슬하게 대등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유는 은현의 생각과 사고의 회전이 남들보다 비약적으로 빠르기 때문이다.
시에테가 은현을 상대로 봐주고 있는 점도 이유 중 하나지만, 그런데도 은현의 사고력은 다른 이들과는 남다른 수준.
“단 한순간에 승패가 갈리고 목숨이 오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사고를 멈추지 않고 계속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건 너도 알겠지.”
“…그렇죠.”
차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온 신경이 적에게 쏠려있어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제대로 자각하지도 못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쌓은 자신의 경험과 본능들뿐.
“저분은 그쪽의 분야로 특화되어 있으신 진짜 재능이시지.”
한 번의 검격이 다음의 검격으로 이어지고, 다음이 또 다음으로 이어지며 공격의 흐름이 유려하고 화려하게 흘러간다.
카아앙!
휘몰아치는 숲 속의 중심에서 살벌하게 칼을 부딪치는 은현과 시에테는 마치 아름다운 춤사위를 서로에게 선보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검술은 눈으로 인식하기 힘들 수준의 속검과 마수의 단단한 피부와 살점을 간단하게 잘라버리는 압도적인 절삭력.
시에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각과 본능, 그리고 검술의 끝을 보고 싶은 향상심을 녹여내어 머릿속 이상이나 다름없었던 검술을 만들어낸 진짜 천재다.
은현은 시에테에게서 배운 검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동작을 하나부터 열까지 머릿속에 모조리 집어넣었고 그 동작들을 스스로 재현해 왔다.
어째서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어떻게 마력을 운용해야 하는 것인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며 그녀가 남긴 유산이나 다름없는 검술을 400년 동안 홀로 익혀왔다.
그리고 지금의 은현은 또 다른 평행세계의 자신이 겪었던 경험들을 토대로 그 경지를 향해 발돋움하고 있다.
“같은 곳에서 같은 상황임에도 저 녀석은 항상 우리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지.”
두 눈과 귀, ‘감지’를 통해 파악한 지각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전달되고, 그 정보들을 정리하여 결론을 낸 올바른 판단을 전신에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움직이는 반사의 속도가 은현은 다른 이들에 비해 비약적으로 빠르다.
그것은 여신의 가호로 발현된 ‘시간 가속’과 ‘사고 가속’으로 타인들과는 남다른 시간의 흐름을 살고 있는 은현에게만 허락된 특권.
시에테가 감각만으로 극에 달한 검술을 구사하는 본능의 소유자라면, 은현은 이성으로 그녀의 검술을 따라잡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여 어떻게든 이기기 위한 수를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은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강점이다.
그 강점에 여신의 힘이라는 특혜가 작용한 것은 맞지만, 리오드는 몇백 년 동안 그것을 유지하고 끊임없이 오랜 시간을 훈련으로 쌓는 것이 과연 자신에게도 가능할까 하고 생각했다.
‘똑같은 상황과 조건이 주어진다면….’
만약 자신에게도 그 여신의 힘이라는 특혜를 받을 수 있다면 은현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리오드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것을 해낸 은현이 존경스러우며, 대단하다고 느꼈다.
설명을 들은 차한성의 반응도 리오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단하군요.”
그의 과거와 여신의 존재까지는 아직 알지 못했지만, 차한성은 도저히 저것이 가능할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역시…. 현이는 대단하다는 거죠!?”
진중하게 이어왔던 리오드의 설명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에린이 최종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리오드의 설명이 은현에 대한 험담이 아니라 칭찬이었다는 것이다.
“…그래.”
리오드는 그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에린의 물음에 긍정했다.
그렇게 세 사람의 관전 아래에 이어졌던 살벌한 싸움이 마침내 끝을 달했다.
거친 호흡과 땀으로 가득했던 은현과 시에테 중, 먼저 중단을 입에 담은 것은 은현이다.
“후우….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래.”
시에테로 검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전신이 이완되고 여유를 되찾으면서 입에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하아아…. 정말 좋았구나.”
오랜만에 본심에 가까운 힘을 낼 수 있었던 탓인지, 시에테의 얼굴에는 개운함이 가득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나와 시간을 보내라.”
“…네.”
은현은 쓰게 웃으며 시에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렇게 실전을 가장하여 격렬히 움직인다면 몸이 남아나질 않겠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이 있었다.
게다가 부활하여 다시 삶을 누리게 된 시에테에게 지금까지 해주지 못했던 제자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던 것은 은현의 가슴 속에 남아 있던 마음의 짐이다.
그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은현은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사전에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잊지도 않았다.
“그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시에테는 느닷없이 조건을 걸어오는 은현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였다면 자신이 시켰는데 무슨 말이 많냐며 제자인 은현을 타박했지만, 겨우살이라는 자신에게 딱 맞는 검도 선물을 받았고, 은현과 검술을 겨루는 것이 몹시 즐거웠던 시에테는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았다.
“흠, 뭐냐. 말해라. 어떤 조건이든 들어주겠다.”
“아, 그게…. 스승님께 거는 조건이 아니고요.”
“그럼?”
“일단 아내들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해서요. 대답은 그 이후에 드려도 될까요?”
이제는 혼자가 아닌, 가정이 있는 은현으로선 당연히 할 수 있는 요구였다.
400년 전의 인연이며 자신에게 검을 가르친 스승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시에테는 이성이다.
그리고 은현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시에테와 대면했었던 엘레노아는 이미 은현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시에테의 속마음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으며, 이 사실은 일리아나도 알고 있다.
“…….”
아내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유부남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와 노력이었지만, 시에테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다시 만난 제자는 이미 결혼을 하여 아이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는 자신을 제일 우선시하지 않는 제자의 생각과 행동이 아니꼽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시에테는 스스로의 복잡한 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
“흥. 그건 니 알아서 해라.”
그 마음을 감추듯 애써 얼버무렸고, 은현과 관전을 이어가던 세 사람과 함께 모그라프령 내로 복귀했다.
[…에휴.]
‘…베르단디님?’
복귀하던 도중, 갑작스레 베르단디가 은현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너무도 뜬금이 없어서, 은현은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세요? 뭔가 문제가 생겼나요?’
[생겼다면 생겼지….]
작게 중얼거리며 은현을 보고 있는 베르단디의 표정은 ‘대체 얘를 어쩌면 좋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부모의 눈빛이다.
이것을 은현에게 설명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그냥 두기에는 무언가 답답하다.
베르단디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은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쩌겠느냐. 이게 다 내 아이가 너무 잘난 탓이니.]
“예…?”
어째서 무슨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결말에 도달하는 것인지, 은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