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7화 〉 597. 설녀(雪?)(5)
* * *
설녀의 이마를 관통한 에린의 레이피어가 매끄럽게 아래로 내려가면서, 설녀의 영체를 두 동강 냈다.
[이럴 수는…!]
어째서 자신이 져야만 하는 건지, 설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물리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는 자신의 영체에 직접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이 상황은 그녀에게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합리한 재앙 그 자체.
자신의 영체를 절단하고 단면으로부터 일어나는 푸른색의 불꽃이 자신의 혼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 이후부터다.
[꺄아아아악!]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에 설녀가 비명을 질렀다.
마치 자신의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버리겠다는 청염은 정중앙의 절단면으로부터 영체 자체를 모조리 집어 삼켜나갔다.
[그만, 그만해! 멈춰어어어어!]
소멸하고 싶지 않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 간절함이 담겨있는 애원을 토로했지만, 에린의 여우불은 사라지지 않았다.
원인이 자신의 이마에 레이피어를 꽂아 넣고 영문을 모를 불합리한 능력으로 영체를 절단시킨 에린이라는 것을 깨달은 설녀가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에린을 노려보았다.
[감히 너 따위가…!]
설녀는 영체 자체가 소멸해가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직시했다.
정말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신은 이대로 에린의 여우불에 의해서 아예 불태워져 사라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순순히 소멸을 받아들일 것인가.
[내가…이대로 나만 죽을 것 같아!?]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을 이렇게 몰아넣은 눈앞의 여자만큼은, 반드시 자신이 데리고 가겠다고 설녀는 결심했다.
여우불에 의해 영체가 불타오르던 설녀가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을 쥐어 짜내어 에린을 향해 숨결을 토해냈다.
“큭…!?”
에린은 미처 설녀의 숨결을 피해내지 못했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그 숨결의 크기와 방향을 특정하여 피할 수 있었겠지만, 설녀의 영체를 두 동강 낸 이런 근거리에서는 공격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얼어서 그대로 죽어버려!]
동귀어진(????)의 각오로 에린을 공격하는 설녀의 발악으로, 에린의 몸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조금씩 손발의 감각이 없어져 가며 동상의 범위가 확대되어가는 것을 느낀 에린은 머릿속으로 은현을 떠올렸다.
‘현아…. 미안해….’
◆ ◆ ◆
우워어어어!
거칠게 난동을 부리는 설인의 발이 눈으로 뒤덮인 땅을 찰 때마다, 땅이 울리고 쌓인 눈들이 들썩였다.
물리적인 충격으로 거세게 일어나는 눈보라의 폭풍이 시야를 뒤덮고 주위의 기온을 한층 더 떨어뜨렸다.
“스으….”
기도를 타고 들어오는 설원의 공기가 몹시 차가워 폐를 따갑게 만드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런데도 은현의 움직임은 전혀 둔해지지 않았다.
본래라면 이 눈밭의 설원은 설인에게 있어 굉장히 유리한 지형이다.
인간들에게는 이곳에서 빠르게 움직일 수 없고, 거친 눈보라와 살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는 그들의 체온을 빼앗고 얼어붙게 만든다.
이 지형은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불리할 터이지만, 은현에게는 그 불리함이 적용되지 않았다.
흔적 자체를 남기지 않는 듯이,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여 설인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피해내기는커녕 반대로 공격을 당하기 일쑤였다.
[시에테 검성술]
[선풍(?風)]
순간 설인은 왼쪽 팔의 감각이 사라졌다는 것에 의문을 느꼈다.
의아함을 느끼며 자신의 팔에 시선을 옮기고 나서야, 있어야 할 왼손이 없고 자신의 새빨간 피가 새하얀 털가죽을 붉게 물들이며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다.
절단된 왼팔의 고통이 찾아오는 것은 그것을 자각한 뒤였다.
크륵!?
언제 베인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설인의 눈에는 공격은커녕 은현의 모습마저도 특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베어졌다는 자각조차도 없었다.
다른 모험가들은 자신의 가죽에 생채기조차도 내지 못하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밀어붙여 팔다리를 찢었는데, 은현은 오히려 설인을 압도하고 있다.
크…륵!
설인은 순간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단 일격에 자신의 가죽이 지닌 방어력을 무시하고 팔 자체를 절단시켜버리는 저 공격력도 공격력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지금 은현이 보여주고 있는 속도 그 자체다.
새하얀 눈밭 위에 발자국 하나를 남기지 않고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이곳에 은현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마수로서의 본능이 확실하게 설인에게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는 명확히 이곳에 있었다.
단지 설인이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을 뿐.
[시에테 검성술]
[선풍(?風)]
다시 한번 불어오는 바람은 추위를 가득 채운 눈보라의 폭풍이 아닌, 자신의 몸을 찢어발기기 위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폭풍의 칼날이다.
이번에 설인은 자신을 향해 휘둘러오는 그 칼날의 존재를 명확하게 인지했다.
크륵!
칼날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그곳을 다리로 걷어찼다.
거대한 체구에 걸맞게 설인이 휘두른 다리의 면적은 엄청난 공격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체구만으로도 압도적인 물리력을 가지고 있다.
공격을 해오던 다른 모험가들이었다면, 눈보라를 가르며 휘둘러지는 설인의 다리를 눈치채고 급하게 방어를 하거나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여 절망하기 마련.
하지만 이번에도 설인의 공격은 은현에게 닿지 않았다.
설인이 또다시 걷어찼던 자신의 다리에 감각이 사라졌다는 것에 불길한 기시감을 느껴야만 했다.
툭 눈밭 위로 떨어지는 자신의 다리 한쪽을 보고, 설인은 경악했다.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이 압도적인 힘으로 짓누르며 육체를 찢어발겼던 인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심지어 자신이 유린하기는커녕 유린을 당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자각해버리게 되는 것은, 마수로서의 생존 본능이 경종을 울렸기 때문이다.
설인은 한쪽 다리를 잃어버렸다는 것과 은현과 자신 사이의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를 실감하고 동요했다.
쿠웅!
한쪽 다리만으로 무거운 거구를 지탱하는 것은 무리였는지 허무하게 뒤로 넘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바닥의 눈들이 들썩이면서 위로 튀어 올라 눈보라를 더욱 흐리게 만든다.
“…대단하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은현은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오란이 시작했고, 자신이 완성해낸 두 자루의 쌍검의 성능을 확인하면 할수록 감탄을 할 수밖에 없다.
반신(半?)이 된 자신의 영혼과 동화한 두 자루의 신검(??)은 자신의 신력을 끝도 없이 받아들이며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냈다.
“…성장하고 있는 건가.”
마치 이제 막 밥을 먹고 자라나기 시작하는 아이들처럼, 적월과 청월은 은현의 신력을 흡수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은현이 원하는 길이, 두께를 파악하여 스스로 그 형태를 바꿔나가는 두 자루의 신검은 마치 정말로 고유의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브류나크가 이 검들을 경계하고 있었던 이유는….”
자신과 동급의 무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젠가 적월과 청월 또한, 자유로운 의사를 가진 ‘에고(Ego)’를 각성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
크…륵!
다시 시선을 옮겨 은현과 설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인간과 비교하면 몇 배나 커다란 거구인 설인의 어깨가 움찔했다.
“…다시.”
은현은 다시 적월과 청월을 쥐고 설인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설인의 목숨을 바로 끝장내지는 않았다.
그것은 수많은 모험가들을 유린했던 거대한 체구의 설인을 상대로 연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적월과 청월의 성능을 시험해보는 것도 있었지만, 진짜 목적은 약 800년의 시간 동안 검술에 매진하여 검성이라는 칭호를 거머쥐었던 또 다른 자신의 기술을 재현하는 것.
시에테에게서 이어받은 검술을 자신의 감각과 이론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알맞은 형태로 뜯어고친 그 검술은 지금의 은현에게 제시된 답안지와도 같은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자신이 걸어왔던 800년의 시간을 따라잡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가 있을까.
하지만 은현은 이 길을 걷는 것이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성장했구나.
유피테르가 부여한 시련 속에서 시에테는 검성이 된 은현의 그 또 다른 가능성을 인정했다.
비록 자신에게 주었던 칭찬이 아니라, 또 다른 자신에게 했던 칭찬이 아닐지라도, 은현은 그것이 기뻤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검사와 검사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은현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시에테와 재회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의 바람을 이뤄주지는 못했다.
은현의 목표는 자신이 직접 스승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시에테가 살아있을 적에 이루지 못했던 은현의 한이기도 했다.
크아아아아아!
절단되어 있던 설인의 한쪽 다리가 이번엔 무릎 위쪽까지 깨끗하게 베어져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설인은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쪽 다리를 잃은 상태에서는 그저 바닥을 기며 허우적거리는 것이 한계.
수많은 모험가를 유린하여 씹어먹으며 악마라고 불렸던 소문의 근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재앙에게서 도망을 치려는 약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눈앞의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음?”
단단한 방어력을 가진 설인의 육체를 상대로 검술을 연습하고 있던 은현이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은현이 응시하고 있는 방향은 도망친 설녀를 쫓아간 에린이 있는 방향이었다.
감지를 통해서 설녀의 마력이 사라져 소멸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에린이 해냈다는 생각과 함께 대견한 마음을 품으려 했지만, 곧바로 에린의 마력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연습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군.”
크륵!
갑작스레 공격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겨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 설인이 손에 쥔 눈들을 집어 던져 은현의 시야를 방해했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서 눈을 뗀 지금이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
허공에 눈발이 휘날리며 자욱해진 눈보라가 시야를 가린 틈을 타, 바닥을 기던 설인이 남아 있는 한쪽 팔을 은현에게 휘둘렀다.
하지만 설인에게서 눈을 돌렸다고 해서, 은현은 경계를 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시야를 가린다고 하더라도, 이미 감지를 통해서 설인의 움직임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은현은 눈보라를 헤치고 튀어나오는 설인의 거대한 주먹을 적월로 베어 넘겼다.
[시에테 검성술]
[천화참선(?花??)]
시에테의 ‘매화참선(?花??)’을 은현에게 알맞은 형태로 다시 새롭게 재구성한 미래 검성 은현의 기술은, 전신을 통째로 짓뭉개기 위해 정면으로 날아오는 설인의 주먹을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버렸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먹에 이어 팔과 어깨를 깔끔하게 절단시켰고 최종적으로 은현의 칼날이 설인의 목을 일섬을 그으며 갈랐다.
은현은 설인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조차도 할애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린.’
두 손에 쥐고 있던 적월과 청월을 역소환시킨 은현은 전속력으로 에린이 있는 곳을 향해 눈보라를 헤치며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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