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2화 〉 592. 쿠르델 산맥(5)
* * *
은현은 엘레노아로부터 온 긴급 통신을 받고 급하게 전달해온 소식의 내용을 들었다.
“…왕녀님이 예지몽을?”
네. 오라버니에게서 연락을 받고 바로 당신에게 연락했어요.
통신의 내용은 유리아에 관한 것.
여왕이 되기 위해서 밤낮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차근차근 대관식을 준비하는 와중, 휴식 시간에 잠시 잠을 청했던 것이 시작.
짧은 잠을 자는 동안 꾸었던 꿈의 내용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신경이 쓰여서 소식을 전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꿈의 내용은 다름 아닌 일리아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거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원 속에서, 일리아나가 모습을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어떤 두 존재에게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고 시체와 영혼을 모아오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
인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일리아나의 태도와 모습이 너무나도 담담하고 무감정해서, 유리아는 섬뜩함을 느꼈다.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쳤고 지금은 은현과 결혼하여 배 속에 아기를 가지게 된 그녀는 너무나도 온순하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꿈속에 나왔던 일리아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 죽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은 악인(?人) 그 자체였다.
“…흐음.”
산행을 멈추고 근처의 인접한 동굴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은현과 에린은 유리아가 봤다는 예지몽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눈보라가 가득한 설산…. 현아, 이건 우연일까?”
현재 자신들이 있는 위치와 비슷하다는 점이 있다는 점이 떨떠름했던 에린이 신경 쓰이는 은현에게 물었다.
유리아는 현재 은현과 에린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그저 자신이 꿨던 꿈의 내용이 몹시 신경이 쓰여서 은현에게 상담을 받고 싶었던 것이리라.
“엘레노아. 네 생각은 어떻지?”
…그냥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좀 마음에 걸리네요. 더군다나 당신과 에린이 있는 곳도 지금 왕녀님이 꿈속에서 묘사했던 장소와 흡사하지 않나요?
역시나 엘레노아 또한 에린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타이밍에 유리아가 예지몽이라는 것을 꾼 것이 몹시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하필 그 꿈에 등장한 사람이 일리아나님이라는 것도 걸려요.
물론 지금의 일리아나가 그런 일을 벌였거나 벌일 예정이라는 것은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것은 은현이나, 엘레노아, 에린, 심지어 직접 꿈을 꾼 유리아조차도 전혀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아와 달리, 은현이나 다른 아내들은 곧바로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또 다른 일리아나님이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한 것은 릴리였다.
일을 벌인 것이, 은현의 아내가 된 이곳의 일리아나가 아니라, 이차원의 다른 평행 세계에서 넘어온 일리아나라면.
아예 있을 수 없는 얘기는 아니네. 아니, 오히려 이쪽이 가능성이 높아 보여.
심지어 일리아나마저도 릴리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는 그 애가 가지고 있는 미래 예지의 정체가 사실은 또 다른 내가 있었던 세계에서 일어났던 이야기가 아닐까 하곤 생각했었어.
무수한 평행 세계 중 단 하나의 세계.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책 속의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유리아와 접하게 되었던 건 아닐까.
그녀는 책 속에서 접한 이야기와 사건들밖에 알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예지몽을 통해서 그 세계에서 있었던 사건 하나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본 것일지도 모른다.
유리아가 가지고 있는 미래 예지의 정체를 추측해보았지만, 본인도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그 특별한 능력에 대해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도 확신할 수 있는 건, 그 애가 꿨다는 예지몽은 다른 평행 세계에서는 실제로 일어났을 이야기라는 거지.
“…우연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네.”
하필이면 이 쿠르델 산맥에 와있으며 이곳에 악마가 있다는 소문까지 퍼져있다.
유리아가 꿨다는 예지몽과는 어떠한 식으로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또 다른 일리아나가 자신이 있었던 평행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도 무슨 수작질을 벌여두었을지도 모른다.
“왕녀님의 이야기를 전달해줘서 고마워. 미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응. 혹시라도 ‘내’가 연관된 낌새가 있으면 그냥 와.
“알았어.”
…….
곧바로 은현의 대답이 날아왔지만, 일리아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황이 묘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챘으니 물러서기도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실.
아가.
일리아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에린을 불렀다.
“네! 일리아나님!”
현이를 부탁할게.
“헤헤. 저한테 맡겨두세요!”
에린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어 힘차게 답했다.
저렇게 밝게 말을 해주니 어쩐지 위안이 되기도 하여 일리아나는 작게 웃었다.
그래. 아가만 믿고 있을게?
“네!”
수정 구슬을 통해서 아내들과의 통신을 마친 은현과 에린은 동굴 안에 텐트를 설치하여 내부에서 하룻밤을 맞이했다.
해가 뜬 아침 일찍부터, 은현과 에린은 텐트와 장비들을 정리하고 다시 산을 올랐다.
만약 이 쿠르델 산맥에 있는 악마라는 것의 정체가 다른 일리아나가 수작을 부린 무언가라면, 빠르게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능하면 또 다른 자신과 은현이 엮이길 바라지 않았던 일리아나의 마음은 이해했지만, 이것만큼은 여신의 명을 받아 위협을 제거해야 하는 사도로서, 은현이 해야 하는 일이다.
은현은 오리하르콘을 찾는 것보다, 쿠르델 산맥 악마의 정체를 파헤치고 그것을 없애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설정했다.
“그런데 어떻게 찾지?”
하지만 에린은 목적과 계획의 우선순위를 변경하기는 했지만, 조금 답답한 마음을 품었다.
이 광활한 산 안에서 아무런 단서도 없이 악마라고 불리는 애매한 존재를 찾는 데 막막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계속 산을 올라가다 보면 만나겠지.”
“응? 어떻게 확신해?”
“저쪽에서는 우리가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이나 다름이 없거든.”
정말로 배후에 다른 일리아나가 있던, 아니던, 정말로 악마든 아니면 마수나 스펙터건 간에, 그것들은 인간들을 아주 좋아한다.
인간의 시체나 안에 품고 있는 마력을 먹어치우며 강해질 수 있으니 산으로 올라오는 인간들을 찾아다니며 사냥하는 것은 당연할 터.
오리하르콘을 찾아 한몫을 크게 벌어보려는 모험가들의 소식이 일제히 끊긴 것만 봐도 거의 확실하다.
“계속해서 올라가자.”
“응.”
두 사람은 계속해서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을 타고 올라갔다.
스노모빌을 사용하면 쉽고 빠르게 위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구태여 지금까지 처리했던 모험가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심어주어 경계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산에 올라가면서 아예 위험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눈토끼의 무리들을 두어 차례나 더 조우했고, 이외에도 다른 설산의 마수들을 네 차례나 만났다.
‘아, 진짜 힘들다.’
에린 속으로 점점 자신의 몸에 피로가 쌓이기 시작하는 것을 자각했다.
마수들의 전투력 자체는 그렇게 긴장할 정도로 어려운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성가신 것은 지금 자신과 은현이 서 있는 환경이다.
종아리까지 쑥쑥 빠지는 눈밭은 큰 힘을 실어서 도약해야 하는 에린의 발돋움을 방해했다.
평소 날랜 다리로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세검술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에린이기 때문에, 또한 두꺼운 방한용 장비를 몇 겹이나 껴입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전력을 발휘하는 것은 큰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고 해서,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을 모두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벗는 순간, 곧바로 이 살벌한 눈보라와 기온은 자신에게 들이닥쳐 체력과 체온을 빼앗아갈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크륵!
잔상을 남기며 사라지는 은현은 마수의 무리 안에 나타나 너무나도 간단하게 마수들을 도륙했다.
자신보다 더 무거우면 무거웠지, 결코 덜하지 않는 장비들을 착용하고도 은현은 두 눈으로 인식하기 힘든 수준의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마수의 입안에 적월의 칼날을 찔러넣고 그대로 위로 휘둘러 머리 채로 두 동강을 내버린다.
이미 일격으로 처리한 마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드는 다음의 마수를 향해 청월을 휘둘렀다.
‘…어떻게 저게 가능해?’
은현이 휘두르는 적청색 두 자루의 칼날이 흐릿하게 보여 시야에서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자신도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빠른 축에 속하는 세검사로 제법 이름을 알려져 있을 진데, 은현의 검술은 자신의 속력을 상회한다.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감상을 가슴 속에 품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마치 무거운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다고 전력을 낼 수 없다는 불평을 토로한 자기 자신에게 ‘겨우 그 정도로?’라고 말을 해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래선 안 돼.’
에린은 레반테인을 쥐고 있던 자신의 주먹에 힘을 실어 꽉 쥐고 은현과 마수들의 사이에 뛰어들었다.
은현의 등을 노리고 달려드는 마수의 목을 베어내고 머리가 툭 떨어진 몸통을 다리로 걷어 찼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은현에게 맡겨두어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일리아나에게 은현을 보조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겨우 장비의 불편함 때문에 전력을 내지 못했다는 핑계를 가슴 속으로 품었던 자신이 너무도 추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자신도 필사적으로 노력하여 성장해야만 했다.
“하.”
은현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배후에서 들어오는 마수의 공격을 차단하고 깔끔하게 정리해낸 에린을 보고 품은 미소였다.
불편한 기후와 환경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성장의 기미를 보이는 제자이자 아내의 모습이 몹시 눈이 부시다.
“하아…. 힘들어어…!”
공격해온 마수들을 모두 정리한 은현과 에린은 곧바로 이동을 개시했다.
마수들의 시체 무더기에서 거리를 벌리고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야, 에린이 새하얀 눈밭 위에 몸을 던져 풀썩 드러누웠다.
에린이 처리한 마수의 숫자는 약 3할 정도.
그럭저럭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스스로도 자신할 수 없는 성적이었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 은현이 마수들의 처리를 에린 자신에게 양보해주고 있다는 배려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꾸준한 훈련을 통해서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되는 마수들과의 연전으로 인해 쌓인 심적인 피로가 장난이 아니다.
은현은 작게 웃으며 눈밭에 드러누운 에린에게 손을 뻗었다.
“업어줄까?”
“정말? 해줘!”
에린이 반색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고 은현을 향해 양손을 내뻗었다.
그녀와는 달리 전혀 지치지 않은 상태로 보이는 은현은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풀어 가슴 앞쪽에 다시 멨고 에린을 업었다.
원래라면 다시 몸을 일으키고 걸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지만, 은현에게 어리광을 부릴 기회가 생긴 에린은 전혀 마다하지 않았다.
“히히.”
은현의 등에 업힌 에린은 은현의 목에 팔을 두르며 꼭 끌어안고는 웃음을 흘렸다.
“나 안 무거워?”
“전혀.”
에린이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까지 포함한다면 족히 세 명분에 달하는 무게를 짊어지며 눈길을 걸어가고 있는 셈인데, 은현은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그냥 빈말로 해주는 대답이었음에도 에린은 그것이 굉장히 기뻤다.
“안 힘들어? 나 내릴까?”
“괜찮아. 많이 지쳐 보였던데? 훈련량 좀 다시 짤까?”
“…….”
에린은 답하지 않았다.
여기서 훈련을 더 늘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 피식 웃으며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은현의 얼굴이 굉장히 얄밉다.
살짝 감정을 담아 은현의 어깨를 주먹으로 두들기자, 은현이 곧바로 대답했다.
“알았어. 미안해. 장난이었어.”
“치, 현이가 대단한 거야. 어…? 현아. 저기 앞에.”
이윽고 에린이 눈보라 속에서 보이는 흐릿한 무언가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집?”
에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눈보라로 가득하여 1년이 매일 춥고,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이 산속에, 유일하게 존재하고 있는 통나무집은 무척이나 부자연스럽고 이해할 수가 없는 등장이었다.
굉장히 뜬금없고, 대놓고 수상한 그 집을 향해 은현과 에린은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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