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581화 (564/730)

〈 581화 〉 581. 아버지들

* * *

세계수의 마력이 가득한 영산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은현과 에린, 차한성과 리오드는 캠프가 아닌 엘프의 마을로 복귀했다.

아무리 훈련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야영을 장기간으로 유지하면서 필요한 소모품을 보충함과 동시에 엘프의 마을을 관광하지 못한 에린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특별한 조치였다.

“와아…!”

생전 처음 보는 엘프의 마을을 보고 에린이 탄성을 터뜨렸다.

하나같이 몇백 년은 된 듯 커다랗고 울창한 나무들이 위로 곧게 뻗어 있어 햇빛을 가리고 있지만.

수많은 잎사귀 사이로 비쳐 바닥을 밝히는 햇빛이 눈이 부시면서도 따뜻하여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거대한 고목의 굵은 나뭇가지 위에 지어진 수십 채의 집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으면서도 자연스레 숲속에 녹아든 절경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엘프의 영역으로 들어왔으면서 관광조차도 해보지 못했던 아쉬움을 털어버릴 정도로, 감탄사를 흘리는 것은 당연히 에린뿐만이 아니다.

“…대단하군.”

“이곳이…엘프의 숲….”

마찬가지로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리오드와 차한성의 표정 또한 에린 못지않게 넋을 잃고 숲의 마을 절경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리오드.”

은현이 사전에 연락을 해두었던 대로, 네 사람을 마중 나온 것은 이 엘프 마을에 체류 중인 유일한 인간이자, 은현과 리오드의 옛 동료였던 앨리스였다.

“환영합니다! 여러분!”

그리고 그녀와 동행한 남편인 데르킨이 웃으며 네 사람을 반겼다.

이전에는 엘븐 가드의 수색 조장으로서 싸움의 최전선에 엘프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차단했던 능력 있는 엘프였지만, 지금은 그 지위를 내려놓고 언젠가 있을 인간과 엘프 사이의 중재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인간 여성을 아내로 맞이한 엘프인만큼, 이 역할에 어울리는 엘프는 그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에린.”

“네! 데르킨님! 혹시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오빠가 말썽을 부리지 않았나요?”

데르킨은 잠깐 동안 딸 아이인 에리스를 데리고 아내인 앨리스를 따라와 아르미타스 공작령 안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 에리스가 이상하리만치 에린의 오빠인 엘빈을 졸졸 따라다니며 붙어 다녔던 것을 계기로 데르킨과 에린의 사이에도 안면이 있었던 만큼 이번 재회가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말썽을 부려주었으면 좋겠는데.”

오히려 곤란한 듯 데르킨이 속마음을 솔직히 밝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 모습이 예상외였던지라, 에린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딸이 엘빈에게서 전혀 떨어지지 않아.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더 지날수록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어.”

이러다가 성년이 되면 아예 엘빈과 평생 함께 살고 싶다고 말을 해오는 것이 아닐까 심히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엘빈을 떼어놓으려고 하면 아빠인 자신에게 울며불며 ‘아빠, 정말 싫어!’라고 칭얼거리니 그 말이 비수처럼 꽂혀 가슴 속 상처를 헤집어지는 데르킨으로서는 그것조차도 불가능하다.

차라리 엘빈이 큰 잘못이라도 해서 아예 그것을 구실로 에리스와 영영 떼어놓을 수만 있다면 그것도 매우 좋지만.

엘빈은 정령이면서 엘븐 가드의 구성원으로서 임무를 확실히 수행하고 있으며 에리스를 확실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당신도 참….”

앨리스는 남편의 극성스러움에 쓴웃음을 지었지만, 엘빈의 존재를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에리스의 어리광을 잘 받아주고 확실하게 보호까지 해주는 것도 모자라, 정령사로서의 소질을 키우는 데도 큰 도움을 주고 있는데 고마웠으면 고마웠지 엘빈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데르킨이 엘빈을 싫어하는 것은 에리스의 성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고 이것저것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엘빈에게 빼앗겨버렸다는 것에 대한 유치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부쩍 성장하고 있는 딸 아이가 완전히 갑자기 튀어나온 정령에게 응석을 부리면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데르킨이 한숨을 내쉬며 고민을 토로했다.

“아, 아하하…. 설마 그렇게까지야….”

그 원흉이 다름 아닌 자신의 오빠라는 것에 에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우물쭈물했으나.

“…이해한다.”

데르킨을 위로하는 말은 전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비록 종족이라는 카테고리는 전혀 다르지만, 아버지로서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는 리오드의 긍정은 데르킨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

“…예?”

“나도 말이지. 최근에 나타난 어떤 도둑놈이 내 딸을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

“…흡!”

날이 선 목소리로 불편한 기색을 감추기는커녕 대놓고 드러내는 리오드의 말에 차한성이 어깨를 움찔 떨며 숨을 삼켰다.

“이미 너무 늦었다. 거슬렸다면 그 시점부터 진즉에 치워버렸어야지. 그러지 못한 지금에서는…. 그냥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게 낫다.”

그것은 데르킨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뿐만이 아니라 그러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처럼 들렸던 것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그럴 수가…!”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리오드의 말에 데르킨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말로…방법은 아예 없는 겁니까!?”

데르킨은 실낱같은 희망의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다는 표정으로 리오드를 바라보았다.

나이는 엘프인 데르킨 쪽이 더욱 위일 진데, 데르킨이 존대하고 리오드가 반말을 하는 기이한 상황.

마치 현자를 맞이하여 지혜를 구하는 대상 쪽이 인간인 리오드라는 점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쩐지 우습기 짝이 없다.

“…쟤들은 뭔 얘기를 하는 거야.”

이상한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본 은현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늠름하고 대단한 기사의 이미지가 살짝 부서져 가고 있는 것을 깨달은 에린도 어이가 없어 작게 탄식했다.

“와….”

저 대화에 도저히 낄 수 없어서 눈치를 보던 차한성을 내버려 두고 에린이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는 리오드와 차한성에게서 거리를 벌려 은현 쪽으로 가까이 붙어 은현의 귓가에 속삭이며 그를 불렀다.

“…현아.”

“응?”

“리오드님. 저 말씀…. 차한성님. 들으라고 하시는 말씀이시지? 그렇지? 그런 게 틀림없어.”

저렇게 대놓고 말을 하면서 눈치를 주다니, 일부러인 것이 분명하다.

그저 말과 눈빛만으로 상대방을 위축시키는 것으로 숨을 멈추게 하는 것을 보면, 역시나 페르니아스 왕국 최고의 기사라는 칭호가 괜히 부여된 것은 아니라는 감탄까지 들 정도다.

“…저 녀석도 가끔은 어른스럽지 못할 때가 있으니까.”

가족들이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특히나 아내인 테리지아나, 딸인 에이라의 경우에는 더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것은 기사이기 이전에, 아내와 딸을 사랑하는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이도 나중에는 저럴까?”

“응?”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여 은현이 의아한 반응을 보이자, 에린이 자세히 말했다.

“그게…. 만약에 일리아나님의 아기가 태어났는데, 딸이라면…현이도 저 두 분처럼 행동할 것 같아.”

“…….”

딸 아이를 가진 아버지로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리오드와 데르킨이 같은 반응을 보이기 때문일까.

에린은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나랑 현이의 아기가 태어나면….”

에린은 그 이상을 말하기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다.

리오드와 데르킨처럼 자신의 아기를 아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이내 확신에 찬 에린의 표정은 어떠한 희망 사항을 말하듯 조심스레 떨렸고, 자신의 팔을 꼭 끌어안으며 당기는 에린을 보고 은현이 피식 미소지었다.

“왜? 아기 가지고 싶어?”

“어, 으, 응?”

직설적인 은현의 물음에 머뭇거리며 얼굴을 붉혔던 에린이 당황하여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은현은 자신의 팔 한쪽을 끌어안고 있는 에린의 허리를 반대쪽 팔로 재빠르게 휘감으며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허리를 감겨 위로 살짝 들어 올려지자 에린의 발꿈치가 위로 살짝 떠 올라 은현의 얼굴과 가까이 마주하게 된다.

“왜, 왜 이래애…! 다들 보는데…!”

많은 사람이 보는 앞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애교가 가득한 애정 공세를 펼쳤던 것과는 달리, 반대로 애정과 관심을 과도하게 받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당황한 에린이 얼굴을 붉히며 은현의 가슴을 두들기면서 저항했지만, 그 저항이 너무도 약해서 정말로 싫은 건지, 아니면 좋아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은현은 어린 아내의 귀여운 모습을 눈에 담고 웃으며 자신 쪽으로 더욱 밀착시켜 끌어안았다.

그리곤 가까워진 에린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원한다면 지금 바로 집에 가서 아기 만들기 해도 되는데?”

“히익!?”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늑대를 눈앞에 둔 순한 양과도 같은 에린은 구미호의 상태였다면 여우 귀와 아홉 꼬리가 바짝 털을 곤두세우며 화들짝 놀랐을지도 모른다.

“바, 바보! 변태!”

하지만 이 스킨십을 마냥 싫어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애정을 고파하는 에린의 속마음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밀착한 상태이기에 에린의 가슴에서 쿵쿵 울리는 시끄러운 고동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조금 이따가 갈게. 기다리고 있어.”

“몰라아….”

에린은 은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푹 숙이고는 새빨개진 자신의 얼굴을 숨겼다.

“데르킨. 에린에게 내 집까지 안내해줘. 나는 레지나와 얘기를 좀 해야겠어.”

“알겠습니다. 리오드님! 오늘은 이 친구와 함께 제집에서 하룻밤을 묵으시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아내도 좋아할 겁니다!”

“그럼요. 리오드.”

앨리스도 남편의 의견에 동의하고는 웃으며 리오드의 방문을 반겼다.

이윽고 옆으로 시선을 옮겨 어정쩡하게 서 있는 차한성에게로 시선을 옮겨 그에게도 숙박을 권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리오드와 함께 저희 집에서 하룻밤 지내세요.”

“아, 저는….”

차한성은 곧장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리오드와 데르킨 사이의 저 대화를 옆에서 계속 들어야만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완전히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에린 쪽에 붙어서 이곳에 있는 은현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자니, 날마다 신혼처럼 보내는 저 부부의 사이에 끼는 것은 다른 의미로 더욱 싫었다.

‘아 씨…. 그냥 노숙이 편할 것 같은데….’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차한성은 노숙이라는 제3의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그에게는 선택권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뭐 하고 있지? 바로 데르킨과 앨리스의 집으로 향한다.”

“…옙.”

차한성은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가시밭길 행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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