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607화 (590/730)

〈 607화 〉 607. 성녀와 악녀(2)

* * *

은현의 아내들 중에서, 사실상 가장 인자하고 온화한 여성은 엘레노아와 릴리다.

자신의 사람이 아니면 철저하게 무관심과 방관으로 임하는 일리아나나, 아직 은현의 생각과 결정에 의존하는 성향이 강한 에린과는 달리, 엘레노아와 릴리는 사회적으로 약자인 많은 사람을 돕고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성향이 몹시 강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악인이나 불합리한 힘을 휘두르는 이들에 대해서 가차 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두 사람이었다.

엘레노아나 릴리나, 두 사람 다 각자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사람의 추악한 면모를 신물 나게 겪어보았던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엘레노아는 부패한 귀족들이 가득한 페르니아스 왕국의 내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착취하고 목숨을 빼앗는 모습을 보아 왔었다.

릴리는 아버지의 도박 중독으로 노예로 팔려가면서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와도 떨어지게 되고 끝에는 흑마법사의 실험 노예로 전락하게 되어 악마가 되는 인생의 나락을 경험했다.

어느 쪽이 더 불쌍한가, 어느 쪽이 더 심각한 꼴과 경험을 해보았는가를 제쳐두고서라도, 그러한 경험을 했었던 두 사람은 이 세상에 악한 인간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엘레노아와 릴리는 아르미타스 공작령에서 몰래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알테리아 상회의 사람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릴리가 서큐버스로 본모습을 드러내고 능력을 발동시키자, 대상으로 지정되었던 세 사람은 모두 얼이 빠진 상태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긴…?”

“갑자기 무슨….”

“우리는 저택에 있었던 게…?”

엘레노아의 초청을 받아 수준 높은 코스의 만찬을 즐기고 있었던 차, 갑작스러운 엘레노아의 선전 포고와 함께 뒤바뀐 배경에 보른과 두 직원은 아직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보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자신들이 만찬을 즐겼던 테이블이 있던 방은 사라지고, 어느새 주위는 빛 한점이 들어오지 않는 새까만 어둠이 가득한 독방이었다.

어둑한 분위기의 독방 내부를 밝혀주는 것은 중간중간 설치된 횃불의 불빛들뿐.

만찬을 즐겼던 식사 테이블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의자에 앉아 있던 엘레노아와 보른과 알테리아 상회의 두 직원의 시선이 마주쳤다.

으스스한 찬 공기가 자신들의 주위를 가득 채우자 보른과 두 사람은 자연스레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갑자기 어째서 주위의 배경이 일변했는지를 엘레노아에게 따지고 물으려던 찰나, 릴리가 보른의 말을 끊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온 릴리의 싸늘한 목소리를 들은 보른이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렸다.

또각거리는 힐의 구두 소리를 흘리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는 릴리의 모습은 아까까지 보았던 아름다운 메이드가 아니다.

허리 부근에서 펼쳐진 한 쌍의 검은 날개.

여성의 중요 부위만을 가리고 있어 속옷만 착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정적인 의상.

머리의 양쪽에 달린 한 쌍의 산양 뿔.

이윽고 보른은 본 모습을 드러낸 릴리의 정체를 추측했다.

“설…마…. 악마…?”

“…….”

릴리는 보른이 입에 담은 추측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무감정한 시선으로 세 사람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

보른은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굳이 정체조차 숨길 생각이 없는 엘레노아와 릴리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베스타 신전의 사제가…! 악마와 결탁을 하고 있었다니…!”

베스타 신전을 믿는 신자들이나, 다른 이들로서는 정말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엘레노아는 차기 성녀라는 지위까지 내정된 인물로 베스타 신전 안에서는 현재 교황이나 다른 대주교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뒤에서는 사실 악마와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은 페르니아스 왕국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매장을 당하는 것은 물론, 베스타 신전조차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폭탄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당당하게 밝힌 것이나 다름이 없는 엘레노아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도 기품이 넘치는 고귀한 태도를 보이는 그녀는 오히려 보른을 보고 비웃었다.

“인간만도 못한 짓들을 일삼고 있던 너희에게 듣고 싶지 않은데.”

“건방진…!”

갑작스럽게 모욕을 당한 보른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여신을 모시는 사제가 어찌하여 악마와 결탁하실 수가 있는 겁니까!”

냉소 어린 엘레노아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어진 한 알테리아 상회의 직원 한 명의 추궁은 확실히 정당했다.

하지만 저 추궁을 하는 것이 자신의 영지로 피난 온 난민들을 핍박하고 자신의 영지민들의 돈을 부당하게 착취한 사람들이라는 게 가소롭기 짝이 없다.

릴리의 존재는 이미 베르단디와 은현의 중개로 신계에서도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악마.

아무것도 모르는 저들에게 추궁을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릴리.”

“네. 작은 마님.”

엘레노아의 짧은 부름에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고 있다.

더는 언성을 높인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을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으니까.

릴리는 곧바로 그들의 두 눈에 환술을 걸었다.

“크아악!”

“살, 살려…!”

“끄아아!”

너무나도 허무하게 환술에 걸려버린 보른과 두 직원이 비명을 질렀다.

세 사람이 지금 겪고 있는 것은 전신이 불태워지는 화형의 체험.

피부가 익고 살을 통째로 익혀버리는 고온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육체는 마치 의자에 결박이라도 된 것처럼 고통에 몸부림을 치지 못하고 있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그 고통은 악마의 능력으로 정신에 강제로 주입된 것.

저항도, 도망도, 불가능한 그 고통의 감도는 심지어 몇 배는 강하도록 조작해두었다.

마침내 세 사람이 정신에 주입된 고통에 정신을 잃은 듯 두 눈에 흰자위를 들어내며 기절했다.

“허, 허억…!”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보른이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전신이 불태워지는 것만 같았던 강력한 고통의 여운에 움직이지 못하는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크윽….”

보른은 도대체 뭐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까 전 느껴졌던 고통의 원인이 현재 싸늘한 시선으로 자실을 내려다보고 있는 악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째서 몸이….’

마치 자신의 몸이 돌이 된 것처럼 손가락을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려 하면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강하게 잡아당겨 힘을 실으려는 것 자체를 방해한다.

외부의 요인으로 자신의 움직임을 강압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 안에서 힘 자체가 실리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보른은 이 상황이 지속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게다가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 엘레노아와 릴리가 관여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에 꺼림칙하다.

“지금부터 당신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보른은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릴리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멍한 표정을 짓던 그는 붉은색 기운이 요동치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무언가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파고들어 강제로 어떠한 감정을 심어놓는 것만 같은 기묘한 위화감.

그것은 릴리가 가지고 있는 ‘몽마의 마안(??)’이다.

“만약 제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다시 한번 자신의 전신이 불태워지는 그 격통을 느끼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한 보른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 알았습니다! 알겠다고요!”

보른의 굴복은 생각보다 순종적으로 빠르게 이어졌다.

몸은 움직일 수 없고, 고통에는 저항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귀족의 저택 내부를 으스스한 감옥으로 바꿔버리고 고통을 선사하는 영문 모를 힘을 발휘하는 악마를 상대로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 배후 세력의 힘을 통해서 얼마든지 상대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지금 보른은 무력하게 저항하지 못하는, 그 전신이 불태워지는 고통을 또 느끼고 싶지 않았다.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기절한 알테리아 상회의 두 직원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상태.

릴리는 그렇게 굴복한 보른을 보며 물었다.

“이름.”

“…보른 알테리아.”

“아르미타스 공작령에 온 이유는?”

“큰 돈을 벌기 위해서….”

릴리의 질문에 순순히 답하고는 있었지만, 그 대답들이 굉장히 단편적으로 정보를 얻기엔 좀 힘들었다.

릴리는 질문의 내용을 상세하게 나누었다.

“공작령 안에서 해온 불법적인 짓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말씀하세요.”

보른은 아르미타스 공작령으로 와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 상회의 자본을 불릴 수 있었는지 낱낱이 설명했다.

공작령으로 온 피난민들을 속여서 노예로 만들어 팔거나, 영지민들에게 대부업으로 꼬드기고 감당하기 힘든 불합리한 이자를 이용하여 착취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상회와 상인들을 무너뜨리고 배제하여 물건을 독점하여 가격을 공급자의 마음대로 주무르는 등.

하나같이 악랄한 수법들이었다.

“네 뒤에, 누가 있는 거지?”

이윽고 엘레노아가 보른에게 물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보른은 그저 큰 규모의 상회를 가지고 있을 뿐인 외국인이자 평민에 불과한 몸.

그런 그가 아르미타스 공작령에 눈독을 들였다고는 하더라도 그 욕심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에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자본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어쩌면 그 자본조차도 제공하면서 알테리아 상회를 전면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어 아르미타스 공작령에 혼란을 주려는 배후 세력이 반드시 존재할 터.

“그건….”

지금까지 릴리의 질문에 모조리 술술 불고 있었던 보른이 처음으로 엘레노아의 질문에 막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을 말한다면 틀림없이 자신의 목숨은 사라져버리게 될 것이 뻔하니 주저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엘레노아는 그렇다고 봐줄 생각이 없었다.

“릴리.”

“네. 작은 마님.”

엘레노아의 부름에 답한 릴리가 다시 ‘몽마의 마안’을 발동시켜 보른에게 극심한 고통을 선사했다.

“크아아악!”

하지만 이번에 릴리가 설정한 고통은 처음 선보였던 전신이 불타는 고통이 아니었다.

릴리는 보른이 정욕에 물든 음침한 시선으로 엘레노아를 보고 있던 그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설정한 고통은 사나운 짐승에게 보른의 고간 사이가 사정없이 뜯어먹히는 것이다.

실제의 육체에는 아무런 위협도 가해지고 있지 않지만, 서큐버스의 힘을 통해서 보른이 느끼고 있는 환각은 실제에서 느끼는 통각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크…으으윽…!”

“두 번 말하지 않아. 네 뒤에 있는 게 누구인지 말해.”

“이런 짓을 한다고…. 소용없어!”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한 보른이 언성을 높이며 엘레노아와 릴리를 죽일 듯이 쏟아보았다.

“나를…. 이렇게 하고도 너희가 무사할 것 같으냐!?”

전신이 불태워지고 하반신의 고간 사이가 사정없이 물어뜯기는 고통에 이성을 잃어버린 보른은 엘레노아와 릴리에게 더는 존재를 하지 않았다.

“설마, 내가 준비도 없이 이곳에 왔을 거라 생각한 건가!?”

“…무슨 말이야?”

이성의 끈을 놓아버려 신경질적으로 변한 보른의 말에 엘레노아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모험가들을 고용하여 이미 공작령 소유의 대규모 농장지대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을 내려두었다.”

“…….”

본래라면 보른의 계획은 농장지대에서 조만간 수확 예정인 작물들이 화재로 모조리 불태워지면서, 영지민들과 난민들을 모두 챙길 수 없는 식량난이 일어나는 것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대규모의 식량들을 제공하면서 공작령의 재정을 순간 휘청이게 만들고 거기서 대부업을 제안하여 이자율로 공작 가문에 빚을 지우게 만들려는 것이 본래의 계획.

예정과는 틀어져 버렸지만 보른은 지금 자신이 살기 위해선 이것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날 풀어준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모험가들에게 계획의 취소를….”

“알고 있어. 그것도.”

“뭐…라고?”

하지만 담담한 반응을 보이는 엘레노아의 얼굴을 보고, 보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흑랑단을 통해서 알테리아 상회와 보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은 엘레노아는 최근 보른이 모험가들로 구성된 한 길드를 고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철호단이라는 길드의 모험가들을 고용했다지?”

철호단이라는 길드는 이전 공작령 안에서 사기꾼들을 이용하여 초보 모험가들에게 접근해 싸구려 무기를 비싼 값에 강매시켰던 악질적인 모험가들의 집단.

하지만 철호단 길드는 에린과 엘빈 두 명과 충돌하면서 그 사기행각들이 낱낱이 밝혀졌고 아르미타스 공작령에서 퇴출당한 길드였다.

알테리아 상회가 이번 자신들의 계획에 아르미타스 공작령에 앙심을 품고 있는 그 길드를 끌어들인 것이다.

“네 그 협상은 안 통해. 이미 그 길드와 당신의 상회는 끝났거든.”

“그…게 무슨….”

보른은 엘레노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어째서 초청날짜를 오늘 저녁으로 적어서 보냈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것 같네.”

그것은 어찌 보면 보른과 같은 의도이기도 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엘레노아와 있으면서 시선을 끌고 있는 사이, 뒤에서는 철호단이 농장지대를 모조리 불태우는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엘레노아도 알테리아 상회를 치기 위해서 상회주인 보른을 이곳에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건실한 상회로 포장하여 운영하는 알테리아 상회를 치기에는 아직 명분들이 부족했다.

서류로 제시했던 악행들은 모두 정황들뿐.

명확한 죄목과 증거가 부족한 이 상황에서는 아르미타스의 기사들을 보내어 체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엘레노아는 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그냥 일을 저지르기로 결심했다.

대외적으로 공작령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신원불명의 누군가에게 알테리아 상회와 철호단이 모조리 망해버리는 심플하지만 허무한 이야기.

“지금쯤이면 모두 끝나셨겠지.”

엘레노아가 이번에 특별히 부탁을 드린 인물은 자신의 남편인 은현도 인정한 최고의 검사였다.

보른과 두 직원이 초청을 받아 공작 저택으로 온지 약 1시간.

‘그녀’가 철호단 길드와 알테리아 상회를 박살 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으리라 엘레노아는 확실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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