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2화 〉 612. 이성의 괴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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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그라프령의 외곽.
변경령에서 멀리 떨어진 숲 안쪽까지 굳이 발걸음을 옮겨온 은현은 적월과 청월을 양손에 쥐고 맞은 편의 시에테를 응시했다.
마찬가지로 겨우살이를 손에 쥔 시에테 또한 은현을 응시한다.
싸늘한 바람 때문인지 와인 한 병을 다 마셨던 시에테의 얼굴에는 취기가 전혀 감돌지 않아 보였다.
한 마디도 섞지 않고, 그저 서로를 응시하기만 하는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싸늘했던 것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시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그 정적인 분위기가 너무나도 고요하고 살벌해서, 멀찍이서 조용히 관전하고 있는 이들 중 한 사람인 에린이 긴장에 침을 꿀꺽 삼킬 정도였다.
누가 먼저 움직여 선공을 취할지 한치의 앞을 알 수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은 차한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중 유일하게 리오드만이 담담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은현과 시에테를 응시했다.
이내 두 사람 사이에 변화가 일어났다.
미약하게 불어오는 선풍을 등에 지고 먼저 모습을 감춘 것은 은현 쪽이었다.
순식간에 시에테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검을 휘둘렀다.
적청(赤)의 색을 띄우고 있는 두 자루의 검 중 적월의 칼날이 정확하게 시에테의 목을 향했다.
카아앙!
“아…!”
그저 검술의 대련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에린의 놀란 목소리가 은현과 시에테의 귓가에 들렸다.
그야 놀랄 만도 하다.
지금 은현은 정말로 시에테의 목을 벨 기세로 진심을 다해 검을 휘둘렀으니.
은현과 시에테의 관계가 자신과 은현의 관계처럼 사제지간이라고만 알고 있었던 에린에게는 경악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신계에서 시련을 통해 수백 번을 죽였고 죽임을 당했던 관계.
비록 이곳에서는 단 한 번의 일격으로 정말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지만, 그 관계를 넘어선 두 사람은 더는 이전처럼 검술을 겨뤄볼 수 없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더는 평범한 사제지간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이제는 검사와 검사의 대결만이 있을 뿐이다.
시에테는 자신의 목에 쇄도해 들어오는 은현의 칼날을 막아내고 웃음을 흘렸다.
“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목을 치고 들어오는 검격은 군더더기가 하나 없이 깔끔하고 빠르다.
심지어 자신을 상대로 진짜로 살기까지 깃들어 있었을 정도.
은현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리듯 반대편에서 청월의 칼날이 시에테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온다.
시에테는 곧바로 막아낸 적월을 쳐내고 곧바로 검을 휘둘러 반대편에서 파고 들어오는 청월의 칼날을 막아냈다.
막힐 것을 예상하였던 은현은 곧바로 자세를 잡고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다.
이도류의 장점을 극대화시켜 양쪽에서 휘몰아쳐 오는 노도의 연격은 잔상을 남길 뿐, 육안으로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빠르고 매서운 일격들.
하지만 시간을 극한으로 압축시킨 것만 같은 극한의 짧은 순간 동안, 수십 회가 넘는 노도의 연격 중 시에테에게 닿은 공격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시에테는 그렇게 진심으로 들어오는 은현의 마음가짐에 기쁨을 느꼈다.
이 정도는 당연히 막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전심전력을 다 해 오는 제자의 마음에 답해주는 것이 스승으로서 당연한 도리.
이윽고 그 연격이 이어지는 빈틈을 찾아내어, 기쁨의 미소를 짓고 있던 시에테의 반격이 시작됐다.
카아앙!
“큭!”
호흡조차 잊을 정도로 몰아붙이는 노도의 연격 도중, 아주 작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시에테가 앞으로 파고들어 은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은현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을 노렸듯, 시에테 또한 은현의 목을 향해 겨우살이를 휘둘렀다.
‘막아 봐라.’
이것은 시에테의 시험이었다.
은현은 자신의 목을 향해 쇄도해 들어오는 시에테의 칼날을 두 눈으로 똑바로 응시했다.
‘보인다.’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느껴지며 떠오른다.
바람을 가르며 점차 자신의 목에 가까워져 가는 칼날의 날카로움이.
그리고 유피테르가 부여했던 시련 속에서 은현은 이 칼날에 수십 번이나 목이 베어졌던 적이 있었다.
‘대응할 수 있어.’
그 수십 번의 죽음 끝에, 은현은 이 공격에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죽음을 통해서 얻었던 값진 경험은 결코 무의미했던 것이 아니었다.
은현은 손을 움직여 적월을 역수로 쥐고 위로 들어 올려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시에테의 검날을 쳐냈다.
카아앙!
시에테의 겨우살이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면서 자세가 흐트러진 아주 짧은 순간, 은현은 청월을 휘둘러 검을 쥐고 있는 그녀의 팔을 노렸으나, 시에테는 곧바로 몸을 뒤로 빼면서 순식간에 은현의 검이 닿는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청월이 시에테가 아닌 허공을 베자마자, 둘 사이의 간격이 또다시 벌어졌다.
이번에 그 거리를 좁히며 돌진한 것은 시에테 쪽이다.
매섭게 들어오는 겨우살이의 새하얀 검신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은현의 급소를 공격하기 위해 들어왔다.
그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하고, 또 방어하는 두 사람을 중심으로 바람이 일어 휘몰아치고,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주변을 휩쓸기 시작하는 살벌한 마력의 여파에 에린이 점차 몸을 떨고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마, 말려야 하는 게…!”
현재 은현과 시에테가 하고 있는 것은 검술의 대련 같은 것이 아니다.
서로의 목숨을 칼날로 꿰뚫어버리는 살벌한 살인전.
에린은 점점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저 살벌한 살인전을 이어나가다가 혹여 은현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냐는 상상이 머릿속으로 끊이지 않는다.
에린이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서서 은현과 시에테의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라.”
이내 리오드가 에린의 어깨를 붙잡으며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하지만 리오드님…!”
“저 녀석의 얼굴을 잘 봐라.”
리오드는 담담히 은현과 시에테의 싸움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로의 목숨을 바로 빼앗을 수 있는 살인전을 계속하고 있으면서도, 은현과 시에테는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째서…?”
에린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치명상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연속.
저 싸움에서 희열을 느끼고 즐기는 것은 에린에게 불가능했다.
에린은 은현에게서 많은 기술을 배우고 그것을 기반으로 많은 전투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금위계 모험가라는 자리를 거머쥘 정도로 실력을 쌓았으나, 싸움 자체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에린에게 싸움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싸움 자체를 즐기는 전투광은 아니었다.
그래서 목숨이 오가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저 사제지간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신의 가호로 보호받고 있는 은현의 감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에린은 저 싸움 자체를 즐기고 있는 또 다른 한 명인 시에테의 감정을 읽어 들였다.
즐거움, 기쁨, 환호.
그리고 대견함, 애정.
시에테는 망설임 없이 은현의 급소를 매섭게 공격하면서도, 그것을 척척 막아내고 반격하여 자신의 급소를 치고 들어오는 은현을 보고 기뻐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공격을 하면서도, 막히고 반격을 당하는데도 그녀의 감정은 긍정적으로 고취되어 간다.
마치 은현이 자신의 공격을 당연히 막을 것이라는 신뢰가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모순적인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 것에 에린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저건 우리가 끼어들어도 되는 싸움이 아니다.”
단호하게 선언하는 리오드는 그렇게 두 사람의 격렬한 검술을 똑똑히 두 눈에 새기고 있었다.
“…….”
에린은 은현의 제자로서, 아내로서 이 싸움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 자체가 몹시 못마땅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만약 이곳에 일리아나나 엘레노아가 있었다면 분명히 노발대발하며 이 싸움을 멈추게 했으리라.
에린은 다시금 자신의 생각을 굳히고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두 번째 제지에 의해 행동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다.
[신수 아이야. 그러지 않아도 된다.]
‘…베르단디님?’
[신수 아이가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저것은 말리지 않아도 된다.]
‘어째서…인가요? 현이가 다칠지도 모르는데…!’
자신을 포함한 은현의 아내들 중에서, 아니 아내들보다도 더욱 은현을 아끼고 소중하게 대해주는 이가 바로 베르단디다.
에린은 그런 베르단디가 어째서 이 싸움에서 방관을 선택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르단디는 에린의 물음에 그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내가 그것을 모를까. 하지만….]
도저히 말릴 수가 없는 자신의 아이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이에게는 저것이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말려야 한다면, 은현이 신계에서 유피테르에게 신격을 갖추기 위한 시련을 받는 것 자체를 말렸어야 했다.
그 시련 속에서 이미 시에테에게 수십, 수백 번의 죽음을 경험한 은현은 한 번의 칼부림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저 싸움 자체가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다.
설령 지금이 시련이 아니라, 딱 한 번뿐인 목숨을 걸어야 하는 현실일지라도, 두 사람은 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걸 베르단디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너무 과해진다면, 내가 나설 테니.]
‘…네. 꼭이에요?’
[후후, 그럼.]
에린은 베르단디의 말에 결국 한 발짝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합니다.”
에린이 베르단디에게 설득을 당하고 있을 때, 차한성은 두 눈으로 둘의 모습을 쫓기에 바빴다.
제대로 인식조차 하기 힘든, 그들이 보여주는 살벌한 검술의 향연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기술의 정수를 느낀 차한성의 얼굴에는 감탄이 섞여 있다.
타인의 기술을 보고 남다른 습득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차한성은 현재 사투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기술이 자신이 습득할 수 있는 수준의 영역이 아님을 곧바로 인지했다.
카아앙!
어째서 저렇게 공격을 할 수 있는 걸까, 어째서 저렇게 방어를 할 수 있는 걸까.
공격과 방어, 그리고 반격까지 공수교대와 연속되는 기술의 흐름이 너무 빨라서 읽어낼 수가 없다.
마치 검을 쥐고 있는 육체가 머릿속의 사고를 거치지 않고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다.
두 사람이 쥐고 있는 세 자루의 검이 맞부딪치면서 튀는 스파크가, 금속의 울림이 연속으로 퍼지며 숲속을 압도해나갔다.
공기를 타고 흩뿌려지는 두 사람의 뒤엉킨 마력을 느낀 차한성은 전신의 피부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차한성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저 두 사람처럼 강해질 수가 있을까.
두 사람의 검술을 두 눈에 담고 있으면서도, 그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은현과 시에테는 차원이 다르다.
리오드의 검술을 배우고 있었던 차한성에게는 그의 검술은 자신의 앞에 놓인 길과도 같았다.
하지만 은현과 시에테의 검술은 명확한 종착점이 있지만, 길은 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하고 있다.
“천재….”
천재라는 단어로밖에 두 사람을 표현할 길이 없다.
“…천재 같은 게 아니다.”
“예?”
이내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로 리오드가 차한성의 중얼거림을 부정했다.
“저분은 확실히 네 생각대로, 너나 나와는 남다른 영역에 존재하시는 게 맞다. 하지만 저 녀석은…. 천재 같은 게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리는 리오드는 은현이 어떻게 해서 그의 스승인 시에테를 따라잡았는지, 거기에 소모된 시간과 노력의 무게를 알아보았다.
이를 꽉 깨물고 팔짱을 끼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리오드를 보고, 에린과 차한성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 리오드님?”
“…단장님?”
웬만해선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을 보여주던 리오드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 갔다.
에린은 리오드의 감정을 읽어들이고 깜짝 놀랐다.
기쁨, 자랑스러움, 동경.
그리고 자그마한 질투의 감정.
“또 이렇게 멀어져 가는 거냐. 괴물 같은 녀석.”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친구와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는 리오드의 소망은 도저히 이루어질 날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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