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3화 〉 603. 겨우살이(4)
* * *
까아앙!
대장간을 가득 채우는 망치의 청명한 울림이 에린의 귓가를 때린다.
감각이 예민한 만큼 다른 이들보다 강렬한 충격이 귀를 덮쳐왔지만, 어느샌가 에린은 대장간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소리의 폭력에 적응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것보다 작업을 우선시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이다.
두 눈앞에서 강렬한 열기를 품고 있는 오리하르콘에서 에린은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에린의 역할은 은현이 온전히 망치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것이었다.
까아앙!
불카누스의 망치를 내려치자마자, 그 충격을 모조리 흡수한 오리하르콘의 진동이 고정된 모루를 타고 에린의 양손에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진동에 에린이 순간 오리하르콘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던 끈을 놓칠 뻔했을 정도다.
에린은 주먹을 꽉 쥐며 끈을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잡았다.
“이봐! 화로의 온도가 떨어졌어! 장작 좀 더 태워!”
오리하르콘을 두들기는 망치의 울림이 가득한 가운데, 한 드워프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대장간의 열기는 이미 평범한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영역의 수준을 넘어섰다.
에린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폐 속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공기에 갑갑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열기로 인해 배출된 땀은 그대로 작업복으로 입고 있는 민소매 셔츠를 적시고 다시 증발시키길 반복했다.
까아앙!
망치를 두들기는 경쾌한 쇳소리는 어느새 귀를 괴롭히는 소음이 아니게 되었다.
“4시간 지났소! 교대요!”
정해진 시간이 되자 다른 작업을 몰두하는 드워프들은 다음 순번의 대장장이 드워프와 교대했다.
피로가 누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으나, 마을 안에서 손꼽히는 그들이 이 작업에서는 보조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드워프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려 천일야장의 무기 제작에 보조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대를 하면서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웠다.
“야장께서는 정말 대단하시군!”
“그러게 말일세! 어떻게 16시간을 연속으로 저렇게 망치를 두들길 수가 있단 말인가!”
망치를 두들기는 은현의 놀라운 체력도 체력이지만, 정확한 부분을 두들기는 그의 기술이나 특별한 망치의 능력도 놀랍다.
게다가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런 은현을 계속해서 보조하고 있는 에린이다.
“심지어 야장의 신부께서도 정말 대단하시군.”
“어떻게 인간의 몸으로….”
“역시 야장께서 고른 신부는 신부다 이건가.”
에린 역시 계속된 작업과 열기로 체내의 수분은 모조리 빼앗기고 반대로 피로는 누적되고 있었지만, 악착같이 은현의 보조를 계속 이어나갔다.
어느샌가 다시 드워프들의 교대 시간이 찾아오자, 은현은 몇십 번이나 두들긴 오리하르콘을 화로 안에 던졌다.
다시 금속이 달구어지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은 연속된 작업으로 지친 몸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현아. 자.”
짧은 휴식 시간이 또다시 주어지자, 에린이 잽싸게 밖으로 달려나가 미리 준비해둔 물통과 빵을 가지고 은현에게로 다가왔다.
“고마워.”
은현은 웃으며 에린이 건넨 물과 빵을 받아들였다.
곧바로 입안에 빵을 집어넣고는 물을 들이켜며 목을 축였다.
뻑뻑한 빵이 물을 만나면서 그나마 목 안으로 잘 넘어가며 부족했던 수분과 열량을 적게라도 보충한다.
마찬가지로 입안에 빵과 물을 털어 넣으며 오물거리던 에린은 양쪽 볼을 빵으로 가득 채워 부풀린 채로 웃음을 지었다.
“히히.”
곧바로 의자에 앉아 있는 은현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무릎에 걸터앉았다.
“나 앉아도 돼?”
“이미 앉았잖아.”
“사실 허락 받으려던 거 아니야.”
에린은 그렇게 빵을 씹으며 삼키고는 은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은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지금 냄새 심할 텐데.”
“괜찮아. 오히려 더 좋아.”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그의 셔츠와 몸에 배어있는 냄새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강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공기는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지만, 함께 들어오는 은현의 진한 냄새는 몹시 기분이 좋다.
“냄새가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잖아.”
“그렇긴 하지.”
에린은 현재 은현과 마찬가지로 팔이 그대로 드러나는 새하얀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땀이 맺혀 있는 그녀의 맨팔은 건강미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몹시 매력적이다.
“내가 에린을 싫어할 리가 없잖아.”
“헤헤. 기뻐!”
에린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교대와 인수인계를 마친 드워프들과 함께 검의 제작을 재개했다.
장장 16시간 동안 이어졌던 작업은 다시 계속해서 이어졌고, 교대로 휴식을 취하는 드워프들과 달리, 은현과 에린은 쉬지 않았다.
24시간을 지나고, 장장 32시간에 달하는 작업의 시간이 소요됐을 때.
“수고했어.”
“끝났다아아아아!”
마침내 은현이 검의 완성되었다는 것을 작업의 종료로 알리자, 에린이 양팔을 위로 쭉 뻗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오오오오!”
“이, 이것이…!”
“천일야장의 작품!”
은현이 제작한 검의 완성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드워프들도 하나같이 흥분과 기대로 얼룩진 표정을 내보이며 환호했다.
고온에서 달구어지고 몇백, 몇천 번을 두들긴 끝에 만들어진 칼날은 어느샌가 고운 형태를 드러내어 예리함을 아낌없이 뽐내고 있다.
게다가 새하얀 눈을 연상시키는 백색의 검신은 드워프들의 눈을 빼앗기에는 충분했다.
“아름답다….”
한 드워프가 넋을 잃고 은현이 제작한 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검신의 모양과 빛에 반사되어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빛깔은 드워프들에게 있어 아름다운 여성의 굴곡진 몸매보다 더더욱 매혹적이다.
“후우….”
마침내 체력을 모조리 소진하였음에도 작업이 끝날 때까지 버티고 있던 에린이 긴장이 풀린 듯 그래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장 화로의 불을 끄고 환기부터 시켜!”
대장간의 모든 드워프들을 총괄하고 있던 도란이 뒤늦게 드워프들에게 대장간의 정리를 지시했다.
화로의 열기가 사라지고, 활짝 열린 문으로부터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대장간 안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시원한 바람이 아니었음에도, 순간 시원하다고 느낀 것은 대장간과 외부의 온도 차가 그 정도로 심했다는 뜻이리라.
순간 은현이 오리하르콘으로 제작한 신검(??)에 넋을 놓았던 드워프들이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대장간 내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은현과 에린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드워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만, 드워프들은 주변 정리를 돕지 않는 두 사람에게 전혀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이 대장간 안에서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장장 32시간 동안 망치를 두들기고 보조했던 은현과 에린은 자신들 중에서 가장 고생한 이들이다.
“현아.”
“응?”
“그 검. 이름은 정했어?”
에린은 전신에 피로가 가득하여 몸 하나 까딱할 수 있을 정도의 힘도 없는 상태였지만, 그와 달리 정신은 멀쩡했다.
오히려 지금은 은현이 완성시켜 손에 쥐고 있는 검에 흥미가 가득하다.
“음…. 일단 생각해둔 이름은 있는데.”
“뭔데?”
반짝이며 궁금하다는 것을 표현하듯 에린의 두 눈이 빛을 발한다.
“미스틸테인. 다른 의미로…겨우살이라고 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산의 안에 숨겨져 있던 오리하르콘을 두고, 은현은 처음부터 이 이름을 생각해두었다.
“뭐, 결정은 스승님이 하시겠지만…. 스승님은 이름을 짓는 센스가 영 아니시니까.”
아마도 이 검의 이름을 말해준다면 그대로 부를 가능성이 높다.
“일단….”
원래라면 당장이라도 시에테에게 이 검을 보여주고 자신이 만든 검이라고, 스승님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자랑을 늘어놓고 싶었지만, 지금의 은현에게는 그럴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잠부터 자자.”
“응…. 나 지금 너무 졸려….”
◆ ◆ ◆
“마님. 이번 달 영지의 재정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간단한 노크 후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중심부에 위치한 공작 저택의 집무실에 들어온 릴리는 한 뭉텅이의 서류뭉치들을 엘레노아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고마워.”
간단하게 고마움을 답한 엘레노아의 두 눈은 계속해서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
유리아 왕녀의 여왕 대관식 준비로 수도 페르닌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알렉스를 대신하여 공작령의 내정을 담당하고 있는 엘레노아는 현재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홍차를 끓이겠습니다.”
“응.”
엘레노아는 공작령의 신전과 영지 내정을 동시에 관리하고 있어 사제로서, 영주 대리로서 두 가지 직무를 동시에 시행하고 있는 한창.
바쁠 수밖에 없다.
과도한 업무로 피로를 느끼는 엘레노아를 걱정했던 릴리는 그녀를 돕기 위해서 낮에는 엘레노아를 보조하고, 밤에는 엘레노아와 함께 임산부인 일리아나의 케어를 맡고 있었다.
“…후우.”
집무를 보고 있던 엘레노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힘드신가요?”
“…아직까지는 괜찮아.”
현재 아르미타스 공작령은 영지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이다 못해 포화 수준에 이르른 상태였다.
그 숫자는 렌디르 왕국의 멸망을 시작으로, 인접 지역에까지 그 피해가 확산되어 가고 있는 것을 원인으로 점점 늘어나는 추세.
난민들은 그나마 치안이 좋고 난민들을 다른 조건 없이 수용해준다는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소문을 듣고 계속해서 찾아오고 있었다.
당연히 이 난민들 중에는 렌디르 왕국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곳에서 흘러들어온 이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엘레노아의 말대로, 아직까지는 영지의 내정은 이 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일 여력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도 괜찮을 것이라는 건 당연히 아니다.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이미 포화상태에 가깝지만, 이건 드워프분들의 도움으로 건물을 증축시킨다면 시간은 걸려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하지만 다른 문제는….”
“…식량과 치안이겠군요.”
“맞아.”
엘레노아는 릴리의 추측에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불어나는 난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물자는 한정되어 있다.
렌디르 왕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렌디르 왕국의 영토에 속해있던 소영주 티즈와 그의 영지민들을 데려와 대규모의 농장지대를 경영하면서 식량을 확보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으로도 한계는 명확히 존재했다.
“우리도 땅을 파서 영지를 운영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죠.”
릴리도 동감한다는 듯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작은 보육원 하나를 후원한다는 것과는 움직이는 자원과 돈의 규모가 너무나도 틀리다.
아무리 아르미타스령이 현재 왕국 내에서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그만큼 밖으로 새나가는 액수도 결코 적지 않았다.
“주인님께 상담을 해보시는 건…?”
그것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것만큼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에 엘레노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문제로 그 사람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 사람은…. 지금도 굉장히 바쁘니까.”
은현은 현재 대륙의 최북단에 시에테의 검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오리하르콘을 구하러 에린과 여행을 떠난 상태다.
안 그래도 현재 아르미타스 공작령이 최고의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은현의 도움이 매우 컸다.
그런데 이런 자잘한 문제까지 은현에게 상담을 받으며, 생각과 일정이 많은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난민과 이주민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악화가 될 수밖에 없는 치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몹시 중요한 과제다.
“…하아.”
엘레노아는 피곤한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엘레노아님.”
“네. 들어오세요.”
문밖에서 노크를 하는 하인의 소리를 들은 엘레노아가 입실을 허가했다.
“무슨 일이시죠?”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하인에게 보고를 받은 엘레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릴리를 바라보았다.
현재 엘레노아의 일정을 관리하는 것은 그녀의 보조를 맡은 릴리다.
오늘 잡혀 있던 일정에는 손님의 방문이 없었기 때문에 릴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약속에 없는 방문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누구죠?”
“그게…. 상인분들이신데요.”
“…상인?”
“네. 그…코인 상단의 비트와 도지라고 말씀을 전해주시면 아실 거라고….”
“…….”
엘레노아의 릴리의 두 눈매가 동시에 가늘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