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6화 〉 566. 스승의 검(2)
* * *
대장간에서 벌어진 은현과 시에테의 실랑이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러지 마시고 저희 밖에서 이야기해요. 스승님.”
“싫다.”
일단 어떻게든 여기서 시에테를 나가보려는 은현과 코웃음을 치고 한사코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대장간에서 자신이 원하는 검이 완성될 때까지 버티려는 시에테의 말다툼은 주위의 눈에는 몹시 기묘했다.
“난 내가 원하는 검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아오.”
“와아….”
에린은 처음으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표정이 일그러지는 은현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동안은 사람들의 약점이나 이익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제안을 어떻게든 받아들이도록 사람들을 휘어잡으면서 자신감이 넘치는 은현의 얼굴만을 보아왔던 에린에게는 매우 신선한 얼굴이다.
에린의 눈에 비친 은현의 표정은 마치 장난감이 가지고 싶다고 떼를 쓰는 딸아이를 보고 ‘쟤를 어쩌면 좋을까?’라고 고민하는 듯 보인다.
‘환장하겠네.’
은현은 시에테가 한번 마음을 먹기 시작하면 절대로 그 의지를 꺾지 않는 강철같은 똥고집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녀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아주 잘 알았다.
“뭐냐. 그 얼굴은?”
“예?”
“네 놈의 그 표정이 마음에 무척 들지 않는구나.”
“…….”
“마치 음, 그래. 밥이 맛이 없어서 다시 오라고 했는데, 그냥 좀 먹으라고 말했던 귀찮아했을 때 짓는 그 표정이야.”
그 말에 지구에서 시에테의 제자로서 검을 배우면서 함께 생활했던 과거의 악몽이 떠올랐다.
사실 은현이 기본을 넘어 상당히 높은 수준의 가사 스킬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시에테의 까다로운 꼬장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특히나 요리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입맛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시 세끼 시에테의 입맛에 맞춘 요리를 갖다 바치느라 레시피를 연구하고, 기술을 익히다 보니 자연스레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스승님. 이곳에 계속 계신다고 스승님이 원하시는 검이 바로 나오는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은현은 일단 시에테를 이 대장간에서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그녀를 설득했다.
이곳에 계속 시에테를 두었다가는 많은 업무를 병행해야 하는 드워프들의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긴다.
현재 모그라프령과 드워프들의 사이를 중개하며 드워프들을 관리 감독하는 입장에 있는 만큼 은현에게 이 상황은 몹시 곤란했다.
“…흐음.”
“드워프들도 숨을 돌릴 시간도 주셔야지요. 적어도 다음 주쯤에 다시 찾아와서….”
“배가 고프군.”
“…아오. 진짜.”
하지만 역시나 시에테는 은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한번 꽂히기 시작하면 절대적인 마이 페이스로 자신의 의사를 밀고 나가는 그녀의 고집은 어떤 의미로 일리아나보다 더 위다.
이내 시에테의 시선이 어느샌가 은현의 옷깃을 붙잡고 그의 뒤에 숨어있는 에린에게로 향했다.
“으….”
시에테에게 큰 말실수를 했던 전적이 있는 에린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고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곤 은현의 뒤에 더욱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현의 스승을 만났는데 인사도 없이 노골적으로 피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것쯤은 에린도 알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개미가 땅속에 기어들어 가기라도 하는 듯한 쥐꼬리만 한 목소리로 시에테에게 인사를 건넨 것이 지금의 에린이 보여줄 수 있는 최선.
“흥. 그래.”
목소리가 가득 떨리는 것이 아직도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챈 시에테는 피식 웃어 보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내 머릿속에 생각이 떠오른 에린이 은현의 팔을 흔들어 불렀다.
“현아.”
“어?”
“그…. 시에테님의 검…. 현이가 만들어주면 안 되는 거야?”
“…뭐?”
“흐음?”
느닷없는 에린의 제안에 은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이며 반문했다.
흥미롭기는 시에테 또한 마찬가지.
적잖게 당황한 은현의 반응과 흥미로워하는 시에테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에린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게…. 내 검도 현이가 만들어준 거니까. 시에테님께도 좋은 검을 만들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그야 만들어달라면 못 만들어줄 것도 없지만, 드워프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준 검을 하나도 아니고 일곱 자루씩이나 깨부숴 먹으며 까버렸는데, 그보다 더한 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평소였다면 시에테의 부활을 축하하며 기쁘게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한창 바쁜 와중에 그녀에게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은현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
‘…아니. 가능은 하지. 애초에 되살아나시면서 이곳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려고 했지만, 검을 선물해드리는 것도 나쁘진 않아.’
하지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이 과연 스승님을 만족시킬 만한 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다.
“흐음. 그렇지.”
절대로 잊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에테가 마침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은현과 에린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새로운 검을 원하게 된 것도 이 꼬마 때문이니까.”
“네, 네…?”
에린은 시에테가 갑자기 자신을 지목하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갑작스러운 주목이 당황스러웠던 그녀가 자신이 의견을 말해놓고도 어찌할 줄을 몰라 하며 은현의 뒤에 숨었다.
“꼬마의 저 검. 네 녀석이 만들어주었다면서?”
“아.”
에린의 허리춤에 찬 레반테인을 가리킨 시에테의 손가락을 보고, 은현은 작게 탄식했다.
시에테가 에린의 레반테인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에 준하는 검을 가지기 위해 이곳의 대장장이들을 잔뜩 쪼아댔다는 이야기.
시에테는 에린의 레반테인이 은현의 손으로 제작되어 탄생했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며, 이 드워프들을 통솔하는 것이 현재 은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즉 이 행위들은 시에테가 은현에게 보내오는 하나의 메시지다.
‘당장 내 검을 만들어라.’
시에테의 의도를 파악한 은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 진짜 스승님 왜 이러세요?”
그냥 검을 만들라고 자신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을 왜 여러 드워프를 잡고 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는지 따졌다.
“흥. 만나러 온다면서 몇 주나 나를 방치한 네 녀석이 할 소리냐?”
시에테는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제가…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요. 바빠서 그런 건데….”
다시 검을 겨루기 위해 조만간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도 그동안의 복구작업과 다양한 사업들이 너무 바빴던 은현은 근 3주 동안 시에테를 찾아오지 못했다.
“흥. 알게 뭐냐. 난 그런 건 모른다.”
그것은 많은 일정과 업무를 소화하고 지친 체력과 정신력으로 시에테와의 대련을 하는 것은 스승에게도 실례라는 생각에,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고 날짜를 잡아보려 노력했던 결과지만,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시에테는 그저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제자에게 서운할 뿐이었다.
대장간의 드워프들을 쪼아 억지로 검을 만들게 시킨 것에는 자신의 훌륭한 검을 가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을 좀 신경 쓰라는 시에테의 간접적인 메시지도 유치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뭐지?’
에린은 은현과 시에테의 실랑이를 보며 기묘한 생각을 품었다.
마치 일이 너무 바빠서 가정을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남편의 억울한 변명과 서운함을 표출하는 아내의 부부싸움을 보는 것만 같다.
그런 두 사제간의 싸움을 말리게 된 것은 갑작스레 대화에 난입한 드워프들이다.
“야장…! 야장이시어! 우리를…. 우리의 복수를 해주시오…!”
한 드워프가 참지 못하고 은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해왔다.
자존심을 있는 대로 긁혀서 장인의 혼을 모조리 불태워 만들어낸 검들이 허무하게 부러져 버리니 그동안 쌓아온 장인의 기술과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야금술로는 저 콧대 높은 여검사를 눌러줄 만한 훌륭한 검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 평생 쥐었던 망치를 놓는 것만큼이나 싫은 일.
하지만 자신의 기술이 결국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장장이로서의 자존심도 중요했지만, 대장장이로서의 양심이 그것을 용납지 않게 한다.
자신의 야금술이 부족한 것을 누굴 탓하랴.
하지만 지금 자신들에게는 마을의 모든 드워프들을 초월한 엄청난 야금술을 가졌으며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천일야장’의 칭호를 가진 인간이 존재한다.
“부디, 우리들은 도달하지 못한 그 경지를…! 우리에게 다시 한번 보여주시오!”
“부탁드리외다…!”
모두 시에테에게 검을 제작하여 선보였으나 모조리 부러진 끝에 자존심까지 짓뭉개진 드워프들이 애원하듯 은현과 에린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매달린 드워프들 중 하나가 은현이 제작했다는 에린의 레이피어, 레반테인을 가까이에서 보고 흥미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것이 야장이 제작했다는 그 검이오?”
“꺄악!? 어, 어디를 만지는 거예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던 한 드워프가 손을 뻗어 에린의 레반테인을 건드리면서 무심코 에린의 허벅지를 만지자, 에린이 화들짝 놀라며 그 드워프에게서 거기를 벌렸다.
“미, 미안하오. 하지만 그 레이피어를 조금만 보여줄 수 있겠소?”
가늘고 기다란 검집부터 고풍스럽게 디자인된 손잡이까지 그리고 검 자체가 품고 있는 기운이 몹시 남다르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빠져드는 표정을 보이며 다시 자신의 레반테인에게 손을 대려 하자, 에린은 재빨리 드워프의 손길을 피했다.
“싫어요!”
하지만 그 드워프의 말을 시작으로 에린의 레반테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드워프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뭐? 이것이 야장이 직접 제작하신 검이라고?”
“나도! 나도 보여줘!”
“꺄악!? 엉덩이 만지지 마!”
다수의 드워프들이 너도나도 뻗어대는 손이 무심코 엉덩이에 닿자 에린이 다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레반테인을 사수했다.
“아가씨의 그 얄팍한 엉덩이에는 전혀 관심 없소! 그 검! 야장이 제작한 그 검만 보여주시오! 제발!”
“이, 이 아저씨들이 진짜…!”
인간과 드워프들의 이성에게 느끼는 매력의 포인트가 다르다는 것은 에린도 알고 있는 사실.
심지어 자신이 전혀 매력이 없다는 투로, 관심이 없다는 듯 말하는 드워프들의 말이 감정을 읽어 들인 끝에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니까 더 열이 받는다.
“싫어! 내 검이야! 절대로 안 보여줘…!”
오기를 부리며 드워프들의 뜻대로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어느샌가 은현이 에린의 허리를 휘감으며 그녀의 몸을 들어 올렸다.
“혀, 현아…?”
“자.”
“으하하하! 고맙소! 야장!”
은현이 냅다 에린의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레반테인을 드워프들에게 넘겨버리자 에린이 불같이 화를 냈다.
“현아! 안돼! 저 아저씨들한테 내 검 보여주기 싫단 말이야!”
“누가 훔쳐 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얌전히 관찰하고 돌려줄 테니 괜찮아.”
“…히잉.”
에린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무기는 그냥 무기일 뿐이잖아. 나는 그것보다 누가 네 몸을 허락도 없이 만지는 거 싫어.”
“어…. 정말?”
“응.”
설령 성적으로 이상하게 만지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명확하게 자신의 소유라고 주장해오는 은현의 의사를 확인한 에린의 화가 눈 녹듯 사라지며 헤벌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히히. 정마알? 다른 사람이 내 엉덩이 만지는 거 싫어?”
“당연하지.”
“헤헤. 나도야! 현이만 만져주는 게 좋아.”
은현의 품에 안겨있는 에린이 당당하게 성향을 오픈하며 은현의 목을 끌어안고는 상체를 밀착시켜 애정을 과시했다.
“…지X을 하는군.”
한쪽에서는 장인의 기술이 정점에 달한 결과물을 보며 환호하고, 분석하며 관찰하는 소란으로 시끄럽다.
다른 한쪽에서는 어린 신부를 차지한 도둑놈에 가까운 제자 녀석이 자기 아내와 조용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다.
시에테는 또 한 번 가슴속에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예전에는 자신만을 신경 쓰던 제자 녀석이, 이제는 아내가 생긴 끝에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방치한 채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 눈꼴시다.
마치 힘들게 키워놓은 아들내미를 새파랗게 어린 며느리에게 빼앗긴 어미의 심정이란 이런 것일까.
아이는커녕 결혼도 해보지 못해본 자신이 어째서 이런 짜증 나는 기분을 느껴야만 하는 건지, 불합리함에 은현과 에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스승님의 검은 조만간….”
“니 알아서 해라. 이 괘씸한 녀석.”
진한 스킨십 끝에 에린을 내려놓은 은현이 시에테의 검 제작을 약속하며 일정을 조율하려 했지만, 시에테는 몸을 홱 돌려 대장간을 나갔다.
“……?”
스승이 바라는 대로 검을 제작해주려 했는데, 다짜고짜 욕을 먹었다.
은현은 어째서 시에테가 화났는지, 어째서 자신이 욕을 먹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