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2화 〉 582. 숲의 개방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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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과 떨어져 잠시 개별 행동을 하게 된 은현은 엘븐 가드 엘프의 안내를 받아 곧장 이동했다.
“여왕이시어. ‘숲의 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짙은 색깔의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 너머로 온화한 엘프 여성의 목소리가 은현의 입실을 허가했다.
웅장하면서도 자연의 온화함이 가득한 회랑의 끝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엘프 여왕 레지나가 미소를 지으며 은현의 방문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선생님.”
“그래.”
은현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레지나의 환영에 화답해주었다.
레지나의 가녀린 손이 작게 허공을 휘젓는 시늉을 하고는 손바닥으로 회랑의 중심에 있는 원탁 테이블의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몇 번인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레지나의 저 의미가 저곳에 앉아달라는 상냥한 배려임을 은현은 곧바로 알아보았다.
레지나의 권유에 따라 은현이 자리에 앉자 손을 내저으며 회랑에서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모든 엘븐 가드 엘프들을 물렸다.
한 명쯤은 그럴 수 없다면서 레지나의 호위를 유지하겠다고 고집을 피울 법도 한데, 엘븐 가드 엘프 중에는 단 한 명도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레지나가 단 한 명의 은사로서 은현은 존중과 존경의 마음을 깊게 품고 있고, 숲의 주민인 엘프 전체가 ‘숲의 은인’이라고 불리는 은현을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끔 이러한 신뢰가 굉장히 무거울 때가 있어, 은현은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덕분에 드워프들과 적절하게 협상을 할 수 있었어.”
은현은 소개장을 써주면서 드워프들과의 접선을 도와주었던 레지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드워프들과 어떠한 협상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올 결심을 하였고, 오랫동안 끊어버렸던 외부와의 교류를 다시 실시하게 된 지금까지의 정황을 설명했다.
드워프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종족 전체를 이주시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은현의 능력과 수완 덕분이었지만, 빠른 기간 안에 그것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레지나의 소개장으로 중개를 본 덕이 적지 않았다.
“그렇군요.”
레지나는 진지한 얼굴로 은현의 말을 귀담아 경청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정황을 듣고서 총명한 그녀가 이 다음의 단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다음은…저희의 차례겠군요.”
“준비는 해야겠지.”
드워프는 은현의 중재로 이미 모그라프 변경령이나 아르미타스 공작령으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다.
드워프에 이은 이 다음의 차례로, 자신들의 종족인 엘프도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할 준비를 해야만 했다.
문화나 종족의 차이에서 오는 사고방식이나 생활 습관의 괴리는 천차만별이라 할 정도였지만, 이것은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시작지점을 빠르게 잡는 것은 나중을 위해서라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일 터.
“선생님.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는….”
“알아. 드워프들처럼 종족 전체가 이주하는 것은 나도 바라지 않아. 너희들의 근본적인 삶의 이유는 이 숲과 세계수를 지키는 것이니까.”
세계수는 이 대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신목이다.
그 세계수를 지키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짊어지는 엘프들에게 은현도 무리한 강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숲을 지키고 있는 결계를 해제하고 인간들과 교역을 하는 것. 그리고 외부로 세상을 견문하고 싶어 하는 엘프들을 통제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면 충분해.”
“음….”
웬만한 은현의 부탁이라면 모조리 들어주는 레지나가 처음으로 즉답을 하지 않고 보류했다.
잠깐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숲속에 틀어박혀 백년 천년을 살며 세계수를 지키는 사명을 이어나가는 것은 모든 엘프의 사명이기는 하지만, 바깥세상을 견문하고 싶어 하는 엘프들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을 은현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조건은 그렇게 허락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반면에 첫 번째 조건은 그렇지 않다.
인간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숲의 결계를 해제한다는 것은 그와 동시에 외부의 위협에서 엘프의 숲이 무방비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엘프라는 종족과 세계수의 명운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의 자리에 앉아있는 레지나로서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문제다.
‘사실 바깥으로 진출하려는 엘프들을 통제해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운 일이지.’
그래서 은현은 첫 번째 조건은 그냥 버리는 용이고, 두 번째 조건이 승낙되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었다.
“두 번째 제안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이미 데르킨의 사례가 있으니까요.”
데르킨은 이미 아내와 딸 아이를 데리고 은현을 따라 숲의 바깥으로 한차례 나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다른 엘프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엘프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최근에도 바깥세상에 대해 잘 모르는 젊은 엘프들이 바깥세상을 견문하고 싶다는 안건이 자주 올라오고는 했다.
데르킨의 사례가 의외스럽게도 숲의 내부에 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던 탓에 두 번째 조건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첫 번째 조건은…. 이건 원로들을 설득해봐야 할 문제네요.”
“음?”
하지만 레지나의 대답은 굉장히 의외로 은현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어? 왜 그러세요. 선생님?”
“아니…. 생각보다 첫 번째 조건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서 놀랐어. 이건…. 여왕으로서는 고민해봐야 하는 문제잖아.”
“아아, 후후.”
은현이 말하는 바의 의미를 깨닫고 레지나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가르쳤던 엘프 소녀가 몇백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기품이 넘치는 여왕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거야 선생님의 제안이니까요. 사실은 결계를 해제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보완할 방법도 설득을 위해서 준비해두셨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설득할 재료들을 준비하였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리스크가 존재하는 제안을 종족과 세계수를 책임지는 여왕인 레지나의 입장에서는 결코 호의적으로 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은현도 버리는 카드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지나는 그런 은현의 예상과는 달리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다른 이의 제안이었다면 절대로 고민조차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선생님의 제안이잖아요.”
은현이라면 당연히 그 제안은 물론 그 뒤에 벌어질 문제들을 대비할 보완책도 준비해두었을 것이라 레지나는 확신했다.
“어차피 선생님의 계획이 틀어진다면…. 위험해지는 건 인간들뿐만이 아니라 저희 엘프와 세계수의 멸망으로도 이어지겠죠.”
이전에 은현이 이 문제에 대해서 레지나에게 상담했을 때, 흔쾌히 수락해주었던 이야기와 똑같다.
“그렇다면 저는 차라리 선생님께 걸어보겠습니다.”
엘프 여왕으로서, 자신의 종족 전체와 세계수의 명운을 은현에게 맡기겠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다.
그 책임감에 안 그래도 무겁게 느껴지던 은현의 어깨가 더욱 축 처지며 쓴웃음을 자아낸다.
“가끔가다 네 생각이나 그 무조건적인 신용은 정말로 무서울 때가 있어.”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것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한숨이 나온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믿으시는 만큼 저에게 되돌려주셨으니까요.”
그 말 그대로다.
은현은 줄곧 믿어왔던 레지나의 신뢰를 배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200년 전의 다크 엘프와의 항쟁 때도.
작년에 있었던 다크 엘프와의 재전과 세계수의 부활도.
고대 마수와의 교전도 모두 은현과 그의 아내들이 나서준 덕분에 지금의 엘프들과 세계수는 무사히 있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은현에게 걸어보는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으리라 레지나는 확신했다.
“일단은…결계가 풀리면서 인간들과 교역을 하게 된다면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어.”
종족의 차이, 문화, 사고방식과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다름’이라는 것은 갈등이라는 것으로 발전되기 매우 쉽다.
특히나 교역의 경우에는 이권이라는 것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도 쉽고 빈번히 일어나는데 엘프들과의 교역이 그에 비해 많았으면 많지, 결코 적지 않을 터.
“이 부분은 교류가 시작될 예정인 페르니아스 왕국의 사람 쪽과 레지나, 네가 직접 만나서 조약을 맺고 법률을 제정해서 규율을 만들어야 해.”
이에 대한 세세한 내용과 조항들은 은현이 중재해서 만들어줄 예정이긴 하지만, 유리아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여왕이 되기 위해서 알렉스에게서 제왕학을 배우는 중이라 정신이 없다.
아마도 이러한 복잡한 문제는 여러 핑계를 대면서 은현에게 미뤄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엘프들의 자체적인 전투력의 강화를 할 필요가 있어.”
숲을 지키는 결계를 해제한다면 당연히 외부에서 이빨을 들이미는 위협에 대해 노출되는 것은 당연할 터.
물론 일리아나가 설치해준 강력한 방호 결계가 아직도 유지 중이긴 하지만, 엘븐 가드 엘프들의 개인 전력을 향상시켜둬서 나쁠 것도 없다.
이 숲의 영역에서는 엘프들의 주특기인 궁술과 정령술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전술을 펼칠 수 있기에 유리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궁술은 화살이라는 소모품을 사용하는 기술이며, 엘프들은 날렵한 신체 능력과 우월한 마력을 타고났기에 원거리 공격에는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것이 큰 특징.
하지만 상대적으로 근접전에는 굉장히 약하다.
“엘프들에게…. 검술을 가르쳐주시는 건가요?”
은현의 가르침으로 지금의 엘븐 가드 엘프들은 기초적인 검술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다음 단계를 나아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 역할을 맡는 것은 은현이 아니었다.
“근데. 그건 내가 아니라, 내 친구가 맡을 거야.”
은현이 리오드와 차한성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는 그들의 수련을 돕기 위해 세계수의 마력이 깃든 이 영산을 소개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엘프들의 검술 수련에 두 사람을 어울리게 하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른바 서로가 상부상조하도록 하게 만들기 위함.
게다가 인간들과의 교류가 시작된 것을 증거로 인간에게서 배운 검술로 엘프들의 전력이 향상되었다는 긍정적인 효과도 노려볼 수 있다.
“과연….”
“실력은 보증할게. 무려 앨리스의 옛 동료이기도 하니까.”
“앨리스의…. 그렇다면 확실하겠군요.”
엘프도 아니면서, 인간으로서 엘프와 맞먹는 정령술을 발휘하는 앨리스의 동료라면, 분명 검술이라는 영역에서 특출난 재능을 가진 검사일 것이라고, 레지나도 확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드는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하나의 기사단은 운영하는 기사단장인 자신을 이런 곳에 써먹을 줄은 몰랐다며 투덜거리면서도, 그만큼 받은 게 있었던 만큼 은현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 틀림없다.
레지나는 순간 은현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가 문득 의문이 들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선생님. 검술을 선생님과 앨리스의 친구분이 맡아주신다면…. 선생님께서는 따로 일정이 있으신 건가요?”
“…그렇지.”
진지하게 인간들과의 교류를 위해 다양한 부분을 어필하고 계획을 설명하던 은현이 설명을 마치자 살짝 한숨을 내쉬며 긍정했다.
무언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몹시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난 레지나. 너와의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이후에는 함께 온 내 아내와 함께 북쪽으로 갈 예정이야.”
“북쪽이요? 그곳에는 왜 가시는데요?”
태어나면서 여왕이 된 지금까지 평생을 이 숲속에서 보내왔던 레지나가 바깥세상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가르쳤던 은현이 들려주는 바깥세상의 이야기는 엘프 공주였던 레지나의 동심을 자극하는 모험들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보여주는 호기심 어린 레지나의 시선을 받은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그게…. 검을 만들 재료를 찾으러.”
“네? 검의 재료요?”
레지나는 은현의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검 한 자루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굳이 먼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옮긴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검이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무기가 아니었기에 이해하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선생님이 직접 제작해서 사용하시려는 건가요?”
“아니…. 나한테 검을 만들라고 떼를 쓰신 분이 계셔서….”
이것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대장장이로서 검사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검을 만든다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일 두려운 것은 최고의 재료로 자신의 체력과 영혼을 갈아 넣어 진짜로 열심히 만들었는데, 자신의 스승인 시에테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다시 만들어라.’라고 꼬장을 부릴까, 그것이 정말로 두렵다.
“도대체 나이가 몇이신데 아직도…. 하아….”
급격하게 한숨을 내쉬는 은현을 보고, 레지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은현이 이렇게 피곤해하는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선생님을 이렇게 피곤하게 만드실 수 있는 거지?’
레지나는 몹시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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