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5화 〉 605. 상회 경쟁(2)
* * *
“조건….”
도지는 엘레노아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선뜻 그녀의 제안에 승낙의 의사를 밝히길 주저했다.
자신과 비트를 거둬준 상사이자 은인인 지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현재 공작령의 영주 대행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엘레노아의 평판은 영지민들 사이에서 매우 좋았지만, 도지는 그 의견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허울뿐인 마피아 조직의 말단 조직원이었던만큼 귀족들이라는 것들의 본성이 얼마나 추하고 이기적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고위 귀족 가문의 일원.
이것을 빌미로 자신이나 비트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도지는 긴장한 표정으로 엘레노아에게 물었다.
“조건이…뭔지 먼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름과 정체를 숨기고 공작령 내부에서 상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직접 공작 가문 저택을 약속도 없이 찾아와 무례한 부탁을 하고 있다는 입장은 자각하고 있었다.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도지는 조건의 내용을 먼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무리 약소한 상인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불리한 계약은 맺지 않겠다는 상인으로서의 마음가짐과도 같다.
“다음부터는 아랫사람을 보내지 말고 본인이 직접 찾아오라고 전해.”
“…네?”
하지만 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인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적잖게 당황한 것은 옆에서 대화를 함께 듣고 있던 비트 또한 마찬가지다.
“이해하지 못했어? 다음부터는 이런 번거로운 일이 생기면 직접 찾아와서 얘기하라고 지스에게 전하라고.”
“이, 이해는 했습니다. 하지만….”
조건으로 내걸 정도의 수준조차 되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이것을 구태여 어째서 이렇게 조건으로 제시하는 엘레노아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온다면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어. 그 사람과 우리 남편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엘레노아는 억지로 알테리아 상회와 경쟁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으려 몸을 사리는 지스의 생각을 추측했다.
‘보나마나 이런 거로 도움을 요청하기엔 너무 사소하다는 생각이겠지.’
은현과 지스의 첫 만남은 빈말로라도 그렇게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과거를 청산하고 은현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좋은 인연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
그 기회를 마련해준 은현에게 더는 도움을 받기에 꺼려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은현이나 공작령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지스는 장사수완이 굉장히 좋은 편이지만, 그와 달리 성공이나 명예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저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타입에 가깝다.
배포가 굉장히 작은만큼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는 그 성격이 이번에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이유다.
엘레노아는 옆에서 시선을 느껴 슬쩍 옆을 흘끗 바라보았고 자신을 보며 작게 웃고 있는 릴리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다.
엘레노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나.’
엘레노아는 이전에는 전직 사기꾼이었던 그를 믿기엔 꺼려졌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가 아르미타스 공작령 내부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보여준 성실한 모습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와 첫 만남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해서, 지스가 최근까지 보여준 모습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영주 대행으로서 상인들 사이의 분쟁이나 경쟁은 엘레노아가 나서기 껄끄러운 부분이 있는 건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 너희들의 행보도 지켜볼 거야.”
엘레노아는 작게 경고의 의미를 담아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것은 혹시라도 공작령이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보인다면, 그때는 자비 따위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
상인으로서 눈치가 빠른 두 사람은 엘레노아의 그 경고를 바로 알아들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판사판의 도박수와도 같았던 행동이었지만, 정말로 기적적으로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정이 났다는 확언을 받은 비트와 도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제 나가보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감사의 의미를 담아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엘레노아의 퇴실 명령에 두 상인은 잽싸게 집무실을 나갔다.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지만, 아직도 적의가 서린 저택의 사람들과 기사들의 시선을 감당하기엔 몹시 부담스러웠는지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저택을 완전히 나갔다는 보고를 받자 엘레노아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작은 마님.”
릴리가 곧바로 테이블 위에 세팅해두었던 찻잔에 다시 따뜻한 홍차를 따랐다.
“…릴리.”
“네.”
“네가 운영하고 있던 보육원에 후원하고 싶다고 했었던 곳. 알테리아 상회 맞지?”
“네. 맞아요.”
릴리는 엘레노아의 물음에 긍정했다.
선의로 후원을 하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개 상인이라는 이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단체들로 아무런 의도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비트와 도지의 말대로 그들이 공작령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규모의 상단과 상인들을 닥치는 대로 영입해가며 몸집을 불려가고 있는 와중에, 보육원에 후원이라는 것을 명목으로 의미 없는 돈을 뿌리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봐도 눈길을 끌려는 움직임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엘레노아의 눈에는 그저 공작 가문에게 알테리아 상회라는 존재를 강하게 각인시키고 접근하고 싶어 하는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은현이나 자신, 릴리처럼 정말로 선의로 사람들을 돕고 싶어 하는 이들이 아예 없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머릿속에 생긴 의구심을 털어낼 필요성은 있다.
“흑랑단에 연락해서 알테리아 상회를 조사해 보라고 해. 공작령에 들어온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행적들 싹 다.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엘레노아는 현재 에린과 함께 자리를 비운 은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보고 싶네.”
“네. 저도요.”
엘레노아의 작은 중얼거림에, 릴리도 동의한다는 듯 미소지으며 호응했다.
지금도 보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영지의 내정을 탄탄히 정비하는 공작 가문의 사람으로서 역할을 완수하는 공녀로서의 책임을 우선시해야만 했다.
“…일하자. 그 사람도 지금 열심히 하고 있을 테니까.”
“네.”
◆ ◆ ◆
“상회주님! 공작령 측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부하 직원의 이야기를 들은 알테리아 상회의 상회주, 보른 알테리아는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왔군.”
기다리고 있던 서신을 부하에게서 받은 보른은 곧바로 공작 가문의 봉랍인이 찍힌 서신을 뜯었다.
서신에 적혀 있는 내용은 보른의 예상대로, 최근 공작령 안에서 눈에 띄는 상업활동을 하는 중인 알테리아 상회의 주요인물들을 공작 저택 안으로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 그래야지.”
보른은 자기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서신을 받기 위해서,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영주 대행 엘레노아 아르미타스와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거금을 쏟아부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거래처의 물품을 반값에 후려쳐 대량으로 구입하고, 싼값에 사람들에게 판매하여 손해 보는 장사를 하면서 많은 경쟁 상단과 상인들을 말려 죽이는 치킨 게임이 장기간 이어진 결과.
많은 이들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알테리아 상회 밑으로 흡수되어 왔다.
현재 알테리아 상회는 중소 규모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상회 몇몇을 제외하면선 이쪽 지역에서 가장 큰 덩치와 자본을 가진 상회로 자리 잡았으며, 대규모의 이득과 부가 집중되고 있는 아르미타스 공작령 안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로 커졌는데 공작 가문 측에서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을 터.
그 결과로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에서 취한 조치가 바로 알테리아 상회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이거…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거 아닌가요?”
“큭큭! 그러면 좋은 거 아니겠냐?”
보른은 서신을 가져온 부하 직원의 말에 킬킬거리며 웃으면서 서신의 내용을 계속해서 읽어나갔다.
서신에 적힌 초청의 날짜는 바로 오늘 저녁.
이제 막 점심시간이 지난 지금부터 준비하기엔 시간이 많이 빠듯했다.
“급하기도 하셔라. 하하. 그렇게도 내가 보고 싶으셨나?”
보통 초청장을 전달하고 이후 정확한 초청 날짜는 약 3일에서 7일 뒤 사이로 준비하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초정받은 사람들도 적잖은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고, 초청하는 입장의 공작령 측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테니 그만한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엘레노아는 초청장을 보낸 당일, 곧바로 시간을 비울 테니 당장 만나자는 의사를 전달해왔으니 웃음이 나올 법도 했다.
상회주 보른 알테리아는 이렇게 급하게 약속 날짜를 잡는 것은 상인들 사이에서도 무척이나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그만큼 자신의 상회가 공작령 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자신을 만나고 싶다는 것으로 엘레노아의 의중을 해석했다.
“이제 정말로 머지않았군.”
보른은 이 노른자 같은 공작령을 자신의 손아귀에 담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되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음흉한 상상을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서신을 보낸 엘레노아의 모습을 상상했다.
“듣기로는 페르니아스 왕국에서 제일 가는 절세의 미녀라고 하던데.”
게다가 영지민들의 신망도 두텁고 아르미타스 공작도 스스로 일선에서 물러나 일을 맡길 정도라고 하니 딸인 엘레노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점점 욕심이 났다.
게다가 베스타 신전에서 공인한 차기 성녀로서의 지위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을 두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외모면 외모, 능력이면 능력, 사회적인 지위까지 무엇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그녀에게 있는 유일한 흠이라면, 엘레노아가 혼인을 했다는 점이었다.
“큭큭, 그게 뭐 대수라고.”
보른은 엘레노아의 혼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조사해본바로는 현재 대외적으로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보잘것없는 신분의 평민.
하지만 그 이상의 조사를 이어나가면 나갈수록 엘레노아의 남편인 은현에 대한 이야기는 괴상한 소문 뿐이었다.
엘레노아 뿐만이 아니라, 검은 마녀라고 불리는 일리아나 케니퍼, 2년 만에 금위계 모험가라는 등급을 쟁취한 에린 헤르샤와도 결혼을 했다.
왕국 최고의 기사라고 불리우는 리오드 올리비온과 친구 사이이며 떠도는 소문으로는 그보다 강하다.
현재 페르니아스 왕국의 부패 귀족들을 싹 다 척결하고 유리아 페르니아스 왕녀를 차기 여왕으로 옹립시키는데 일조시킨 인물.
그러면서 정작 그 소문의 실체인 남자는 아르미타스 공작령 안에서 모습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알게 되는 것들은 뜬구름을 잡는 듯 이해할 수 없고 진위를 확인할 수조차 없는 괴상한 소문들뿐.
“아내가 세 명이 넘고, 그 리오드 올리비온과 친구 사이? 게다가 유리아 왕녀를 차기 여왕으로 옹립시키는데 일조한 인물이라고?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딴 걸 평범한 평민 인간이 어떻게 다 이뤄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도저히 평범한 평민 신분의 인간이라고는 생각이 되지가 않아서, 보른은 그 소문을 과장된 허구라고 치부해버렸다.
“뭐, 아무렴 어때. 문제가 생긴다면 그분이 알아서 해결해주시겠지.”
엘레노아의 남편인 은현이라는 남자의 소문이 설령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보른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갈 수 있는 데는 자신의 뒤에 든든한 뒷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보른의 머릿속은 현재 아르미타스 공작령과 함께 그 실권자인 엘레노아를 가질 욕심으로 가득 차 있어 다른 요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미 혼인을 한 여자라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 정도는 감안을 하더라도 충분히 가져야 할 가치가 있는 여자다.
“자아, 그러면 나의 미래 아내를 뵈러 한 번 가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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