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1화 〉 571. 이차원(???)의 마녀(2)
* * *
대륙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재앙이 초래하는 것을 막아낸 영웅들은 모두 각자가 있을 곳으로 되돌아갔다.
리오드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본가로.
아니에스는 에레니아 신성국의 베스타 신전 본교로.
제라드는 멸망한 미르바빌라 제국의 흑마법사 잔당들을 추적하기 위해 방랑의 생활을 이어갔고.
앨리스는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아니에스를 따라갔다.
레이넌 또한 본래의 출신지인 렌디르 왕국으로 복귀하였으나, 여섯 명의 영웅들 모두가 서슴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여섯 명 중 유일하게 일리아나만이, 그것이 불가능했다.
이 원정이, 이 싸움이 끝난다면,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함께하고 싶었던 것들이 아주 많았으나, 은현이 죽어버린 이후 그녀는 방황했다.
당분간 혼자서 조용히 은거를 택한 일리아나는 하루하루를 술로 보냈고, 마신 것만큼 눈물을 흘리며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보고 싶어….”
머릿속에서 은현의 얼굴, 목소리가 떠나가지를 않고, 떠올릴 때마다 가슴속은 상실감으로 공허해진다.
그리고 그 마음을 채우는 것은 극심한 후회다.
“말렸어야 했어.”
혼자서 그 마수의 무리를 상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하다못해 자신이라도, 자신이라도 은현의 곁에서 함께 싸웠어야 했다.
비록 제국의 황제를 죽이는데 더욱 불리한 상황으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다른 동료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더욱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자신만은 그 길을 골랐어야 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일리아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은현뿐이었으니까.
“나쁜 X끼….”
반드시 살아서 자신의 말을 듣겠다고 약속했던 은현은 이제는 다시는 볼 수 없다.
그렇게 은현의 얼굴을, 목소리를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술로 보내던 것이 몇 년.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지?”
오래간만에 리오드가 은거하고 있는 일리아나의 집을 찾아왔다.
“…남이사.”
물건들을 한 번도 정리하지 않아 어질러져 있는 집의 상태는 리오드가 입구에 들어오면서부터 그녀가 얼마나 엉망인 생활을 보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루하루를 술을 끼고 살았던 탓에, 피부는 엉망이며 갈라지고 푸석해진 머리카락의 주인인 그녀는 대륙을 구한 영웅이라기엔 너무나도 초라하고 한심하다.
“…출세했네?”
반면 일리아나가 훑어본 리오드의 차림새는 매우 기품이 넘쳤다.
밝게 빛나는 은색의 갑옷과 허리춤에 찬 장검.
그리고 갑옷 속에 착용한 옷감과 망토들은 현재 그가 속해 있는 페르니아스 왕국 내부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하게 했다.
“기사단을 만들었다. 지금은 내가 그 기사단의 단장으로 있지.”
“아, 그래. 축하해.”
선뜻 건넨 축하와 달리, 일리아나는 기쁜 표정은커녕 시큰둥한 기색을 보였다.
리오드도 딱히 일리아나에게 자랑하거나 축하를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갔다.
“왜 왔어?”
일리아나는 자신을 보며 걱정하는 리오드의 시선을 외면했다.
지금의 한심한 모습을 옛 동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그녀는 곧바로 리오드에게 용건을 물었다.
빨리 나가주었으면 한다는 마음을 담아 묻는 일리아나를 보며, 리오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바로 용건을 이야기했다.
“…조만간 페르니아스 왕국에서 왕립 마법도서관을 설립한다.”
“그런데?”
“네가 그곳의 도서관장 직위를 맡아주었으면 한다.”
“…….”
일리아나는 느닷없는 리오드의 부탁에 인상을 찡그렸다.
전쟁이 끝나고 은거하고 있는 자신을 몇 년 만에 찾아와서 하는 리오드의 제안은 그냥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싫어.”
“어째서지? 정당한 대우와 급여도 보장하겠어. 이외에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요구 조건을 최대한 반영하겠다.”
“내가 돈 때문에 거절하고 있는 줄 알아?”
사실 일리아나는 이렇게 숲속에서 혼자 은거하며 폐인과도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지만, 그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돈이 많았다.
은현을 비롯하여 다른 동료들과 팀으로 활동했을 당시, 많은 업적을 세우면서 보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티팩트를 제조하는 기술 또한 매우 뛰어났기에 은현과 함께 다양한 아티팩트들을 제작하면서 큰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평소에도 그리 지출이 많은 편도 아니었기에, 일리아나는 평생을 가까이 일을 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어도 될 정도로 재산이 많았다.
그렇기에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립 마법도서관 관장이라는 직위는 일리아나에게 아무런 흥미도 제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일리아나는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는 있었지만, 정상적인 판단을 그르칠 정도로 마음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내가 그 의도를 모를 줄 알아? 나보고 페르니아스 왕국에 소속이 되라는 뜻이잖아.”
그것은 어느 의미로 족쇄에 가깝다.
왕국에서 주는 지위와 명예, 그리고 재물들은 그녀를 왕국의 소속으로 묶어두는 속박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는 일리아나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너를 왕국 쪽의 전력으로 포섭할 생각이 없다.”
“…그러면? 왜 나한테 이딴 제안을 하는 건데?”
“지금 네 모습이 너무 한심해 보여서 그렇다.”
“뭐…?”
훅 들어 오는 리오드의 막말에, 일리아나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혹시 지금 네 모습을 거울로 본 적이 있나? 도저히 못 봐줄 얼굴이군.”
“…….”
“‘그 녀석’도 지금 네가 이렇게 생활하는 건 원치 않았을….”
“…닥쳐!”
감정의 격류를 참아내지 못한 일리아나의 일갈이 그녀의 집안에 가득 울려 퍼진다.
쨍그랑!
순식간에 방출된 일리아나의 마력이 공간을 진동시키고, 집안의 가구들을 쓸어버리며 헤집어 놓았다.
급기야 마력의 파동으로 인해 창문이 버텨내지 못하고 깨져버릴 정도.
일리아나가 손에 쥐고 있는 나무 컵이 테이블 위에서 부들부들 떨리면서 달그락하는 소리가 안 그래도 더 난장판이 된 집안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피폐해지다 못해 폐인처럼 생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력의 위력은 여전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지금의 일리아나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찌그러질 듯한 압박감을 느끼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테지만, 리오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했다.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다. 만약 은현이 지금의 네 모습을 본다면 크게 실망하겠지.”
“그만해….”
직접적으로 은현의 이름이 언급되자, 파르르 떨렸던 그녀의 눈가가 크게 흔들리고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대륙을 구한 자랑스러운 영웅이 되기는커녕 이렇게 숲속에 틀어박혀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 보내는 생활을 보면 당연하다.”
“그만해!”
“…….”
“제발…. 제발 그만해….”
뒤늦게 복받쳐오는 어마어마한 감정의 파도가 마침내 마음을 무너뜨리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
“현이랑…. 현이랑 같이 집을 집고, 함께 살면서, 아티팩트를 만들어서 수입을 만들고, 그리고….”
꾹 참으며 어떻게든 버텨왔던 마음의 둑이 무너져내리자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과 감정들.
“결혼도 하고, 아기도 가지고….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고…!”
리오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며, 폭발하는 일리아나의 감정들을 모두 받아 주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 없잖아…. 현이가 없으니까….”
그녀가 외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속에만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그 꿈은 이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활이 펼쳐졌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직도 그의 목소리와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술로 그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해도, 공허해진 이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고 해도, 그녀의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돌아가. 너는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결국, 일리아나는 더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러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리오드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심각하군.’
결국, 리오드는 일리아나의 집을 나가기 위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일리아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결혼했다.”
“…….”
“아내의 배 속에 있는 내 아기도 날이 갈수록 커가고 있지.”
일리아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옛 동료였던 그에게 성의 없는 작은 축하 인사라도 건넸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것조차도 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딱히 대답을 기대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리오드도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죽으면서 큰 상실감을 느낀 건 너뿐만이 아니다. 나 또한 그렇지.”
그 정도의 차이가 자신보다 일리아나 쪽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하지만 난 이제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겼다.”
자신의 부모는 물론이고, 아내인 테레지아와 장인 쪽의 집안, 그리고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기까지.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고 있는 아르티아 기사단의 단원들.
점점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져 있으며 정체될 수는 없었다.
리오드는 어떻게든 그 상실감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이 대륙을 구한 건 우리라고 알려졌지만, 진짜는 그 녀석이지.”
“…….”
“난 그 녀석이 해왔던 역할을 이어받고 어떻게든 나의 방식대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할 생각이다.”
그리고는 자신 쪽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 일리아나를 한차례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있었지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리오드의 시선에서 일리아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지금 뭘 하는 거냐?’라고 무언의 압박을 보내오는 것이 더욱더 일리아나의 가슴을 옥죈다.
리오드가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된 일리아나는 더욱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안에서 홀로 생각에 잠겼다.
“뭘 하는 거냐고? 하….”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도 한심하다.
이렇게 술을 퍼마시며 이제는 없는 사람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 너무도 많은 시간과 감정이 소모되었다.
“현아….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해?”
항상 길을 제시해주었던 은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앞날을 물어보아도, 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하지만 일리아나의 기억 속에는 아직도 그의 모습과 목소리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고민이 될 때는 일단 움직여야지. 그렇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샌가 길은 걷고 있게 돼.
떠오르는 것은 언젠가 해주었던 은현의 말이다.
“응.”
일리아나는 작게 미소지으며 결심했다.
은현의 말대로, 일단은 움직여보자고.
그렇게 리오드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리아나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왕립 마법도서관 관장이 되었다.
마법도서관의 관리는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웬만한 잡일들은 도서관의 사서들이 모두 알아서 하는 편이었고, 본래부터 여덟 자릿수의 고위 마법사답게 뛰어난 마법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만큼, 이 일은 천직이라고 할 정도로 일리아나에게 잘 맞았다.
게다가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마법 서적들을 한데 모아 그 지식을 탐독하는 것도 제법 재미있었기에 그녀의 취미로 자리를 잡았다.
일을 하게 되고, 조금씩 규칙적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하게 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아가던 일리아나는 천천히 본래의 모습 되찾아갔다.
그렇게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 신입 사서로 근무하게 된 ‘은정’이라고 합니다!”
새로 모집한 신입 사서의 이름을 듣고, 얼굴을 확인한 일리아나는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은 지금껏 애써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일리아나가 떠올린 은현과 눈앞의 신입 사서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여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은발의 장발과 적색 빛이 발하는 붉은 눈동자.
성별의 차이 빼고는 모든 것이 은현을 연상시킬 정도로 똑같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신을 은정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일리아나에게 싱긋 웃어 보이며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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