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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불멸자-584화 (567/730)

〈 584화 〉 584. 새로운 선택(2)

* * *

“…….”

실비아는 조용히 은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받아들여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고 행복하겠지만, 그것은 그저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은현이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를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누나.”

이내 은현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실비아를 불렀다.

“응.”

드디어 답을 내리고 자신을 부르는 은현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나왔다.

실비아는 그 목소리에서 이미 그의 마음을 확인했다.

“저는…. 누나와 계약할 수 없어요.”

아니나 다를까.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육성으로 들으니, 가슴의 한쪽이 아리듯 아팠다.

실비아의 영체가 정착한 호문쿨루스 인조 육체는 살아생전의 시절에 느꼈던 오감을 그대로 재현해냈지만, 얄궂게도 감정의 아픔까지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만 같다.

거절을 당한다면 깨끗하게 물러나자고 미리 다짐하였음에도, 실비아는 그러지 못했다.

“어…째서?”

은현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자신의 두 손을 꽉 쥐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누나와 계약을 한다는 건 순전히 정령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아니니까요.”

은현은 실비아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 정령 계약을 통해서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하지만 은현은 실비아의 마음에 답해줄 수가 없었다.

“분에 넘치게도, 전 지금 아내가 많아요. 네 명이나 되거든요.”

사실 여신의 존재까지 포함한다면 다섯이 되지만, 베르단디는 예외로 두었다.

많은 아내들이 자신을 아껴주고 위해주며 지지해주고 있다.

지금의 은현은 그렇게 헌신적인 마음을 보내오는 아내들에게 마음을 답해주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여기서 실비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리아나를 비롯한 다른 아내들에게도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닐까.

일리아나에 이어 엘레노아, 릴리에 에린까지 받아들인 자신이 말하기도 뭐하지만, 솔직히 받은 만큼의 애정을 다 돌려줄 자신도 없었다.

“그…렇구나.”

실비아는 은현의 말을 듣고는 작게 목소리를 떨었다.

자신의 이기심과 어리광이 묻어 나오는 요청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마음의 쓰라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미안…해. 내가 너무 억지를 부렸구나.”

애초에 자신이 죽은 뒤로 2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의 은현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전제를 생각해두었던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은현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경험했던 괴로웠던 기억을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치료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왔다.

그 자리에 실비아가 들어갈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말해줘서 고마워.”

실비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든다면 은현의 얼굴과 마주하게 되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들 수가 없다.

본래 자신과 은현이 함께 살았던 이 집에는 더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하다.

“…….”

은현은 테이블에서 급히 도망치듯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실비아를 일부러 외면했다.

그가 느끼는 기분은 실비아와 비슷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거절한 주제에 그녀를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실비아는 집을 나서지 못했다.

쿵!

문을 세차게 젖히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린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이상해!”

“…….”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에 난입하여 은현에게 따지듯 묻는다.

“어째서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는 거야!?”

“에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나와.”

무작정 집안으로 밀고 들어온 에린을 따라 들어온 엘빈이 미간을 좁히며 에린을 다시 붙잡고 밖으로 끌어내려 했지만, 에린은 엘빈의 팔을 뿌리쳤다.

“싫어! 오빠! 오빠는 이 상황이 납득이 돼?”

“…납득이고 뭐고 이건 둘이 정할 문제야. 우리가 끼어도 될 문제가 아니야.”

엘빈은 에린과 마찬가지로 은현과 실비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 문제에 개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당사자인 둘의 마음이 맞아야지만 결정될 일이지, 한쪽이 그럴 마음이 없는데 다른 한쪽에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부외자에게는 주제넘은 일이다.

심지어 엘빈은 이미 주종의 서약으로 은현과 계약을 맺은 사이로 철저한 을이었다.

은현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것을 존중할 생각이었지만, 에린은 그의 그 마음을 부정했다.

“현아. 정말로 우리 때문에 거절하는 거야?”

“…….”

은현은 재차 물어보는 에린의 말에 답하지 않았고 침묵을 고수했다.

“현이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집요하게 파고들어 오는 에린의 질문에 포기한 은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황스러워.”

갑작스러운 실비아의 등장도, 그녀의 제안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상황의 자체가 몹시 당황스럽다.

만류하려는 엘빈의 손을 뿌리치고 테이블로 다가온 에린이 두 눈을 빛냈다.

“그럼 싫어하는 건 아니네?”

“그건….”

그런 것은 아니다.

실비아와 재회했을 때 들었던 감정들도 놀람과 반가움이었다.

비록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해버렸던 것인지 서운함과 슬픔의 감정들이 남아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은현 또한 실비아를 특별한 이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품었던 감정들.

애초에 그녀가 싫었다면 함께 여행하지도, 엘프의 마을에서 동거하지도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것과 지금의 이 상황은 전혀 다르다.

당시에는 혼자였던 것과 달리 지금 은현에게는 책임져야 하는 아내들이 네다섯이나 있다.

“현아. 사실 나도…. 우리도 서로 마음이 통해서 지금의 관계가 된 건 아니잖아.”

이것을 에린 스스로가 인정하는 것은 몹시 자존심이 상해서 싫었지만, 에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은현에 대한 감정을 품었고 오랜 노력 끝에 지금의 관계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거기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은 일리아나나 엘레노아, 릴리였다.

엘레노아나 릴리 또한 그렇다.

아마도 베르단디나 일리아나가 엘레노아와 릴리를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애정이 넘치는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처럼 실비아님도 기회가 있었으면 해.”

“…하지만 에린. 이건 경우가 달라. 내가 혼자서 받아들인다고 일리아나나 엘레노아, 릴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들어봐야 할 문제야.”

“나 사실 방금, 이 소식 엘레노아님께 전하고 왔어.”

“뭐…?”

은현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에린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나 통신 구슬 하나 가지고 있거든. 현이한테는 비밀로 하고 우리끼리만 비상 연락망으로 쓰고 있어.”

“…….”

어느새 자신을 제외하고 아내들끼리 이상한 단결을 하는 건지 어이가 없다.

그리고 당당하게 비밀을 밝히기까지.

설마 그새 연락을 취하여 다른 아내들에게 실비아의 소식을 전했을 줄이야.

이건 은현으로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새삼 굉장히 넘치는 에린의 행동력을 재차 실감한다.

지금의 태도를 보아하니, 실비아의 소식은 이미 일리아나의 귀에도 들어갔으리라.

“그…일리아나님이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아니나 다를까 에린의 시선이 은현이 아닌 실비아 쪽을 향했다.

그것은 일리아나의 전언은 은현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실비아에게 보내는 것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네?”

남편인 은현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내는 전언이라는 것을 깨달은 실비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했다.

제대로 된 대화는커녕 일면식조차도 없는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어쩌면 자신의 남편에게 가까이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려는 것은 아닐까.

실비아가 정착해 있는 호문쿨루스 인조 육체는 땀샘과도 같은 기관이 설정되어 있지도 않았음에도,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고, 긴장하게 된다.

“그…조만간 직접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네?”

하지만 에린의 입을 통해서 들은 일리아나의 전언은 경고가 아니었다.

호의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적대적이라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실비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당황한 것은 당연히 실비아뿐만이 아니다.

“에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어째서 당사자인 자신을 제외하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인지 은현이 물었다.

“왜? 실비아님이 싫은 건 아니라면서?”

오히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의아한 반응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직접 얘기해보고 받아들이면 다 해결되는 문제 아니야?”

“너는…. 아니. 다들 그걸로 괜찮은 거야?”

“괜찮지 않았으면, 난 이미 현이랑 맺어지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에린은 살며시 은현의 손을 꽉 맞잡았다.

“우리 때문에 피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일리아나님이 말씀하셨어. 겨우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잖아.”

오히려 실비아의 소식을 들은 일리아나는 웃었다.

은현과 과거에 있었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던 만큼, 이번에는 틀린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며 에린에게 그 마음을 전달했다.

­걔는 이상한 데서 책임감이 항상 넘치니까. 분명 우리를 신경 쓰느라 분명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아가가 잘 말해주렴.

작게 한숨을 내쉰 은현은 다시금 실비아를 마주 보았다.

무언가 결심을 한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실비아는 다시금 긴장했다.

어쩌면 포기했던 차에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대했기 때문이다.

“누나. 저는…. 아마도 누나만을 가장 먼저 생각해주지는 못할 거예요.”

“…괜찮아.”

실비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으로 다시 환생하기 이전, 엘프로서의 생을 마감했을 때, 실비아는 은현과의 미래 대신 엘프라는 종족과 세계수의 미래를 선택했다.

그랬던 자신이 어떻게 자신을 먼저 생각해달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이제는 엘프가 아닌 정령으로서 태어난 실비아는,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몸으로는 아이를 만들 수도 없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은현과 같이 있고 싶을 뿐이었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한 실비아의 답을 들은 은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아내들을 모두 데리고 이곳으로 올게요. 대답은…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겠어요?”

“물론이야.”

실비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정령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흘렀던 시간이 어언 200년.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와준다고 약속만 해준다면, 그 이상도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정말 고마워. 정말….”

실비아는 작게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비록 바로 정령 계약을 할 수는 없지만, 다음에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거절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낀다.

눈물을 흘릴 수 없음에도, 어깨가 떨리며 흐느끼고 있는 그녀가 기쁨과 고마움의 감정들을 주체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시죠.”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엘빈이 실비아에게 복귀를 권유했다.

자신의 호문쿨루스 육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레지나와 원로 엘프들이 제작한 실비아의 호문쿨루스 육체는 아직 미완성의 상태.

자체적으로 마력을 흡수하는 양에도 한계가 존재했고 육체 자체에 보관할 수 있는 최대량이나 소모량의 편차가 심하다.

간단히 말해서 연비가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지금도 원로 엘프들은 은현과 일리아나가 둘이서 개발해낸 엘빈의 호문쿨루스 육체를 재현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상태다.

엘빈을 따라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킨 실비아가 문 앞에 서서 잠깐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고마워요. 현이를 설득해줘서.”

“아니에요!”

에린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된 것에 뿌듯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본 실비아도 큰 은혜를 느끼고 언젠가 보답할 마음을 가슴 속에 새겼다.

“다음에는…더 완전한 상태로 봤으면 좋겠다.”

“일리아나의 아기가 태어나면…. 다 같이 이곳에 올게요.”

“응.”

다음을 기약하며 실비아는 엘빈과 함께 집을 나섰다.

집 안에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에린은 은현과 실비아가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는 것에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히히. 정말 잘됐다. 그치?”

“…에린.”

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에린과 달리, 은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무겁다.

“응?”

“그 비상 연락망. 도대체 언제부터 만들었어?”

아내들끼리 만들었다는 비상 연락망의 존재를 매섭게 추궁해오는 은현의 말에, 기습을 당한 듯 에린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 안 알려줄 거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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