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583화 (566/730)

〈 583화 〉 583. 새로운 선택(1)

* * *

자신의 키에 네다섯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를 보며 에린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족히 몇백 년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 위에 지어진 집의 입구까지 올라가기 위한 나무 계단을 빙빙 돌며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엘프의 숲 전체의 전경이 다양한 각도로 보였다.

그 절경을 무심코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된다.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 집 앞에 도착한 에린은 조심스레 문을 열어 집안의 내부를 살폈다.

나무로 지어진 마루 위, 두 눈에 들어오는 가구들이나 냄새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진짜로 현이가 살았던 집이구나.”

묘하게 가구들의 생김새나 배치들이 비슷하고, 집안에는 은현이나 일리아나, 엘레노아, 릴리의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냄새는 최근 드워프의 마을에 가기 위해서 하룻밤 머물렀던 적이 있었던 은현과 릴리의 냄새였다.

에린이 곧바로 소파 위에 몸을 던져 쿠션에 얼굴을 묻고는 킁킁댔다.

“스으…하아아….”

나무나 풀의 향기가 섞여 있긴 했지만, 은현이나 일리아나, 엘레노아와 릴리의 냄새를 맡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평온해지다 못해 한껏 풀어지며 소파와 쿠션의 푹신함과 냄새를 만끽하고 있었던 에린은 급하게 정신을 차렸다.

“먼저 씻어야지.”

곧 있으면 은현이 돌아올 것이다.

그 전에 몸부터 씻고 상쾌한 상태로 저녁을 준비할 생각이었던 에린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욕실의 시설은 다행히도 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샤워기나 욕조, 화장실 등 갖춰질 건 다 갖춰진 상태로 나무 위에 지어져 있는데도 제대로 된 하수 처리가 되도록 마법이 각인된 아티팩트까지 장착이 되어 있어 제법 공을 들인 티가 났다.

아마도 자신을 포함하여 아내들이 이곳에 왔을 때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은현이 신경을 썼을 것이다.

뜨거운 물을 잔뜩 받아놓고 입욕제를 풀어둔 욕조에 몸을 담그자 몸에 누적되어 있던 피로들이 눈이 녹듯 사라져간다.

“하아. 좋다아….”

약 1주일 동안의 야영 생활을 끝내고 오랜만에 하는 목욕은 정말로 즐거웠다.

목욕을 마치고 평소 집에서 입던 대로 얇은 민소매 셔츠와 돌핀 팬츠를 입은 에린은 곧바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요리를 위한 조리기구들까지 싹 다 최신식으로 배치해둔 탓인지, 간단한 요리 정도는 에린도 준비할 수 있는 수준.

곧바로 에이프런을 몸에 두른 에린이 아티팩트를 작동시켜 불을 켜고 그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두려 했지만.

똑똑

“응?”

집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 에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지?”

노크했다는 것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뜻을 의미한다.

은현은 이 집의 주인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노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윽고 에린은 익숙한 냄새와 낯선 냄새의 두 종류를 알아차렸다.

“이건…. 오빠 냄새?”

익숙한 냄새 쪽은 엘빈이었다.

하지만 낯선 냄새 쪽이 누구인지 에린은 구별해낼 수 없었다.

처음 맡아보는 냄새였지만, 어딘가 엘빈과 비슷하다.

에린은 곧바로 문을 열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맞이했다.

역시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중 한 명은 엘빈이었다.

“오빠? 여긴 어쩐 일이야? 그리고….”

에린은 자연스레 엘빈과 동행한 옆을 바라보았다.

생김새는 사람이나 엘프와 비슷한 모습의 여성.

화사한 금발과 사파이어를 연상시키는 청색의 눈동자는 몹시 아름답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을 제쳐둘 정도로 신경이 쓰였던 것은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다.

그녀는 인간도 엘프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엘빈과 비슷한 냄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엘빈과 비슷한 존재라는 뜻.

여성의 정체를 간파한 에린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엘빈을 흘겨보았다.

“…오빠. 설마 에리스를 버린 거야?”

“…버리다니? 무슨 뜻이냐.”

엘빈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꺼내는 에린을 마주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그게 이분은….”

에린이 무언가 말을 꺼내기가 망설였다.

엘빈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당사자를 앞에 두고 무례한 말을 했다가는 상대방에게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엘빈은 에이프런을 두르고 한 손에는 뒤집게를 쥐고 있는 에린의 행색을 확인하고 흘끗 집안의 주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프라이팬. 타기 전에 불은 꺼두는 게 나은 것 같은데.”

엘빈의 지적에 에린이 움찔 몸을 떨었다.

“이, 일단 들어와!”

황급히 아티팩트의 불을 꺼두고 엘빈과 여성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

엘빈이 에린의 행색을 유심히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뭐?”

미간이 살짝 좁혀 있는 엘빈의 표정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을 참고 있는 불만 어린 표정이다.

평소 무뚝뚝한 표정을 짓던 엘빈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캐치해내는 것은 역시나 에린이 엘빈의 여동생이기 때문이다.

“…너무 살을 드러내는 거 아닌가?”

“뭐?”

“바지가 너무 짧은 것 같은데. 그리고 상의도 그렇고.”

엘빈은 에린이 겨우 얇은 민소매 셔츠 하나와 돌핀 팬츠를 입고 있는 에린의 행색이 몹시 불만인 듯 보였다.

갑자기 엄마가 된 것처럼 자신의 행색을 지적하는 엘빈의 말에 에린이 인상을 팍 찡그린다.

“나 원래 집에서는 이렇게 편하게 입고 다녀. 오빠부터 미리 연락하고 왔어야지!”

에린도 집에서는 누군가가 손님이 올 때면 이렇게 편한 복장을 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원래 손님을 응대하는 것은 집안의 관리를 책임지는 메이드인 릴리의 역할이며, 곧장 릴리가 에린의 옷을 챙겨주기 때문이다.

지금은 막 목욕을 끝낸 참이기도 하고 집안에서 응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맞는 잔소리이기는 했지만, 에린은 자신의 억울한 부분을 곧바로 토로했다.

“후후.”

이윽고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음을 짓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남매는 실랑이를 멈췄다.

“그…. 혹시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손님이 왔으니 무언가 대접을 하고 싶기는 하지만, 엘빈과 마찬가지로 정령과 비슷한 존재라는 것을 간파한 이상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기에 무엇을 대접해야 할지 몰라 에린이 망설였다.

“아뇨. 괜찮아요. 엘빈의 여동생이라고 했나요?”

“아, 네.”

에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반가워요. 저는 실비아라고 해요.”

◆ ◆ ◆

레지나의 회의를 마친 은현은 곧바로 회랑을 나와 자신이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음?”

엘프의 숲에 있는 자신의 집 앞에 도착했지만, 집안에서 들려온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은현이 문을 열기를 잠깐 멈칫했다.

‘손님이라도 온 건가?’

이윽고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다다닥 하는 발소리와 함께 에린이 곧장 현관으로 뛰어와 은현에게 안겼다.

“현아아…!”

“에린?”

은현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의 가슴에 뛰어들고는 그대로 얼굴을 묻는 것은 일상의 애정 표현과 가깝지만, 자신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에린의 얼굴에는 수분기가 가득했다.

“…울었어?”

“흐윽….”

에린은 훌쩍이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현했다.

은현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인기척이 느껴지는 테이블로 고개를 돌렸다.

“왔구나.”

“…어?”

상냥하게 자신을 맞이해주는 여성의 목소리에 은현이 순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근 들어서 자주 듣게 되었던 목소리였지만, 그것은 사념을 담은 마력의 울림으로 자신의 영혼에 직접 말을 거는 정령들의 소통방식.

하지만 지금 들린 여성의 목소리는 성대를 타고 나와 은현의 귓가에 제대로 들린 육성에 가까웠다.

그것도 약 200년 만에 들어보는 아주 반가운 목소리.

이제는 바람의 정령이 되어버린 실비아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최근에 보았을 때와는 몹시 달라져 있었다.

정령은 계약자의 마력을 통해서 이 하계에 모습을 현현할 수 있는 자연의 존재들.

현현한 정령의 몸은 오로지 마력으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는다.

일반인들에게는 보이지도, 듣지도 못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던 실비아는 현재, 틀림없이 실재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실비아…. 누나?”

지금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나 싶은 표정은 이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뀌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눈앞에 나타난 여성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응.”

실비아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니. 잠깐….”

“에린.”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을 때, 엘빈이 은현의 품에 안겨서 훌쩍이고 있는 에린을 불렀다.

“…응.”

“잠깐 밖으로 나와라.”

에린은 은현과 실비아가 둘만이 있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자는 엘빈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은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현아. 나 실비아 님한테 다 들었어.”

“그건….”

자신과 실비아, 엘프의 숲 사이에 얽혀 있던 사연을 모두 들었다는 것을 깨닫고 은현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왜 말 안 해줬어? 많이…힘들었겠다….”

에린은 살짝 서운해하며 다시 은현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었다.

“…미안해. 그냥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어.”

일리아나나 엘레노아가 자신의 과거를 들었을 때, 둘의 마음이 울적해졌던 것을 생각하면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위로의 의미를 담아 에린의 이마를 쓰다듬어주자, 에린이 다시 고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다 듣고 싶어. 현이의 이야기.”

“…그래. 알았어.”

“응.”

에린은 은현에게서 확답을 듣고 나서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현에게서 떨어졌다.

“실비아님하고 이야기 끝나면 불러줘. 우린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어.”

에린과 엘빈이 집을 나가자, 안에는 은현과 실비아만이 남았다.

은현은 이곳에서 실비아와 단둘만이 있게 되자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200년 전의 기억이 향수처럼 되돌아온 기분이다.

“…누나. 지금 누나의 몸.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게 맞나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은현은 곧바로 머릿속에 자신과 일리아나가 만들어낸 엘빈의 호문쿨루스라는 인조 육체를 떠올렸다.

“맞아. 여왕님께서 세계수의 나뭇가지들로 수십 명의 원로분들이 함께 이 몸을 만들어주셨어.”

“하, 하하….”

은현은 작게 헛웃음을 지으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설마 엘프들이 자신과 일리아나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호문쿨루스를 이렇게 단기간 안에 제작할 수 있게 될 줄이야.

생각도 하지 못한 의외의 변수였다.

“엘빈이 도와줬어.”

실비아는 헛웃음을 짓고 있는 은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맞혔다.

엘프들의 기준에서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인간들의 기준에서는 오랜 시간을 같이 여행하고 동거했던 관계다.

실비아에게는 은현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떠오른 자신의 의문을 실비아가 해소해주자 은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엘빈이?”

“응.”

발단은 실존하는 매개체에 정령을 정착시켜 정령에게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육체를 부여한다는 이 호문쿨루스 인조 육체에 원로 엘프들이 깊은 흥미를 보인 것이었다.

선대 엘프 여왕 때부터, 오랜 삶을 살아왔던 원로 엘프들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의 숫자만큼이나 깊은 탐구심을 가진 이들.

그런 이들이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새로운 지식의 결정체가 눈앞에서 버젓이 걸어 다니고 있는데, 어찌 참을 수가 있을까.

원로 엘프들은 그 지식의 결정체인 호문쿨루스 인조 육체를 탐구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게다가 호문쿨루스의 제작에 사용되었던 재료가 세계수의 나뭇가지라는 것 또한 몹시 흥미로운 주제였다.

결국엔 레지나와 수많은 엘프들의 회의에서 안건으로 나올 정도였고, 정식으로 호문쿨루스의 제작 연구 안건이 체결되었다.

실비아에게서 엘프의 숲 안에서 일어난 자세한 내막을 들은 은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발명에 미친 건 드워프들이나 엘프들이나 똑같네.’

드워프들이 땀을 흘리며 최고의 무기들을 제작하는 것에 광적으로 몰두하는 것이나, 새로운 마법 지식의 결정체를 탐구하기 위해 밤낮을 새워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엘프들이나.

추구하고 몰두하는 과정이나 방식이 다를 뿐, 그 본질들은 어딜 가나 변하지 않는다.

아무튼, 호문쿨루스의 제작이 정식 안건으로 체결되면서, 엘프들의 여왕인 레지나가 현재 엘프의 숲 안에서 엘빈이 머무르고 있는 데르킨의 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은현과 일리아나가 개발해낸 호문쿨루스의 제작 기술에 대해 연구를 하고 싶으니 부디 그 첫 번째 케이스인 엘빈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이 전개.

엘빈은 별다른 고민도 없이 레지나의 부탁을 수락했다.

애초에 자신의 육체를 제작하는데 반드시 필요했던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제공해주었던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정령이기도 했던 엘빈은 ‘숲의 주민’들의 정중한 부탁을 거절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엘빈은 자신과 같은 호문쿨루스 인조 육체에 정착될 정령으로 직접 실비아를 지목했던 것이 지금 실비아가 엘빈과 같은 호문쿨루스의 인조 육체를 가지게 된 결말이다.

“쓸데없는 짓을….”

은현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레지나에게서 실비아와 은현 사이에 얽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들었던 것에 대한 엘빈 나름대로의 배려였을 것이다.

“후후. 난 고마웠어.”

실비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은현에게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은현의 뺨에 가느다란 자신의 손가락을 대어 어루만졌다.

“이렇게…. 널 다시 만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만들어졌지만, 살아있는 엘프의 육체와도 다를 바가 없는 실비아의 손가락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제는 다시는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온기를 느낄 수가 있게 된 것에 그저 감사하게 된다.

“현아.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지 않을래?”

“부탁이요?”

“나와 정령 계약을 해줬으면 해.”

“네? 그건….”

실비아는 현재 엘프 여왕인 레지나와 계약중인 상태다.

정령과 인간 사이에는 이중계약 같은 것은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다.

즉 은현과 정령 계약을 맺으려면 이전에 맺었던 레지나와의 계약을 파기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여왕님께 허락은 받아두었어. 그리고 이제…. 나는 이제 엘프가 아니잖아.”

“하지만….”

“나는 엘프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어.”

다크엘프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었던 실비아는 엘프들과 은현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목을 긋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당시 인질이 되었던 모든 엘프가 그 선택을 스스로 골라 자결했다.

종족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서 했던 그 선택에 후회와 미련 따위는 지금도 없었다.

하지만 정령으로 되살아난 실비아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언제나 은현의 머릿속에 최악의 경험을 심어주었다는 자책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실비아는 자신과 계약을 해준 레지나에게 간청했으며, 레지나는 실비아의 청을 흔쾌히 수락해주었다.

“이제는 엘프로서 사명에 얽매일 생각은 없어. 정령으로서 내 의지가,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어.”

“…….”

“네 곁에 함께 있고 싶어.”

이제 와서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실비아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은현보다 종족과 세계수의 미래를 선택했던 자신이, 이번에는 한 번 포기했던 은현의 곁에 다시 있고 싶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이기적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만약 은현이 허락해준다면, 용서해준다면.

이번에는 그를 선택하고 싶다.

“안…될까?”

실비아는 긴장이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은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