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6화 〉 576. 암사자의 시험(2)
* * *
한바탕 소란이 있었던 날의 밤.
침소에 누워있던 테레지아를 품에 안고 있던 리오드가 물었다.
“테레지아. 정말로 차한성을 에이라에게 붙여줄 생각인가?”
“글쎄요.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지 않을까요?”
“…….”
싱긋 미소지으며 되묻는 테레지아의 물음에 리오드는 답하지 않았다.
마음에 든다면 못 이기는 척 져주는 것도 가능성 중에 하나라고 언급하는 아내의 말에 고민했다.
차한성에게 자신의 검술을 가르쳐주는 조건은 그가 자신과의 대련에서 옷깃이라도 스치게 될 수준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
리오드는 아직 아들뻘에 불과한 차한성에게 그런 작은 빈틈도 보여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왕국 최고의 기사이며, 반면에 상대는 기사단 안에서 겨우 신참의 티를 벗어낸 말단 기사단원.
딸과 친하게 지내는 후배라는 사적인 감정을 제외하더라도 그와의 대결을 손대중으로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즉 테레지아가 조건을 세게 내걸기는 했지만, 차한성이라는 남자를 받아들이냐 마냐의 결정 권한은 리오드에게 달린 문제였다.
“그래도 저는 그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아무리 특수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기사단의 말단 단원이 공작 저택을 홀로 찾아와 기사단장을 독대하여 무언가를 요청하여 큰 무례를 저질렀다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지적하여 차한성을 매몰차게 몰아붙이긴 했지만, 테레지아는 그와는 별개로 차한성이라는 남자가 제법 마음에 든 듯 보였다.
자신의 경솔함에 부끄러워할 줄을 알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사과를 할 줄 알았던 남자다.
게다가 에이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그리고 당신은 에이라의 고집을 꺾지 못해요.”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누구를 닮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에는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은 올곧은 성정은 리오드를 꼭 빼닮았다.
“…….”
“그게 가능했다면 에이라가 기사가 되겠다는 걸 말릴 수도 있었겠죠. 그리고…. 에이라는 제 딸이잖아요.”
게다가 아내인 테레지아를 닮아 행동력까지 넘친다.
“만약 그 아이가 젊었을 때의 저처럼 덜컥 배 속에 아기라도 가져서 오게 된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정말로 상상도 하기 싫은 최악의 가정이었다.
테레지아의 독단행동으로 배 속에 에이라를 가졌을 때, 영웅이지만 남작이었던 자신은 테레지아의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은 분노를 감당했어야 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리오드의 등에 아직도 식은땀이 흐른다.
“당신도 크게 신분이나 지위 같은 거에 크게 얽매여 있지 않으시잖아요?”
애초에 당시 영웅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거머쥐기는 했지만, 남작 위계에 불과했던 리오드가 백작 가문의 영애였던 테레지아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덜컥 리오드의 아이를 가져버린 테레지아의 막무가내식 행동이 결정적인 원인.
만약 자신의 딸인 에이라가 아내인 테레지아와 같은 막무가내식 행동을 해온다면 리오드는 그 충격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렇긴 하지.”
자신이나, 테레지아나 사실상 더는 출세를 할 욕심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미 왕국 내부에서는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위를 받았으며, 앞을 보고 달려왔던 지금까지의 여정도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 여기서 더 앞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더욱 강한 권력을 쥐기 위해서 자식들을 다른 귀족의 자제와 혼인시키는 정략혼을 에이라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사실 그런 면에서 차한성이 가지고 있는 신분이나 출신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리오드가 차한성을 경계하고 있는 것은 다 커서 성인이 된 에이라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슬슬 준비를 하셔야 할 거예요.”
테레지아가 차한성에게 내건 조건은 남편인 리오드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매몰차게 치워버려라.
하지만 차한성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는 메시지.
리오드는 아내의 중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 ◆ ◆
기사단 내부에서 로테이션으로 돌아갔던 장기간의 소대원 합숙 훈련이 끝난 에이라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몇 주 만에 집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테레지아에게서 자신이 없을 때 차한성이 찾아왔고 리오드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듣자마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당황했다.
“그, 그런 일이….”
“좋아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으니까 강해지고 싶다니. 얼마나 단순하면서 순수하니?”
“그만…놀려주세요. 어머니….”
에이라는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였다.
최근 아버지를 따라 기사가 되면서 늠름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아주 오랜만에 보는 소녀와도 같은 딸아이의 모습에 테레지아는 무심코 더 놀려주고 싶은 짓궂은 마음이 샘솟는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떻니?”
“네?”
“나는 정말로 그 사람이 내가 내건 조건을 완수한다면, 더는 막지 않을 생각이야. 오히려 도와줄 수도 있어.”
“…….”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에이라, 네 생각이잖니.”
차한성이 리오드의 인정을 받아 검술을 정식으로 배우게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차한성이 올리비온 공작 가문의 일원이 된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자신이나 남편인 리오드가 지레짐작하여 먼저 나섰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제일 먼저 에이라에게 의사를 물었다.
가장 확실한 형태로 에이라와의 결혼이 유력하여 그 상황을 가정으로 두기는 했지만, 테레지아는 만약 에이라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형태로 차한성을 공작 가문의 일원으로 맞이할 의향도 있었다.
“저, 저는….”
에이라는 테레지아의 질문에 답하기를 망설였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하고 있는 딸의 모습에 테레지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이기는 하지만, 다른 귀족 가문의 영애들처럼 혹시라도 정략결혼을 통해서 집안의 기반을 강하게 다져야 한다는 생각에 눈치라도 보고 있는 것일까.
“바로 결혼을 하는 건 조금….”
“…응?”
“아직 제대로 연애도 해보지 못했는데….”
에이라가 주저하고 있는 이유는 머릿속으로 친한 동생인 에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한창 연애 중이나 다름없는 에린을, 에이라는 내심 부러워하고 있었다.
비공식적으로 은현의 아내가 된 에린이 은현에게 듬뿍 사랑받고 있는 모습은 같은 여자로서 보기에 훈훈하면서도 자신도 저런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만든다.
“후, 후후.”
테레지아는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소녀 같은 감성을 보여주고 있는 에이라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 웃지 마세요. 어머니…!”
“어쨌거나 우리 딸은 그 차한성이라는 남자가 그렇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읏!”
에이라는 어깨를 움찔 떨며 허를 찔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바로 결혼이 아니라, 연애를 통해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 자체가, 그 또한 차한성이 그렇게 싫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부끄러움에 테레지아로부터 고개를 홱 돌린 에이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짓궂은 어머니의 장난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고 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한성이는 어디에 있나요?”
테레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리오드와 차한성이 어디로 갔는지를 설명해주었다.
◆ ◆ ◆
아무도 오지 않은 산속에서, 두 기사는 서로의 검을 휘두르며 치열한 공방전을 이루어나가고 있다.
카아앙!
가지고 있는 마력을 모조리 쥐어짜 내어, 허용할 수 있는 한계의 한계치까지 눌러 담아낸 차한성의 훈련용 철검이 리오드의 검과 충돌했다.
자신이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이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낸 리오드는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무시무시한 물리력을 가진 차한성의 검을 나뭇가지를 쳐내듯 받아내며 검을 휘두르면서 매서운 역공을 펼친다.
“크윽!?”
공격한 것은 자신 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섭게 찔러오는 리오드의 역공을 방어해내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공격을 미처 전부 상쇄시키지 못한 탓인지, 충격으로 인해 차한성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추락하던 차한성이 공중에서 급하게 자세를 다시 잡았고, 낙법의 자세를 취하며 바닥과 충돌하면서 생기는 충격을 흡수했다.
“후우….”
차한성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철검을 지지대로 삼으며 기대어 숨을 고르게 쉬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이 가득하다.
‘어떻게 하지?’
벌써 이것으로 오늘만 열일곱 번째.
차한성의 공격이 실패한 횟수다.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는 철옹성과도 같은 리오드를 올려다보며, 차한성은 자신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게다가 실전이 아닌 훈련용 철검을 들고 있을 텐데도 자칫 잘못하면 팔다리가 잘려나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엄습하게 만드는 기백까지.
‘이게 왕국 최고의 기사….’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신을 저릿하게 만드는 저 기백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 새삼 실감하게 만든다.
그가 사용하는 검술을 배운다고 해서, 그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차한성은 자신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눈이 굉장히 좋은 편이다.
그래서 타인이 구사하는 웬만한 검술들은 두 눈으로 보고 익히면서 재현할 수 있었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를 반복하면서 지금까지 강해져 왔다.
그뿐만 아니라 훈련 때 보여주었던 리오드의 검술을 보고 따라 해서 강해진 만큼, 리오드에게서 검을 배울 수만 있다면, 자신은 더욱 강해질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틀렸어….’
그런데 지금 그 확신이 깨져버렸다.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리오드의 검술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검을 부딪치고, 공격이 막히고, 역공을 당하면 당할수록 실감하게 된다.
지금의 경지까지 올라오기 위해 쌓아왔던 인고의 시간들이, 검술에 녹아있는 노력과 깊이는 자신이 재현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리오드의 검술을 단연코 만만하게 보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배우려는 것의 실체가, 자신이 미처 포용할 수 없는 거대한 산과 바다와도 같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차한성은 숨을 턱 막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갈 것인가.
‘절대 그렇게 못 하지.’
이것은 기회였다.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 줄 수 있는 분수에 차고 넘치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차한성은 다시 침을 삼키고 자세를 잡았다.
그것은 리오드가 취하고 있는 자세와 똑같다.
검을 쥐고 있는 손의 모양새부터, 한쪽 발을 앞으로 내딛고 언제든 앞으로 뛰쳐나갈 수 있도록, 어떤 공격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키는 자세.
“흐읍!”
마침내 차한성은 다시 리오드를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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