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7화 〉 567. 새로운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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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복을 입은 어린 소녀가 종종 걸음으로 달려와 은현의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곧바로 허리를 꾸벅 숙이며 힘찬 인사를 건네는 메이드 소녀의 모습이 굉장히 밝아 보여서 은현은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함께 그 인사를 받아들인 엘레노아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 좋아 보이네.”
은현에게 호의를 담아 힘찬 감사 인사를 보낸 메이드 소녀는 이전에 페르니아스 왕국에서 벌어졌던 사령술사 사건 속, 은현이 구해냈던 유일한 생존자다.
마리우스의 변덕으로 그냥 살려두었던 어린 소녀를 구해내어 페르닌으로 복귀했고, 사정을 딱하게 여겼던 엘레노아가 소녀를 거두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
그때의 그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면서 많은 마음고생을 했던 어린 소녀가 몇 년 뒤, 지금은 이렇게 밝게 웃으며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데,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할게?”
엘레노아는 자신이 먼저 나서서 안내하겠다는 말을 해온 어린 메이드 소녀를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공작 저택에서 가장 막내인 이 메이드 소녀를 보고 하나같이 훈훈한 웃음을 짓는 저택의 사용인들을 보니, 소녀가 이 저택 안에서 얼마나 이쁨을 받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후우….”
이윽고 메이드 소녀는 은현과 엘레노아와 함께 아브로스의 방앞에 섰다.
이곳에 지내게 된 지 2년이 되었지만, 이 저택과 영지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공작을 부르는 것은 소녀에게도 아직도 떨리는 일이었다.
“공작님. 엘레노아님과 은현님이 오셨습니다.”
“그래.”
방안에서 들려오는 아브로스의 온화한 목소리로 허가가 떨어지자, 메이드 소녀는 꾸벅 두 사람에게 상체를 숙여 인사하고는 떠났다.
메이드 소녀에게 손을 들어 작게 흔들어주고는 엘레노아는 은현과 함께 아버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왔구나. 앉아라.”
“네. 아버지.”
“네.”
함께 엘레노아와 함께 테이블에 앉은 은현은 아브로스에게 자신들을 안내했던 메이드 소녀를 칭찬했다.
“많이 밝아졌더군요.”
“음. 최근에는 그 아이가 직접 저택의 사용인으로서 업무를 돕고 싶다고 직접 이야기를 해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는 아브로스의 반응이 굉장히 온화했다.
아들과 아내는 물론, 평소에도 딸을 대하는 데에는 굉장히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나이를 먹어서인지 그 표정과 태도가 더욱 유순해졌다.
“그 아이는 요즘 사용인들 사이에서 이쁨을 받고 있거든요.”
엘레노아는 웃으며 은현에게 그가 구한 소녀의 이야기를 짧게 늘어놓았다.
딱한 사연을 등에 업고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하였음에도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소녀의 모습이 사용인들의 마음에 크게 울린 듯 보였다.
게다가 요령을 피우지도 않고 다른 사용인들에게도 싹싹하게 대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제법 좋은 점수를 얻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니도 요즘에는 새로운 딸이 생긴 것 같다고 좋아하시고요.”
엘레노아가 다 크다 못해 시집을 가고 적적해진 그녀의 어머니, 루네스도 제법 메이드 소녀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어 자주 시중을 들게 시킨다고 하니, 앞으로 커갈 소녀의 미래가 창창하다.
아주 오랜만에 새로 들어온 신입 메이드는 공작 저택 안에서 이쁨을 받으며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가 나를 찾아온 건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약간의 잡다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던 아브로스가 곧바로 본론을 입에 담았다.
온화한 태도를 보이던 그의 태도가 본 주제로 들어가자 날카롭게 돌변했다.
어머니인 루네스를 보러 오거나, 현재 유리아 왕녀의 왕비 대관식을 대비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오빠 알렉스의 빈 자리를 대신하는 엘레노아가 혼자가 아닌 은현과 함께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은 은현이 자신에게 어떠한 부탁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곧바로 꿰뚫어 보았다.
첫째 아들이었던 애슈턴의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지기 위해 모든 일선에서 물러났고 비공식적으로 은퇴를 결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자신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것일까.
아브로스는 은현이 입을 열기를 천천히 기다렸다.
“장인…어른께서는….”
“후후.”
잠깐 머뭇거리는 은현의 태도를 보고 엘레노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브로스를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인어른’이라는 호칭은 은현에게 있어 도저히 입에 달라붙지 않는 어려운 단어다.
하지만 노력해서 그 호칭을 불러주는 것이 엘레노아에게는 작은 기쁨이기도 했다.
“엘레노아에게서 드워프들의 이주 건을 들으셨나요?”
“들었지.”
책 속에나 존재하는 엘프라는 종족을 접한 것을 다음으로, 드워프라는 종족의 등장은 확실히 놀라웠고 심지어 선뜻 자신들의 영지에 이주를 해오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도 더욱 놀라웠다.
그렇기에 그 이야기는 아브로스의 기억 속에 몹시 인상적으로 자리 잡았다.
다수의 이종족들이 한곳에 모여 어우러져 생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은 일이며 많은 우려를 낳는 일이었지만 아브로스는 알렉스와 엘레노아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난 자신이 나선다는 게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비공식적으로 은퇴를 결정했고, 이제는 아들에게 공작 작위를 비롯한 모든 지위를 승계하는 것만 남은 아브로스에게는 더는 실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은현 또한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을 터.
아브로스는 조용히 은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공작령에 학교를 지으려고 합니다.”
“학교?”
“네.”
“…무엇을 하려는 거지?”
은현의 계획 자체를 막거나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적어도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인지는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네 계획을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이 나라의 귀족들이 이걸 어떻게 생각할지는 너도 알 테지?”
“곱게 보지는 않겠죠.”
지금의 페르니아스 왕국에 남아있는 귀족들이 모두 은현의 위명세에 몸을 사리거나 그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아르미타스 령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은현의 계획은 그들에게 있어 달갑게 여길 제안이 아니다.
아이테르 왕립 학교는 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뼈대와도 같다.
페르니아스 왕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이후 많은 귀족 가문들이 이 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하며 나라를 구성하는 주요 인물을 배출해냈으며 왕국의 건국과 함께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
이제는 타국에서도 유학생을 받을 정도로 명문이 된 학교를 견제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비록 그 실체가 초대 국왕인 오르타스가 연모했던 대상인 구미호를 배신하고 그녀의 유해를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의 사정을 모르는 이 나라의 모든 귀족이 새로운 학교의 등장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아버지. 저희가 만들려는 학교는 아이테르처럼 귀족들을 학생으로 받는 학교가 아니에요.”
“그럼…. 평민들을 학생으로 받겠다는 거냐?”
이내 아브로스는 인상을 굳히고 은현을 마주 보았다.
귀족들을 학생으로 받는 학교가 아니라면, 그 대상은 평민밖에 더 있을까.
“맞습니다.”
“…흐음.”
아브로스는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따로 문제 될 것이 없다.
왕국의 귀족 자제들을 학생으로 받아들여 아이테르를 견제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그의 우려는 형편이 좋게도 빗나갔다.
은현이 학생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현재 아르미타스 령의 평범한 평민 아이들이다.
“…너는 일반 영민들을 병사로 키울 생각인 거냐?”
아브로스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최근 은현이 날이 갈수록 규모를 넓혀가고 있는 언데드들에게 대항하며 그에 대해 여러모로 대비하고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는 사실.
그래서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영민들의 징집을 통한 군사력 증강이었다.
“아뇨. 틀립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즉각으로 부정하는 은현의 대답에 아브로스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싸움을 원하지 않는 영민들을 전장으로 내모는 것은 아브로스도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들에게는 교육을 시킬 겁니다.”
“교육?”
“네.”
그 교육이란 것은 왕국의 역사나 예법 또는 기사와 마법사를 양성하는 명문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계산이나 농업이나 약학, 의술, 야금술, 건축 기술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문적인 기술들을 가르치고 영지 안의 핵심 인력들을 양성하는 것이 은현의 계획.
야금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는 특출난 드워프들을 지상으로 꺼내고 아르미타스 령으로 이주를 제안한 것은 이것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의도 자체는 신선하고 흥미롭지만,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닐 텐데.”
하지만 그 당연한 지적에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미 어느 정도 사전 준비는 해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엘레노아는 이미 은현의 계획으로 건설될 예정인 학교 용지는 드워프들의 이주 공간을 확보하면서 함께 선정해두었고, 학교에서 학생이 될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들도 몇 명은 이미 추려두었다.
생각보다 일이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에 아브로스는 살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학교의 운영이 순전히 공작 가문의 재정으로 운영될 예정이라는 점이다.
“…예산이 만만치 않을 텐데.”
“그러니까 주머니를 많이 불려두었죠.”
현재 인구와 재정 상황 치안 등을 고려해본다면 아르미타스령은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을 가볍게 제친다.
게다가 드워프들의 이주로 더욱 다양한 사업들을 벌일 수 있게 될 예정이니 재정 상태는 더욱 부유해질 테고 이 재산들을 굴리며 영지를 더욱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은현은 학교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다면 나에게 뭘 부탁하려는 거지?”
비공식적으로는 은퇴했지만, 아직 대외적으로 아브로스가 가진 영향력은 남아있다.
그 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방패가 되어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시켜달라는 부탁을 해올 것이라는 예상도 함께 빗나간 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을 제외해두고 많은 일을 진행하고 있는데, 굳이 자신을 찾아와 도대체 무슨 제안을 하려는 것일까.
“아버지가 학교를 맡아주시면 안 될까요?”
“…뭐라고?”
◆ ◆ ◆
“흐응? 그래?”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은현은 오늘 아브로스에게 했던 제안을 이야기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래서 받아들여 주셨어?”
“아니. 그래서 엘레노아가 설득 중이지.”
아브로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망설였다.
자식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많은 이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해 아직도 스스로 자책하고 있는 그는 어디든 지위에 있는 자리에 앉는 것은 기피하고 있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엘레노아가 아브로스를 설득하기 위해 저택에 남았다.
“고생이 많네. 내 남편.”
늦은 밤, 드물게도 은현은 일리아나와 둘이서만 밤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엘레노아는 아까와 같이 아브로스의 설득을 위해 공작 저택에 남았다.
릴리는 오랜만에 아르미타스령으로 복귀하여 밀린 보육원의 운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늘은 보육원에서 외박한다고 말했다.
에린의 경우에는 현재 구미호의 사당에서 밤을 세워 가며 수행 중.
사실 세 아내는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각자 외박을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얘들도 정말 속이 뻔하네.”
“그러게.”
은현은 일리아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최근 들어 여러 문제로 집을 비우게 되는 경우가 많아져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일리아나와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려는 아내들의 속셈이 매우 뻔하다.
결국, 아내들과 함께 잠을 자는 커다란 침대는 은현과 일리아나만이 사용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은현은 불러온 일리아나의 복부를 어루만지며 또 감상에 잠겼다.
그동안 얼마나 바빴는지 정신이 없었던 차, 아내의 변화는 가슴 속의 술렁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일리아나가 자신의 복부를 어루만지고 있는 손을 붙잡고 자신을 끌어안도록 이끌었다.
“나 이제 안정기에 들어갔데. 그러니까….”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은현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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