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9화 〉 609. 성녀와 악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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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가 가진 몽마의 힘으로 구현된 ‘진실의 방’은 현실에 간섭한 꿈의 세계를 뜻한다.
일반적인 서큐버스의 힘은 대상의 정신을 장악하여, 그 정신체를 몽마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고유 공간인 ‘꿈의 세계’로 데려가 농락하는 것.
하지만 릴리의 힘은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현실에 존재하는 정신체를 꿈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꿈의 세계와도 같은 가상의 공간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이 릴리의 ‘진실의 방’의 정체.
정신체 자체를 빼내어 꿈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보다, 현실에 간섭하여 특정의 공간을 꿈의 세계로 재구성하는 이 능력은 일리아나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탄생하지 못했다.
일리아나는 은현이 가끔 선보였던 능력 중 하나로 과거의 사건과 배경을 똑같이 재현하는 ‘환상 세계의 구현’을 보고 영감을 얻어 릴리에게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현실에 간섭하여 재구성된 이 ‘진실의 방’ 안에서, 이 공간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릴리는 여왕과도 같은 권위를 발휘한다.
그렇게 릴리는 새롭게 개발한 자신의 능력을 여실히 발휘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알테리아 상회의 상회주인 보른과 두 직원은 허공에 떠오른 영상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영상 속에는 풍비박산이 나버린 자신의 상회 건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수정구슬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상황을 진실의 방안에서 릴리가 확대하여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상황의 연출.
“곧 소란을 들은 우리 가문의 기사들이 너희 상회의 건물로 향할 거야.”
알테리아 상회의 건물을 갑작스레 공격한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잡기 위해서, 미리 대기시켜두었던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우리 영지에서 불법적으로 착취하고 있었던 은닉재산을 모조리 회수할 예정이지.”
자백은 이미 릴리의 능력으로 인해 보른이 직접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를 옭아맬 수 있는 추가적인 증거들은 알테리아 상회로 출동한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이 가져와 줄 것이다.
수집한 물증들만 확인하면, 알테리아 상회를 공작령에서 지워버리고 모든 재산을 회수시킨 이후의 절차는 몹시 간단하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그렇게 모든 일을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 신경이 쓰이는 일을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말할게. 네 뒤에 누가 있는지 말해.”
“…….”
자신의 영지민들을 쥐어짜 내어 착취하고, 추방당했던 철호단 길드를 신원을 속여가면서까지 안으로 들여보낸 보른의 죄질은 이미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사형을 시킬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보른의 뒤에 있는 배후를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적어도 목숨은 살려줄게.”
“크으….”
하지만 엘레노아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보른은 이를 꽉 깨물며 입을 꾹 닫았다.
도대체 얼마나 거물이 그를 보호해주고 있는 건지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엘레노아는 다시 릴리를 불렀다.
“릴리.”
“네. 작은 마님.”
작게 고개를 끄덕인 릴리가 다시 세 사람의 정신에 고통을 주입시키려 하자, 반응은 곧바로 나타났다.
“말하겠습니다…! 말할게요!”
겁에 질려 다급하게 말하는 목소리는 보른의 것이 아닌, 상회의 직원 중 한 사람이다.
“…조용히 해!”
입을 열려는 상회의 직원을 향해 보른이 언성을 높이며 윽박지르려 했지만, 상황이 이 지경까지 흐르게 된 이상 직원은 거리낄 게 전혀 없었다.
“상회주님은…! 아니! 당신은 몰라도 우리는 여기서 죽는 건 확정이잖아!”
알테리아 상회가 끝장난 이상, 그들에게 보른은 더는 자신들의 상사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말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 생각한 직원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알테리아 상회에게 자금을 대주고 아르미타스 공작령으로 보낸 배후는 바르텔 왕가입니다!”
“…바르텔 왕가?”
엘레노아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나라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인상을 찡그렸다.
바르텔 왕국은 페르니아스 왕국에 인접한 나라로, 아르케나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해안을 끼고 있어 해상 무역에 특화된 왕국이다.
페르니아스 왕국도 티르니스령이라는 영지로 해상 무역으로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바르텔 왕국은 수도 자체가 해안을 끼고 있는 것이 특징인 만큼 항구에 드나드는 선박의 규모는 티르니스령과 비교를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돈과 물자가 오가는 국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야.”
바르텔 왕국은 자국의 가장 큰 장점인 해상 무역을 중심으로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국가다.
아무리 아르미타스 공작령이 급성장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아 페르니아스 왕가와 귀족들을 긴장케 했다고는 하지만, 바르텔 왕국의 수도에서 유통되는 돈의 흐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배후에 바르텔 왕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납득이 가는 부분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는 하지만, 보른은 그저 규모가 큰 상회를 운영할 뿐인 평민의 신분이다.
그런 그가 페르니아스 왕국의 2인자나 다름이 없는 아르미타스 공작령을 차지하는 데는 자본 이외에도 다양한 것이 필요할 터.
그 지원들을 바르텔 왕가가 배후에서 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납득이 간다.
“…어지간히도 돈 냄새를 맡았나 보네.”
그런 바르텔 왕국이 보른과 알테리아 상회를 앞세워 아르미타스 공작령을 마음대로 주무르려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돈이 되니까.
현재 공작령에 이주해온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드워프의 등장과 함께 아르미타스 공작령은 제2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설이나 책 속에서나 존재하여 환상의 종족으로 기술되었던 드워프들이 제작한 장비들은 지금껏 시중에 나도는 장비들과 차원이 다른 성능을 자랑하여, 이 장비들을 구하기 위해 아르미타스 공작령으로 모여드는 모험가들의 숫자도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당연히 거기에 잇따른 상인들이 돈 냄새를 맡고 아르미타스령으로 더욱 몰려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
엄청난 인구의 유입을 보이고 거기에 잇달아 경제도 활발해지고 있는 현 공작령은 다른 국가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영지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바르텔 왕가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공작령이 쌓아둔 막대한 부가 아니다.
그 부를 창출해내는 내부의 구조, 또는 앞으로 더욱 많은 돈을 쓸어 담을 가능성이 보이는 아르미타스 공작령 그 자체다.
“그래. 알았어.”
의문이 풀린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릴리에게 손짓했다.
그 의미를 이해한 릴리가 가혹한 고문을 이어나갔던 진실의 방을 해제했다.
언제 뒤바뀌었냐는 듯 다시 만찬이 이어지던 저택의 공간으로 뒤바뀌고 세 사람을 옭아매고 있던 악마의 능력이 풀렸다.
“허억, 허억, 허억!”
릴리가 걸었던 속박이 풀리자마자, 세 사람은 그대로 의자에서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이내 보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의 부하 직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배후를 말하면, 왕가에서 우리를 살려둘 것 같냐!?”
“어차피 말하지 않아도 여기서 죽는 건 똑같아! 너야말로 왕가가 끝까지 우리를 보호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럴 리가 없다고 직원은 확신했다.
그저 평범한 평민에 불과했던 그는 확실히 보른과 마찬가지로 수완이 좋은 점을 인정받아 상회 내부에서도 제법 중책을 맡아왔으며,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더러운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였다.
필요하다면 써먹고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 허다한 이쪽 업계의 특성상 직원은 자신의 미래도 언제 뒤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을 내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을 내린 것이다.
살고 싶다면, 살아야 한다면 여기서 배후를 불고 엘레노아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 너는 더 이상 내 상사도 아니야! 나한테 명령하지 마!”
직원은 자신의 멱살을 움켜쥔 보른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레노아의 앞으로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저는, 저는 다 말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그래.”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과 릴리를 정욕이 어린 저급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직원이, 이번에는 추하기짝이 없는 비굴한 얼굴로 용서를 빌고 있다.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었던 엘레노아는 더는 이 세 사람을 상대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릴리.”
“네. 작은 마님.”
색정이 가득한 몽마의 모습에서, 어느샌가 메이드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 릴리는 곧장 엘레노아의 명령에 따라 세 사람에게 최면을 걸었다.
릴리의 붉은 눈에서 요동치는 악마의 마력을 접한 세 사람은 입을 반쯤 벌리며 정신이 나간 듯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외부에 발설할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보른은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정신에 강제적인 제약을 주입시키는 몽마의 힘은 어느 의미로 저주에 가깝다.
릴리가 주입한 몽마의 마력에 의해, 오염된 정신을 아직 회복시키지 못한 세 사람이 바닥에 축 늘어지듯 쓰러졌다.
릴리는 그런 세 사람을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기사들이 들어와 세 사람을 업고는 그대로 저택을 나갔다.
“설마 정말로 살려주실 줄은 몰랐어요.”
엘레노아는 약속대로 보른과 두 직원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것은 아니다.
공작령 안에서 악질적인 범죄를 저지른 그들의 신분은 노예로 격하되어 평생을 광산에서 광석을 캐는 불합리한 노동으로 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저들한테는 앞으로 살아있는 것이 지옥이야.”
힘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던 재산과 지위, 상회를 모조리 빼앗았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 풍족했던 지금과는 다른 가혹한 길을 걸어가야 할 테니 어찌 자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엘레노아는 이번 일을 계기로 철저한 수사를 진행하여 알테리아 상회의 악행에 가담했던 이들 전부를 처벌할 생각이었다.
“바르텔 왕국은…괜찮을까요?”
“증거가 없었다면 모를까.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명확하게 있는데 바르텔 왕국 쪽에서도 뭐라 할 자격은 없지. 그래도….”
엘레노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찡그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바르텔 왕국이 이대로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분명히 트집 잡아 시비를 걸어올 것이 분명하다.
앞세워 보내두었던 알테리아 상회가 망했다는 소식이 바르텔 왕국까지 닿는 거리를 감안하면 아무리 빨라도 2개월.
그 시간 안에 대비책을 세워둬야만 했다.
“후우….”
보른과 두 직원이 기사들에게 연행되어 공작 저택을 완전히 나가는 것을 창문 너머로 확인한 엘레노아가 테이블 의자에 앉아 큰 한숨을 늘어놓았다.
제법 무거운 건수를 해결하자마자 그동안 잔뜩 유지하고 있던 긴장을 풀었다.
릴리가 따라준 홍차를 한 차례 마시고는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천장을 응시했다.
“오늘따라 그 사람이 보고 싶네….”
은현이 복귀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 바로 상의를 하고 싶은 마음을 입 밖으로 표현했다.
“…그렇네요.”
그리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남편의 얼굴을 그리워하는 것은 엘레노아 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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