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8화 〉 578. 암사자의 시험(4)
* * *
세계수의 마력이 깃들어 있는 영산에서 차한성이 훈련을 시작한 지 4일 차.
“크으윽….”
차한성은 어김없이 아침에 찾아오는 근육통으로 또 하루를 시작했다.
온화하면서도 정갈한 대량의 마력이 전신에 흘러들어와 육체의 성장을 도모하고 빠른 회복을 위해 돕고는 있다지만, 근섬유가 찢어지면서 생긴 근육통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만큼 잦은 회복을 통해서 자신의 육체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그제보다 어제 더,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했을 거라는 희망적인 마음을 가지며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도 통증은 있었지만 버티지 못할 수준은 아니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난 차한성이 나른하면서 근육통으로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텐트를 나왔다.
울창한 숲속,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밝은 햇살이 너무도 눈이 부시다.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이에요!”
손을 들어 눈이 부신 햇빛으로부터 얼굴을 가리고는 인상을 찡그렸던 차한성을 반겨준 것은 자신의 훈련을 도와주고 있는 은현과 에린 부부였다.
“…….”
“왜 그러시나요?”
“어? 차한성님. 잠을 잘 못자셨나요? 표정이 안 좋으신데….”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차한성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상쾌한 아침을 맞이한 듯 아침부터 밝은 인사를 건네오는 두 부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에도 둘이서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아침부터 기운차고 때깔도 곱다.
저 커플 사이에 껴있는 자신은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하지만 차한성은 현재 도움받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응? 차한성님. 아침부터 한숨을 쉬면 복이 날아간대요!”
육체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정신적인 탈력감을 느끼고 있는 차한성을 에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네.”
“응?”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에린을 뒤로하고, 은현이 곧바로 차한성에게 식사를 권했다.
“다 끓었습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시죠.”
“아, 예. 감사합니다.”
그릇 안에 가득 담겨 있는 것은 어제저녁에 먹고 남았던 스튜였다.
다 식은 것은 물론, 남았던 음식이었음에도 다시 한번 끓여낸 소고기 스튜는 오히려 더욱 강한 감칠맛과 풍미를 만들어내며 침샘이 고이고 코끝을 자극한다.
강도 높은 훈련에서 막대한 열량을 소모하는 만큼 그 원기를 보충해주는 스튜를 받아들고 곧바로 숟가락으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졸여진 소고기 안심을 씹을 때마다 부드럽게 으깨자면서 진한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냥 먹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고, 근육통과 피로로 찌들어 있던 육체가 본래의 활력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혹시…. 특별한 재료라도 들어간 건가요?”
아침부터 위에 부담되는 음식을 먹었음에도 순식간에 자신의 몸 상태가 호전되어가는 것을 느끼던 차한성이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은현에게 물었다.
어제저녁부터 먹은 식자재들의 약발이 이제 막 효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하자 은현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답해주었다.
“몸에 좋은 약초와 식자재들을 같이 넣고 끓였습니다.”
“…대단하네요.”
기사단 안에서도 몇 번인가 장기 원정을 다녀보았기에 야외에서 먹는 아침은 낯설지 않았지만, 이토록 몸 안의 기운이 회복되는 기분 좋은 아침 식사는 처음이다.
“그쵸? 현이는 요리도 정말 잘해요!”
에린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차한성의 의견에 동조했다.
자신의 칭찬보다, 남편의 칭찬을 더욱 기쁘게 여기고 있는 그녀의 태도가 무척이나 적극적이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솔로는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싶은 생각을 가슴속에 새기면서 계속해서 스튜를 먹었다.
“드시고 나면 30분쯤 뒤에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은현은 차한성에게 오늘의 훈련 일정을 이야기했다.
“단장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떤 훈련을 하는 건가요?”
“기본적인 신체 능력과 마력의 운용에 대해 훈련을 할 겁니다.”
“…예?”
스튜를 먹던 차한성의 손가락이 멈칫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리오드와 동급일 정도라고 아르티아 기사단 내부에서도 숨겨진 실력자로 소문이 자자한 은현이라면 어떠한 특별한 훈련이라도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은현이 계획한 훈련은 이미 아르티아 기사단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는 기초적인 훈련에 지나지 않았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시군요.”
차한성은 자신의 표정을 읽은 은현의 지적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역시나 은현의 앞에서는 무언가를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한숨을 쉬며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죄송하지만…. 솔직히 그렇습니다. 은현님이 말씀하신 훈련은 저도 기사단 안에서 매일 일과로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요.”
차한성뿐만이 아니라, 아르티아의 기사단원들 전원이 그렇다.
기초 체력과 마력의 운용은 최전선에서 자신의 몸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기사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이다.
그리고 그것을 강조하는 것은 기사단장인 리오드다.
그의 부하들인 아르티아 기사단의 단원들은 모두 그 소양을 성장시키기 위해 하루를 거르지 않고 꾸준히 단련을 거듭한다.
하지만 그것은 은현도 알고 있는 사실.
“리오드가 어째서 그 기초 훈련을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그건….”
차한성은 순간 말문이 막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지적을 듣고 생각해보니, 막상 떠오르는 대답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리오드가 했던 말을 있는 그대로 읊는 것에 불과했다.
“기본이 중요하기 때문…. 아닌가요?”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합니다만. ‘어째서 기본이 중요한가?’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가게 되니 선문답은 그만두도록 하죠.”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이었다.
“리오드가 그 기본을 토대로 지금의 강함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차한성은 아직 잘 모르겠다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은현이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튜를 떠먹던 손을 멈출 정도로.
“아마도 이 나라의 많은 기사가, 이 나라에서 최고의 기사라고 불리는 리오드에게 하나 같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한 기사가 될 수 있나요?’라는 원초적인 질문.”
차한성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질문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그 방법을 궁금해할 것이 틀림없다.
“차한성님은 리오드가 강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완성도 높은 기술이 만들어내는 무지막지한 공격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차한성은 이번엔 말문이 막히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눈이 좋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며칠이고 몇십 번이고 직접 검을 섞어본 자신이었기 때문에 리오드의 검술이 가진 깊이와 완성도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틀렸습니다.”
“…예?”
하지만 차한성의 생각은 이번에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것이 몹시 당황스러웠기에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확실히 리오드의 검술은 대단하죠. 위력도 엄청나고요. 하지만 리오드의 정말로 대단한 점은 그 검술의 위력을 완벽하게 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잘 단련된 육체의 스펙입니다.”
평균적으로 기사 중에서도 특히나 커다란 체구에 잘 단련된 근력과 민첩성, 그리고 일리아나에게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기사 중에서는 최상급에 속하는 마력의 보유량.
20년 전 제국과 아르케나 연합군 사이에 벌어졌던 대전쟁 당시.
한창 검사로서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리오드는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단 하루도 자기 단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은 광적일 정도로 하루를 빠지지 않고 매일 자신의 검술을 연마하는 은현에게서 자극을 받아 만들어진 리오드의 습관이었지만, 은현은 그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서 있는 육체의 스펙이나, 마력의 보유량,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쌓인 기술의 완성도.
세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삼위일체로 극상의 시너지를 만들어내면서 지금의 페르니아스 왕국 최고의 기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즉, 단장님은 스킬의 숙련도가 높은 것도 그렇지만, 그 스킬을 사용하는데 받쳐주는 HP나 MP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뜻인가요?”
“하하! 그렇게 설명이 되기도 하는군요. 맞습니다.”
은현은 기가 막힌 비유를 들었다는 듯 감탄 어린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정답을 외쳤다.
“…HP? MP? 스킬 숙련도?”
지구 출신인 두 남자의 대화에 낄 수 없었던 에린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차한성이 설명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은현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스킬의 숙련도는 사실 지금 시점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차한성의 좋은 눈이라면, 리오드와 계속 검을 마주하게 되면 될수록 자연스레 그의 검술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흡수하게 될 것이다.
이론도 알고 있고,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지금의 차한성이 리오드의 발끝이라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는 점차 성장하고 있는 기술의 완성도에 비해 육체의 스펙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은현님이 말씀하신 오늘의 훈련은…. HP와 MP를 향상시키는 훈련이군요?”
“그렇죠.”
“…….”
차한성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은현의 반응을 보고 무심코 수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실었다.
3일 동안 미친 듯이 리오드에게 도전을 하였음에도, 공격을 성공시키기는커녕 그의 옷깃조차도 스치지 못했다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 은현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동안 막혀있던 앞이 뚫리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에 희망을 품었다.
‘이 사람 역시 대단해.’
괜히 영웅들의 친구가 아니다.
어째서 리오드나 아니에스가, 공작 가문의 사람들이, 에린이, 많은 사람이 그를 믿고 의지하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그가 제시해준 길은 너무나도 밝게 빛나고 있어, 자신을 이끌어준다.
“빨리 먹고 시작하죠!”
차한성은 이제 막 풀리기 시작한 근육통과 피로를 뒤로하고 의욕을 불태워 그릇에 담긴 스튜를 재빨리 먹어치웠다.
마치 빨리 훈련을 하고 싶다는 듯 보이는 그 행동을 보고 은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까 이 사람 원래 유리아 왕녀가 본 미래 속에서는 주인공이었잖아.’
은현은 슬쩍 시선을 옆으로 옮겨 에린을 보았다.
“응? 왜? 현아?”
“아니야. 아무것도.”
애초에 은현이 밀고 있는 예정 속의 주인공은 에린이었지만, 적어도 리오드의 눈에 쓸만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길을 제시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음….”
차한성의 훈련을 봐주고 있는 은현의 모습을 본 에린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네….’
은현은 항상 자신은 재능이 없었다며, 그만큼 노력을 해서 지금까지 왔다고는 했지만.
차한성을 가르치고 있는 저 모습이 도대체 어딜 봐서 재능이 없다는 걸까.
애초에 2년 만에 에린을 금위계 모험가의 자리까지 성장시킨 것은 은현의 재능이 아닐까?
에린은 시에테의 검술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검술에 대한 이론이나 마음가짐 등 설교를 들었을 때, 하나도 시에테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은현의 가르침은 몹시 논리적이고 이해하기가 쉬워 머리가 나쁜 에린이라도 금방 훈련에 적응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이것은 은현이 시에테의 검술을 최고로 생각하고 있듯이, 에린의 인식 속에서 은현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는 에린만이 가질 수 있는 의구심이었다.
‘어쩌면…. 현이가 재능이 없었던 게 아니라, 아니. 오히려 현이는 천재인데, 대스승님이 검술을 엄~청 못 가르치셨던 게 아닐까?’
하지만 에린은 이 의구심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꺼낸다면 분명히 은현이 스승님을 의심하지 말라면서 꿀밤을 쥐어박았을 것이 분명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