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7화 〉 587. 아버지의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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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숲에서 여행의 준비를 마친 은현과 에린은 곧바로 대륙의 북쪽을 향했다.
게이트의 개설은 이미 해둔 상태로, 왕국의 기사단장으로서 업무가 바쁜 리오드나 단원이었던 차한성이 복귀할 수 있도록 준비도 마쳐두었다.
이후의 계획을 물어보았던 리오드의 물음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스승님의 검을 만들어야 해서 재료를 구하러.’라는 말을 남기고 에린과 함께 다시 여행을 떠났다.
은현이 개설해두었던 게이트를 통해서 자신의 저택으로 복귀한 리오드는 집무실에서 밀린 업무를 보다가 문득 상념에 잠겼다.
“그 녀석의 스승이라….”
은현에게 검술을 가르쳤다는 시에테라는 여자.
최근에 그녀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인지 더더욱 흥미가 생겼다.
무슨 연유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부활하게 되었는지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리오드의 머릿속에 생긴 것은 자신보다 강한 은현을 키워낸 여검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한 호기심뿐이다.
“네?”
함께 아르티아 기사단의 업무를 정리하고 있었던 에이라가 리오드의 중얼거림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리오드는 딸인 에이라가 모그라프령에서 에린과 시에테의 모습을 목격한 아르티아 기사단원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에이라.”
“네. 아버지.”
“너는 모그라프령에서 은현의 스승이라는 분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고 했었지?”
“아…. 네.”
에이라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여검사의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분이셨지?”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고?”
당연히 강했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에이라의 대답은 무척이나 예상외의 것이었던지라 리오드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가지고 계셨던 검술의 깊이를 제가 가진 안목으로 재단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어요.”
“…흐음.”
살짝 아쉬워하는 에이라의 대답을 들은 리오드는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딸이라는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고서라도, 에이라가 가지고 있는 검술의 수준은 결코 약한 축에 속하지 않는다.
아이테르의 학생 시절 때는 잠깐 은현에게 훈련도 받았으며 이겨냈고, 성장한 끝에 자신의 인정을 받아 자신의 기사단에 입단했다.
게다가 신입에 걸맞지 않은 검술 실력을 선보이며 지금은 기사단 안에서도 중요 전력으로 평가받으며 모두의 인정을 받고 있기도 하다.
물론 아직 은현이나 리오드의 검에 미치지는 못하기에 그보다 더 위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에테의 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솔직히 딸의 입으로 듣게 되니 기분이 더욱 묘했다.
“오우거의 시체를 토막을 내는 것도 한순간이었다고 했지.”
모그라프령에 기사단원들과 함께 지휘관으로 파견 지원을 보냈었던 카인의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아니에스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많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광역의 결계를 펼치고 거대한 오우거 좀비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한계였었던 절체절명의 순간.
돌연 나타난 단 한 명의 여검사가 커다란 위협을 막아내는 것이 단 한순간에 벌어졌었다고.
“…네. 맞아요. 정말로 눈 깜짝할 새였죠.”
에이라도 그때를 떠올리면서 인상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그라프령의 병사들도, 아르티아의 기사단원들도, 베스타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도, 그 전장에 있었던 모든 사람이 경악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단 한순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짧은 순간, 거대한 오우거의 몸뚱이를 간단히 토막을 내어버리는 광경은 그렇게 쉽게 잊힐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눈치채면…. 오우거의 시체는 이미 잘려나가서 무너지고 있었어요.”
정말 깨끗하게 잘려나간 단면은 무시무시한 절삭력을 가진 검격을 의미했으나 정말로 두려웠던 것은 시에테가 휘둘렀던 검의 속도 그 자체다.
검을 휘둘렀던 것도, 가까이 근접하는 것조차 에이라를 포함한 다른 모든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베였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의 그 속검에 자신이 베이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서리가 쳐질 정도다.
은현이 선보이는 속검의 기원이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답은 너무도 간단히 나온다.
아마도 시에테가 선보이는 검의 속도는 전력을 다한 은현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일 터.
이미 은현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은 분명히 상대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전력과 수준의 차이를 알고 있더라도.
“…궁금하군.”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명예와 더불어 많은 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과 명예를 제쳐두고 시에테와 한번 검을 섞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그것은 리오드 또한 자신의 기술을 극한까지 연마하기를 멈추지 않는 검사이기 때문이리라.
“아직 모그라프령에 계신다고 했지?”
“네. 제 기억으로는 그곳에서 마수들을 토벌하면서 나오는 보상금으로 당분간 생활을 하실 예정이라도 들었어요.”
시에테는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신원 미상의 수상한 여검사였지만, 엘레노아의 신원 보증을 통해서 정식으로 모그라프령 안에 체류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상태였다.
드워프들이 사용하는 대장간을 무작정 쳐들어가 잔뜩 쪼아댄 끝에 쓸만한 검 몇 자루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영 시원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었다는 에린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은현님이 검을 가져오시기 전까지 모그라프령에 있으시겠다고 하셨나봐요.”
그전까지 사용할 검을 계속 충당하면서 드워프들을 잔뜩 쪼아대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인다.
“…제법 까다로우신 분이군.”
이야기만 들었을 때 시에테의 인상은 자기 마음이 드는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직성이 풀리는 폭군의 성향이 있어 보였다.
20년 전에도 제멋대로에 마이페이스로 한 성격 하는 일리아나를 마음대로 휘어잡았던 것에는 역시나 그런 경험이 연관되어 있었던 것일까.
“흐음. 대장장이의 종족….”
장인의 혼을 불태우며 무기를 제작하는 땅의 요정족의 소식은 가장 최근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이번 언데드 마수의 출현 사태로 인해, 왕궁의 궁정 회의에서 모그라프령에 지속적인 기사단의 파견 지원을 편성해야 하는 만큼 한 번쯤은 모그라프령에 들어야만 했다.
“차라리 잘 됐군.”
기사단장으로서의 업무와 동시에, 시에테를 만나 검사로서의 호기심도 채우고 드워프들이라는 요정족들을 직접 볼 좋은 기회였다.
“가실 건가요?”
“어차피 기사단의 파견 지원으로 한번은 직접 가봐야 했던 곳이다. 조만간 방문 날짜를 잡도록 해야겠다.”
“알겠어요. 내일 본부로 출근하게 되면 부단장님께도 전달하겠습니다.”
“음.”
하지만 대화는 여기에서 마무리되지 않았다.
“저어,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에이라가 묘하게 망설이며 말끝을 흐렸다.
“할 말이 남았느냐?”
“네. 그…. 한성이는 요즘…. 어떤가요?”
“…….”
살짝 눈치를 보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이라의 모습은 기사단 소속의 부하로서가 아니라, 딸 아이의 모습이었다.
딸의 그 모습을 보는 것은 몹시 심기가 불편했지만, 테레지아의 중재를 통해서 차한성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리오드도 더는 반대할 수는 없었다.
“재능은 있다. 강해지고자 하는 의욕이나 기개도 넘치는 편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고된 은현의 훈련이나 자신의 대련을 버티지 못하고 진즉에 포기했으리라.
차한성이 리오드에게서 검술을 배워 강해지고 싶어 하는 원동력이 바로 에이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짜증이 났지만, 그 사적인 감정을 제외한다면 차한성이라는 검사 그 자체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눈이 좋은 만큼 리오드의 검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습득의 속도가 경이적일 정도로 빠르다.
육체와 마력의 스펙만 제대로 갖추어진다면 리오드의 힘 일부를 재현하는 것도 머지않은 일.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공을 들인다면 분명히 훌륭한 검사로 자랄 수 있을 만한 재목이란 것은 틀림이 없다.
“그…. 많이 힘들어하지 않던가요? 훈련에서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아르티아 기사단에 리오드의 권한으로 장기 휴가 처리가 된 차한성은 현재 몇 주 째 기사단 본부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훈련하게 되었다는 소식만을 듣고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에 에이라는 걱정이 들었다.
심지어 현재 그가 받는 훈련은 은현이 고안해낸 훈련일 터.
이전에 에이라도 받아보았던 전적이 있었던 만큼 그 훈련의 강도가 몹시 높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기다려라.”
“하지만….”
“이 정도도 해내지 못해서는 의미가 없어. 테레지아의 중재로 그 녀석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나는 나약한 녀석을 네 옆에 붙여둘 생각이 없다.”
“아, 아버지…!”
화들짝 놀란 에이라가 언성을 높이며 리오드를 불렀다.
아직 제대로 된 고백도 주고받지 못했고 제대로 된 연애도 해보지 못했을 진데, 리오드는 이미 자신과 차한성 사이에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차한성이라는 인간 자체를 높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수준 높은 검사라고 리오드가 인정한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연애도 하지 않고 결혼부터 생각하고 있다니.
일의 순서가 엉망진창이다.
리오드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했다.
“…나와 네 엄마는 시작부터가 엉망진창이었지.”
“네…?”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에이라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영웅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밖에 없는 왜소한 남작 가문의 자식이었다.”
정치적인 기반은 하나도 없었고, 출세조차도 꿈을 꾸기에는 야심이나 목표도 없었다.
어째서 테레지아가 그런 보잘것없는 말단 귀족 가문의 자신을 열렬하게 사랑을 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장인어른께서 반대하셨던 것도 이해가 가.”
리오드 쪽에서 테레지아의 백작 가문에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전쟁을 끝내는 데 일조했다는 허울뿐인 ‘명예’와 그를 명목으로 자신에게 주어졌던 막대한 포상뿐.
아내가 속한 가문의 위계를 높일 만한 기반도, 재력도, 발언권도 없었던 남작 가문의 자신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득보다는 손해가 더 컸을 것이다.
“그렇게 장인어른의 반대가 심했을 때, 테레지아가 덜컥 배 속에 너를 가져버렸지.”
“…….”
혼전임신이라는 것은 순결을 중요시하는 귀족들 사이에 있어서 많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테레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리오드의 아기를 가졌으며 고집스럽고 막무가내식의 행동력 끝에 리오드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네가 태어났다.”
“아버지….”
“나는…. 장인어른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반드시 장인어른처럼 조건을 따지면서 반대를 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에이라가 커서 성인이 되고 정말로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생긴다면, 그냥 그대로 이루어주자고, 자신이나 테레지아처럼 고생을 시키지는 말자고 다짐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리오드는 자신이 장인어른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장인어른께서는 귀하게 키운 딸이었던 테레지아를 나에게 떠나보내는 준비가 아직 되지 않으셨던 건 아니셨을까.”
리오드 가지고 있는 힘이나 기반, 배경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테레지아의 아버지 스스로가 테레지아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품게 된 것은 지금의 리오드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 흉터라도 생길까 기사가 되는 것조차 반대할 정도로 귀하게 키웠던 에이라를 사위에게 떠나보내는 것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딸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장인어른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준비라는 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너무나도 갑작스레 찾아오더구나.”
“아버지….”
진중함이 가득 담겨 있는 리오드의 마음을 들은 에이라가 뭉클한 마음을 느꼈다.
책상에 앉아 있던 리오드가 올곧은 눈으로 에이라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에이라. 한 가지만 약속해주었으면 한다.”
“네…. 말씀하세요.”
에이라는 살짝 고여있는 눈물을 훔치고는 어떤 부탁이든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뒤 리오드의 말을 경청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혼전임신은 안 된다.”
“…네?”
에이라는 순간 자신이 뭘 들었나 싶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관계를 맺는 것까지는 막지 않으마. 어차피 마음이 통한다면 분위기에 이끌려 그러한 단계를 밟는 것까지 내가 일일이 막을 수는 없겠지.”
자신과 테레지아가 그랬던 것처럼, 막으려고 해서 막아진다는 것이 아니란 걸 리오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기를 바라며 에이라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반드시 피임은 해야 한다. 알겠지?”
“저, 저를 뭘로 보시는 거예요!”
아직 제대로 된 연애의 단계에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그 이상의 단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리오드의 말에 에이라가 얼굴을 화끈하게 물들이며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런 딸아이의 언성에도 불구하고, 리오드는 차분하게 딸아이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네 엄마의 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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