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9화 〉 579. 암사자의 시험(5)
* * *
쿵!
차한성은 자신의 앞에 던져진 한 쌍의 팔찌와 발찌들, 그리고 조끼를 바라보고는 몸을 움찔 떨었다.
장비들이 바닥과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와 땅의 진동이 몹시 심상치 않았다.
침을 꿀꺽 삼킨 차한성이 장비들에 부착된 것들의 정체가 납덩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차한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지구에서 읽었던 만화책에서나 가능했던 무식한 수련법이다.
납덩이가 들어있는 장비들을 일부러 착용하여 부담을 짊어지고, 그것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자신의 근력과 민첩성을 향상시키는 말도 안 되는 방법.
“이게…뭔가요?”
차한성은 일부러 그 만화책 속 내용을 머릿속에서 강제로 지워버리고 애써 모른 척하며 은현에게 물었다.
제발 자신이 짐작한 것이 아니기를 빌었지만.
“차한성님. 그 만화책 보셨잖습니까.”
은현과 차한성이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화제로 올라왔던 이야기가 바로 차한성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만화책의 내용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프리저를 공통으로 뽑았으며, 그 캐릭터가 자신의 직장 상사였다면 제일 먼저 나서서 지쿠를 팔아넘겼으리라는 장난스러운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은현의 저 발언은, 현재 차한성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이런 젠장!’
자신의 간절함이 결국 닿지 않았다는 것에 절망하며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느샌가 옷을 갈아입고 텐트에서 나온 에린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은현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현아. 만화가 뭐야?”
“있어. 그런 게.”
은현은 싱긋 웃어 보이며 에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현이는 차한성님하고 있으면 가끔가다가 이상한 소리를 해.”
에린은 아까 이야기했던 ‘스킬 숙련도’나 ‘HP’, ‘MP’와 같은 알 수 없는 개념으로 자신들끼리만 이야기를 진행한 것에 소외감을 표출했다.
더욱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은현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는 그녀의 애정 표현이 꽤 귀여웠다.
“미안해. 화 풀어.”
“현이가 하는 거 봐서!”
하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만으로도, 에린은 다시 배시시 웃으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주인의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는 강아지처럼 보이지 않는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만 같았다.
은현은 그렇게 품에 들어와 있는 에린을 다독였다.
그리곤 아직도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믿지 못하는 듯 멍한 표정을 짓는 차한성을 바라보았다.
“바로 착용하세요.”
“아니. 하지만….”
차한성은 머뭇거리며 무시무시한 무게의 납덩이들이 들어있는 장비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까까지 가득했던 의욕과 기대들이 나무가 부러지듯 허무하게 꺾여나간 그는 지금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진짜 효과가 있는 훈련이라고?’
만화 속 설정으로만 알고 있었던 무식한 훈련을 설마 자신이 하게 될 줄이야.
“훈련의 내용은 아주 간단해요. 에린을 붙잡으시면 됩니다.”
“…예?”
너무 간결하게 줄인 과제의 내용에 차한성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에린을 추월하라니.
이해하지 못한 차한성의 반응을 보고, 은현은 더 자세한 설명을 이었다.
“지금부터 에린은 차한성님을 피해서 이 숲을 누비며 달릴 겁니다. 차한성님은 그런 에린을 붙잡으시면 되는 거죠. 쉽죠?”
“…….”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얼이 빠진 표정을 짓는 차한성의 시선이 멍하니 장비들을 향했다.
“이걸 착용하고 말입니까?”
“예.”
“아니. 어떻게 그런…?”
누가 들어도 불합리한 과제를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안 그래도 에린의 신체 능력은 아르티아의 평기사들은 간단하게 압도할 정도.
이런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는 페널티를 짊어진 채로 에린을 붙잡으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물론 차한성님만 이 장비를 착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에린.”
“응.”
은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린이 은현의 몸에 엉겨 붙어 있던 팔을 풀고 차한성에게 다가갔다.
에린은 평소에 입고 있던 요염하면서도 청순함을 드러내는 전투 시 복장이 아니라, 정말로 훈련을 위해서 입은 듯 트레이닝복을 착용하고 있다.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마치 고등학생이 학교 체육복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비주얼의 에린에게서 어떠한 위화감을 느꼈다.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다가올 때마다, 그녀의 발걸음에서 묵직함을 느꼈다.
가볍고 날랜 동작들이 주를 이루었던 만큼, 전혀 다름을 보여주고 있는 지금의 에린의 복장은 어딘가 평소보다 두툼하다.
“설마…?”
차한성은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차한성님. 제 팔 한번 잡아보실래요?”
“예? 큭!?”
얼떨결에 에린이 앞으로 내뻗은 팔을 붙잡은 차한성은 그녀의 팔에 채워져 있는 장비의 묵직함에 경악했다.
에린이 순간적으로 힘을 빼자, 그 무게를 온전히 자신이 지탱하게 되면서 팔에 채워져 있는 장비의 중량을 가늠했다.
‘…내 것보다 무거워.’
과장을 살짝 보태서 약 2배 정도.
그것을 양다리와 양팔에, 심지어 상체의 조끼에도, 도저히 평범한 성인 여성이 감당할 수 있는 중량이 아니다.
웬만한 모험가나 기사들도 이 무게를 전신에 짊어지고 산속을 뛰어다닌다고 생각하면 기겁하며 도망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외관적으로는 매우 아름답고 가녀려 보이는 에린은 이 중량을 태연하게 버티고 있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아.’
차한성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에린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막대한 기운.
‘마력으로…신체를 강화했어?’
굉장히 커다래서 순간 숨을 멈출 정도였지만, 처음에는 멀리서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고요하고 안정적이다.
피부를 자연스럽게 덮고 있어,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그 자연스러움이 도리어 차한성을 놀라게 만든다.
“이걸로 조건은 같습니다.”
은현이 그렇게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에린에게 부과된 페널티가 더욱 무겁다.
여기서 차한성은 더욱 불만을 표시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장비들을 착용했다.
“크….”
차한성은 무심코 신음했다.
양다리와 양팔, 그리고 조끼까지 모든 장비를 착용하고 나니, 전신에 가해지는 중량의 부담이 자신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앞으로 한 발을 내딛기조차 쉽지 않은 수준에 식은땀이 절로 나왔다.
“자, 그러면 시작하도록 하죠. 에린.”
“응!”
짜악!
힘차게 친 은현의 박수 소리가 훈련의 시작을 알렸다.
에린은 조건 반사처럼 빠르게 사라지듯 울창한 나무들이 가득한 산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런…!”
반면 어정쩡하게 서 있었던 차한성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훈련의 내용을 설명하기 이전부터, 텐트 안에서 모든 장비와 트레이닝복을 착용하고 나온 에린은 훈련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두고 있었던 상태.
전신에 마력을 두르며 신체를 강화하고 은현의 신호가 떨어지기만 하면 바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에린과는 달리, 차한성은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장비의 부담에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급하게 자신의 마력을 끌어올려 신체를 강화한 차한성이 이미 숲속을 앞서 달리고 있는 에린의 뒤를 쫓았지만, 시작부터 벌어진 격차를 좁히기는 쉽지 않았다.
‘실수했어…!’
만약 이것이 훈련이 아니고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면, 약간 과장된 말로 자신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장비를 착용하자마자, 또는 그 이전부터 신체를 강화하지 않고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에 이를 갈았다.
조급한 마음을 품고 앞을 달리고 있는 에린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더욱 많은 마력을 끌어올려 몸을 강화하고 속력을 높였지만, 에린과의 격차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좁혀지기는커녕 제대로 된 직선 코스도 없는 이 울창한 숲속에서 제집처럼 마음껏 뛰어다니는 에린과 점점 더 벌어졌다.
‘어떻게 저런 속도로…!’
감속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 더욱 가속하면서도 좌우로 능숙하게 방향을 틀어 숲속을 누비고 다닌다.
장애물이 굉장히 많은 숲속의 특성상 제대로 가속하지 못하고 있는 차한성의 눈에는 야생의 동물처럼 날랜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는 에린의 질주가 경악스러웠다.
게다가 달리면 달릴수록 착용한 장비의 무게들이 더욱 가중되어 차한성의 몸을 짓눌렀다.
마치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자신의 몸을, 땅에서 튀어나온 보이지 않는 손들이 붙잡아 잡아당기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그 부담은 육체에 피로와 부담을 더욱 강하게 부과하고, 조급함으로 더욱 많은 양의 마력을 소모하게 되어 빠른 고갈을 야기한다.
‘슬슬이려나.’
멀찍이서 뒤를 쫓아가며 두 사람의 술래잡기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던 은현은 자신의 예상대로 차한성이 빠르게 한계를 맞이했음을 직감했다.
짜악!
다시 한번 은현이 손뼉을 치자, 먼 곳에서 앞서 달리고 있던 에린이 움찔하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은 첫 번째 시도를 중지하라는 뜻으로 사전에 정해두었던 신호였다.
‘…벌써?’
하지만 자신을 쫓아오는 차한성이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의 한계를 확인하고, 에린은 곧장 질주를 멈췄다.
“헉…! 허억…!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차한성이 달리기를 멈추고 가만히 서 있는 에린에게 미처 다가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그냥 주저앉았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한계를 맞이해버린 것이었다.
처음 해보는 낯선 훈련과 현실적으로 직시하게 된 에린과의 격차, 그리고 조급한 마음으로 인해 제대로 된 페이스 배분을 하지 못한 차한성이 제 역량을 모두 발휘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뭐,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에린도 처음 이 훈련을 하게 되었을 때는 진짜로 미치는 줄 알았다.
그때 자신이 기를 쓰고 쫓아가서 붙잡아야 했던 상대는 은현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차한성의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에린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가득하다.
“20분 쉬고. 다시 시작하죠.”
“…예.”
이 미친 짓을 몇 번이고, 성공할 때까지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덮쳐 온다.
차한성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으나, 그의 훈련을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한 이상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진짜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더럽게 힘들지만.
‘…설마 진짜로 죽겠어?’
◆ ◆ ◆
에린을 붙잡는 차한성의 술래잡기 훈련이 시작된 첫날이 끝났다.
술래잡기의 횟수는 총 4번.
첫 번째는 20분.
두 번째는 50분.
세 번째는 90분.
네 번째는 120분.
에린을 붙잡기 위해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차한성이 한계를 맞이하는데 걸렸던 시간이다.
이것은 차한성이 조금씩 훈련에 익숙해지면서 그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후아아! 힘들었다!”
오늘 종일 이어졌던 훈련을 마치고 텐트로 돌아온 에린이 곧바로 간이침대 매트 위에 몸을 던졌다.
“씻고 누워야지.”
“으응…. 피곤한데….”
“안돼. 이따가 씻겨줄 테니까 씻고 자.”
“헤헤. 응. 알았어.”
은현은 침대 위에 등을 보이고 누워있는 에린의 몸 위에 올라탔다.
고된 훈련으로 뭉쳐진 근육들을 풀어주기 위해 에린의 어깨와 등, 다리 등을 지압해주며 마사지를 개시했다.
“으, 하아아…. 좋다아.”
은현의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주는 지압이 기분 좋았는지, 에린의 입가에서 교성이 흘러나왔다.
“마사지. 차한성님한테도 해줄 거야?”
“왜? 해줬으면 좋겠어?”
“싫어! 나한테만 해줘!”
은현의 관심을 독점하고 싶은 에린이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은현은 이상한 데서 독점욕을 드러내놓고 있는 어린 아내의 투정이 제법 귀여웠는지 작게 웃음을 짓고는 마사지를 이어나갔다.
“오늘 어땠어?”
“음…. 솔직히 좀 놀랐어. 차한성님. 정말 집념 장난 아니시더라.”
처음 술래잡기 훈련을 받았던 첫날, 너무 힘들었던 에린이 울며불며 은현에게 매달려서 훈련하고 싶지 않다고 떼를 썼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차한성은 이를 꽉 깨물고 악으로 버티며 에린을 쫓아다녔다.
“그러게 이거 처음 했을 때의 에린과는 다르네.”
“그, 그건 아니지! 내가 했을 때는 상대가 너였잖…꺄아악! 거기! 거기 누르면 안돼애!”
발끈한 에린이 혈도를 정확히 눌리자 펄떡이며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은현에게 뒤를 붙잡힌 에린의 저항은 허무하게 제압당했다.
“가만히 있어.”
“으…읏! 흐아앙!”
에린은 머리맡에 놓인 베개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얼굴을 푹 묻어버렸다.
마사지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교성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 ◆ ◆
차한성의 술래잡기 훈련은 리오드가 다시 온 4일 뒤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오늘로 테레지아가 조건으로 내건 기간의 1개월 중 정확히 1주일이 지난날.
“단장님. 오셨군요.”
게이트를 통해서 자시 숲을 찾아온 리오드를 보고 차한성이 고개를 숙이며 꾸벅 인사를 했다.
“…….”
4일 전에 자신이 보았던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한 차한성을 유심히 관찰했다.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한 티가 나서 덥수룩해진 수염이나, 피로에 찌들어있는 얼굴을 하면서도 자신을 향하고 있는 시선과 눈매는 몹시 날카롭다.
살짝 얼빠진 면이 있었던 3일 전의 그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아마도 원인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차한성을 도왔던 은현과 에린일 터.
“…무슨 짓을 한 거지?”
“아, 아하하….”
“뭐 자주적인 훈련으로 좀 강하게 굴렸지.”
설명하기가 좀 어색한지 민망하게 웃기만 하는 에린이나, 어깨를 으쓱이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은현의 태도가 몹시 미묘하다.
“단장님. 오시자마자 죄송하지만….”
차한성은 올곧은 눈으로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철검 한 자루를 리오드에게 내밀었다.
지금까지 직장 상사로서, 아니면 또 다른 의미로서 리오드를 어려워하고 있던 눈매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검사로서의 호승심이 가득한 차한성의 눈빛을 확인한 리오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차한성과 마주했다.
리오드 또한 귀족이자 모든 기사의 귀감이 되는 기사단장이기 이전에 한 명의 검사.
차한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검사로서 이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