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6화 〉 606. 성녀와 악녀(1)
* * *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에 식사 초청을 받은 인물은 총 세 명.
알테리아 상회의 주인인 상회주, 보른 알테리아와 그를 보조하는 두 명의 직원들이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여성이군.’
보른은 엘레노아의 모습을 처음 대면한 순간, 소문은 그저 소문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문보다도 더하다.
자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단정하게 차려입은 새하얀 드레스는 엘레노아의 화사한 금발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그녀의 눈색과 같은 색깔의 영롱한 루비가 세공된 펜던트는 그녀의 미모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엘레노아의 외모는 굉장히 청초하면서도 세련되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넋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서 돌고 있는 ‘페르닌의 꽃’이라는 별명은 역시나 괜히 지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정도였다.
화장한 밝은 피부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미소는 많은 사람을 끌어안고 구원하는 자애로운 사제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어째서 차기 성녀라고도 불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납득하게 되었다.
‘반드시 내 아내로 만들도록 하겠어.’
보른은 원래 엘레노아라는 여자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명예와 권력, 그리고 그 명예와 권력을 휘두르며 챙길 수 있는 막대한 부였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보른에게는 엘레노아라는 여자는 그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며 장식품 수준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엘레노아와 대면한 순간, 보른은 엘레노아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얼굴, 그녀의 몸, 그녀의 목소리, 태도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귀족의 기품과 우아함은 남성으로서의 정복욕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그런 남자의 시선을 엘레노아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이제는…괜찮네.’
자신을 두고 천박한 생각을 하는 그 시선은 이전부터 수많은 귀족이 자신에게 보내왔던 익숙한 시선들이다.
예전에는 저 시선이 몸서리가 쳐질 만큼 싫었고 경멸할 정도였지만, 지금의 엘레노아는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예전의 자신은 도대체 왜 저 시선들에 몸을 떨었던 걸까.
엘레노아는 그것이 너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 덕분이겠지.’
자신의 애원 끝에 마음을 전달했고, 끝내 마음을 받아준 은현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도 저 시선들이 두려워 몸을 떨어야만 했으리라.
엘레노아의 아버지인 아브로스는 엘레노아의 계획을 듣고 자신이 나서주겠다고 했지만, 엘레노아는 웃으면서 아버지의 호의를 거절했다.
이것은 영주 대행인 자기 일이라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눈부신 외모와 공녀, 사제라는 직함 때문에 페르니아스 왕국 안에서 많은 남성의 관심을 받아왔던 것을 부담스러워 했던 딸이 어느샌가 성장하여 훌륭하게 영주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에 아브로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물러났다.
그렇게 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과 자신의 영지, 가문을 집어삼키려는 자를 눈앞에 두고, 엘레노아는 애써 가면을 쓰듯 얼굴에 웃음을 그렸다.
세 사람은 현재 공작 저택의 테이블에서 엘레노아를 앞에 두고 최고로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대접받고 있었다.
“입에는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싫은 상대라도 웃으며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사교계에서는 기본적인 스킬과도 같았던 엘레노아는 능숙하게 가면을 쓰듯 기대하는 표정을 연기했다.
“하하! 정말로 맛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수준 높은 요리라니!”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칭찬을 늘어놓는 알테리아 상회 쪽 사람들의 반응은 거짓이 아니었다.
순서대로 나오는 전채 요리들의 수준도 수준이지만, 제일 놀라웠던 것은 메인 요리로 나온 스테이크다.
포크를 튕겨낼 듯한 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이프로 쉽게 잘려나가는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는 스테이크 한 조각이 입속으로 들어온 순간 순식간에 녹아내리며 사라져간다.
입안에 도는 감칠맛과 향은 그 부드러운 식감에 더해져 식욕을 자극하니 계속해서 다음 조각을 입안에 넣게 되는 중독성까지.
상인으로서 활동하고 상회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음식과 식재료들을 맛보아왔지만, 이토록 뛰어난 수준의 스테이크는 그간 먹어본 적이 없었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이것을 모두 저 메이드분이 혼자서…?”
상회의 직원 한 명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엘레노아의 옆에 서 있는 릴리를 응시했다.
“네. 저희 메이드가 세 분에게 대접하기 위해 아침부터 일찍 고기를 재우면서 준비했습니다.”
“정말로 대단하군요.”
“송구합니다.”
릴리는 직원의 감탄에도 담담히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담백한 반응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신상이 궁금해진 직원이 계속해서 릴리에게 말을 배웠다.
“혹시 이 저택에서 일하시기 전에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제가 요리를 배운 것은 이 저택에서 일하게 된 다음부터입니다.”
“이럴 수가…. 공작 가문에서는 메이드의 교육이 엄청난 수준이군요.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저희 저택의 모든 메이드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릴리가 조금 더 열성적으로 요리를 배웠을 뿐이죠.”
요리뿐만이 아니다.
릴리는 공작 가문의 메이드장에게 직접 교육을 받으면서 모든 교육을 소화했고 요즘 메이드장은 릴리가 공작 저택에서 일하지 않는 것에 매우 아쉬워했다.
릴리가 모시고 싶은 주인은 은현이었지 공작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확고한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메이드장이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의 식사를 챙겨드리기 위해서는 웬만한 수준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으니까요.”
“하하! 정말로 공녀님을 생각하는 메이드로군요!”
보른은 스테이크의 식감을 맛보며 삼키고는 감탄하며 칭찬 일색을 늘어놓았다.
릴리는 은현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마음가짐을 설명한 것이었지만, 보른은 그것을 은현이 아닌 엘레노아를 두고 한 말로 이해하고 있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릴리는 자신에게 보내오는 호의에 답하듯, 칭찬한 알테리아 상회의 직원을 보고는 미소지었다.
“아….”
그 미소가 너무나도 고혹적이어서, 직원은 무심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저 메이드라기엔 너무나도 미색이 아름답고 훌륭하다.
자신의 마음속 무언가를 강제로 끌어당기는 듯한 강렬한 무언가.
무심코 릴리가 흘려버린 서큐버스의 고혹적인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평범한 일반인에게는 릴리가 흘린 마력은 마성(??) 그 자체다.
“자아, 그러면 식사도 끝냈으니.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 보도록 할까요?”
메인 요리의 식사가 마치고, 마지막 디저트로 음료가 나오자 엘레노아가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보른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자신의 앞에 놓인 홍차를 마시며 음미하던 보른은 웃으면서 엘레노아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보른의 목적은 이미 결혼한 엘레노아를 빼앗으면서 공작 가문과 공작령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것.
하지만 여기서 그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엘레노아가 현재 공작령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알테리아 상회를 초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보른의 계획은 장기적으로 봐야 했으며, 지금은 친분을 쌓아가는 것으로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보른은 이번에 엘레노아가 자신을 초청한 이유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돕고 살자.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조만간 저희 공작령에 설립될 예정인 학교의 건설에 지원을 명목으로 기부를 해주셨더군요. 그리고 보육원들의 후원까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하하! 뭘 그 정도를 가지고 그러십니까! 영지가 발전하게 되면 그만큼 저희 상인들도 이득을 보는 것이 있을 테니까요. 너무 마음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넉살 좋게 웃으며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지만, 보른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엘레노아의 말을 해석하고 있었다.
‘역시나.’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확신과 함께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엘레노아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능력 있는 상인이라는 것을 어필해야만 했다.
“그런 알테리아의 상회주님께, 제가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홍차의 맛을 음미하던 엘레노아가 단번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분위기를 잡자, 보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지요. 제가 가능한 선에서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이 영지에서 나가주세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밝은 목소리와는 다른, 싸늘함이 가득한 엘레노아의 말로 인하여 테이블의 분위기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보른과 다른 알테리아 상회의 직원 둘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벙찐 표정으로 엘레노아와 릴리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급작스러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보른이 재차 물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이 영지 안에서 당신들의 상회가 벌이고 있던 일. 설마 제가 모를 줄 알았나요?”
가면을 쓰듯 온화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엘레노아의 얼굴이 어느샌가 싸늘한 냉기를 풍기고 있다.
이윽고 릴리에게 손짓하며 그녀를 불렀다.
“릴리.”
“네. 작은 마님.”
따로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릴리는 엘레노아가 무엇을 요구했는지를 알아들었고 곧바로 미리 마련해두었던 서류뭉치들을 가져와 엘레노아의 테이블 옆에 올려두었다.
보른과 두 직원은 그 서류뭉치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는커녕 갑작스러운 엘레노아의 분위기 전환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이 영지 안에서 당신의 상회가 해왔던 불법적인 일들입니다.”
그 내용은 무연고자나 고아인 난민들을 대상으로 좋은 말로 구슬린 뒤 노예로 만들어 팔아버린다거나, 영지민들을 대상으로 대부업을 하면서 불합리한 이자로 착취를 하거나, 죄목이나 죄질도 상당히 다양하다.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동시에 대량의 인구 유입으로 불안전해진 공작령의 치안을 틈타, 영지 안에서 사회적인 약자들을 대상으로 철저히 농락하여 고혈을 빨아먹으면서 그 자본금을 더욱 크게 불려온 알테리아 상회의 악질적인 행동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잘도 이런 짓을….”
영주 대행으로서 영민들이 조금이라도 더욱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오고 있었는데.
자신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구석의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불합리한 일에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영민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직시했다.
엘레노아는 분노로 주먹을 꽉 쥐며 알테리아 상회의 보른과 두 직원을 지금 당장이라고 처리하고 싶다는 듯 살기를 내뿜었다.
그 눈빛이 너무 살벌해서 세 사람이 순간 움찔했을 정도다.
온화한 성녀의 눈빛이 아니었다.
‘X발. 어떻게 알았지?’
보른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끼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상회를 통해 착취해온 돈들 대부분은 공작령에서 미처 돌보지 못하고 있는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난민들이나, 하루 일해서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며 풀칠하기 바쁜 약소 계층들만을 중점적으로 조용히 노려왔다.
여태껏 들키지 않고 잘 해오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느 시점부터 엘레노아가 눈치를 챈 것인지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보른은 일단 애써 당황을 숨기고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뭐라고?”
“저희는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이런 모함을 받는 건…. 조금 불쾌하군요.”
오히려 강하게 나가며 맞불을 놓는 작전으로 나간다면, 공작 가문 측에서도 바로 알테리아 상회를 처벌하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그 전에 저 서류들이 조작된 것이라는 걸 주장할 수 있도록 증거와 증인들을 모조리 인멸만 한다면, 적어도 큰 위기 상황은 피할 수가 있다.
“하, 증거?”
하지만 엘레노아는 가소롭다는 듯 보른을 비웃었다.
“증거따위는 필요 없어.”
“…뭐라고요?”
“너희들이 스스로 자백을 인정하면 되니까.”
“그게 무슨….”
자신들이 머저리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자신들의 상회가 저지른 짓을 인정할 리가 없다.
“어째서 이곳에 지금 나와 릴리. 그리고 너희 셋밖에 없는지 알아?”
“…….”
보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이 넓디넓은 방안에는 엘레노아와 릴리, 자신들 셋을 제외하면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호위를 위한 기사들은 물론 저택의 사용인들까지도 물린 줄 알았는데, 여성 단둘이서만 이렇게 응대를 하다니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아무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야.”
“무슨 말장난 같은걸…!”
더는 어울려 줄 수 없겠다고 생각한 보른이 거칠게 자리에서 박차며 일어나려 했지만.
[움직이지 마.]
“큭!?”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몸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으면서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사, 상회주님?”
그런 보른의 행동이 이상했는지, 두 직원이 보른을 불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앉아.]
귓가에 들려오는 이상한 목소리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보른은 마치 몸의 제어가 빼앗긴 것처럼 무력하게 다시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상회주님! 왜 그러시는…!”
[입 닫아.]
“읍!? 으읍!?”
입조차 열 수 없게 되자, 그제야 보른과 두 직원의 얼굴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로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원인으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눈에 보이는 어떠한 존재를 보고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엘레노아의 옆을 지키고 있던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메이드가 천천히 세 사람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전신을 감싸고 있던 단정한 메이드복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여성의 중요 부위만을 가릴 뿐인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고혹적인 의상으로 뒤바뀌어 간다.
보른과 직원들이 가장 놀랐던 것은 그녀의 허리 부근에서 나타난 한 쌍의 검은색 날개였다.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그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릴리는 일리아나의 조언으로 서큐버스의 힘을 개선하여 성장시킨 자신의 고유능력을 발동시켰다.
[릴리 고유능력]
[진실의 방]
서큐버스로 본모습을 보인 릴리가 입을 열었다.
“작은 마님의 명령으로, 당신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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