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5화 〉 565. 스승의 검(1)
* * *
하계와 신계를 잇는 중간의 통로.
‘계단’에서의 대화를 마친 세 사람은 다시 하계로 복귀했다.
눈 깜짝할 새에 변화해버린 주위의 배경을 인식한 아니에스가 ‘계단’으로 가기 전 처음 있었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돌아온 거냐?”
“맞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어본 아니에스의 물음에 답해준 것은 함께 돌아온 은현이다.
아니에스는 곧장 방안의 시계를 향해 시선을 옮겨 시간을 확인했고, 전혀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직시한 후에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꿈이 아니었나 보네. 진짜로….”
체감상 몇 시간을 가까이 이야기를 하였음에도 그것이 하계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은 아니에스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넌 거기에 자주 가는 거냐?”
“아니. 나도 못가. 이번이 엘레노아와 네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지. 이것도 자주 써먹지는 못할 것 같다.”
애초에 필요하다면 베르단디가 은현을 신계로 불러들일 뿐이지, 은현이 직접 굳이 신계로 올라갈 필요가 없다.
하계에는 항상 곁에 있어 주는 베르단디가 있고, 의사소통의 문제도 없을뿐더러 이번에 그 자리를 마련했던 것은 여신을 모시는 두 사제가 베스타 여신의 실물을 직접 영접시켜주기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려 했을 뿐이다.
“아. 그러냐. 하아….”
아니에스는 전신에 가득했던 긴장이 풀어지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축 늘어지면서 머릿속으로 자신이 만났던 여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진짜 대단했는데. 여신님의 가슴….”
“…베스타님을 만나게 된 것에는 아무런 감상도 없고?”
“엉? 아아. 신기하긴 했지.”
자신이 모시는 여신의 존재를 실제로 만나보았던 것은 정말로 색다른 경험이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엘레노아에게도 마찬가지.
하지만 베스타를 만나게 된 것에 대한 아니에스의 감상은 딱 그것뿐이었다.
“나는 원래 직접 신탁이란 것도 받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것은 아니에스 쪽에서는 수신밖에 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소통이었지만, 아니에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모시는 여신의 존재를 의심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생전 처음 보는 베스타의 모습을 영접했을 때도, ‘아, 저분이시구나.’ 하는 감상만을 품었을 뿐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나타난 베르단디의 모습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 때문일까.
“하아…. 젠장. 그 품 안에 한 번 안겨봤어야 했는데.”
아니에스의 머릿속에는 베르단디의 품에 한 번 안겨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자신의 동료는 도대체 자신의 여신인 베르단디를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녀의 그 불경한 태도는 베스타에게나 은현에게나 한 대 쥐어박아도 시원찮을 아저씨의 음흉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일리아나한테는 그러지 않았으면서, 왜 베르단디님한테는 그렇게 집착해?”
“야. 걔한테는 그러다가 한 대 맞을 거 아냐. 싫다는 사람한테는 억지로 부탁 안 해.”
엘레노아도 제법 큰 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녀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는 선임으로서 보여주어야 하는 위엄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차마 부탁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도대체 선임의 위엄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발휘되는 것인지 심히 궁금했을 정도로 아니에스의 사고방식은 이상하다.
“아~. 진짜 아쉽다.”
오히려 베르단디가 ‘그 정도쯤이야 해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듯이 너그러운 반응을 보여주었으니 더더욱 아쉬웠다.
“저는…. 좋았어요. 베스타님을 직접 뵐 수 있게 되다니. 새로운 경험이었으니까요.”
반면 엘레노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신이 모시는 여신의 존재를 실물로 영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대륙의 사제들 사이에서 아니에스와 엘레노아 단둘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일 터.
그것은 베스타를 국교로 정한 신전의 최고 권위자인 교황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엘레노아는 자신이 그것을 경험했다는 것에 자랑스러웠고 감개무량한 기분을 느꼈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
“그래. 앞으로의 계획.”
“엉? 뭐야. 이제 더 시킬 거 없는 거야? 나는 니가 내가 해야 할 것들 다 준비해놓은 줄 알았는데?”
“…….”
은현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너 지금까지는 대주교 역할 어떻게 수행해왔냐?”
“그거야 지금까지는 너가 없어서 그랬던 거고. 그 사령술사를 잡기 위해서는 너랑 딱 붙어있어야 하고, 너가 있는데 그런 걸 내가 왜 생각해. 어차피 너가 알아서 다 짜줄 텐데.”
“…….”
당연하다는 듯이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아니에스를 보고, 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내세요.”
엘레노아가 아무런 말도 없이 쓴웃음을 짓고는 지금까지 해왔던 그의 노고를 작게나마 위로했다.
“알았어. 그럼 일단 원하는 거라도 있어?”
“원하는 거?”
“그래. 이번에 내 부탁을 들어줬던 것도 있으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준비해줄게. 말해봐.”
에린과 함께 모그라프령을 돕기 위해 선뜻 지원을 와준 아니에스에게 은현도 나름대로 작은 보답을 준비해줄 생각이었다.
“흐음. 그럼 나중에 다시 그 ‘계단’이라는 곳에 가서 네 여신님의 품에 좀….”
“그것만 빼고 다 들어줄게.”
“…쳇. 됐어. 그럼 필요한 건 차차 생각해볼게.”
단칼에 거절의 의사를 보이는 은현을 보며 아니에스는 혀를 찼다.
◆ ◆ ◆
까아앙!
성벽을 새롭게 보수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철문을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모그라프 령을 가득 채웠다.
성벽의 보수 공사와 함께 내부의 건축물과 도로들을 다시 세우고 개축하는 작업의 한창.
현재 모그라프령은 어떠한 의미로 활기가 넘쳤다.
“이봐! 이쪽 자재가 다 떨어졌다고! 보충 좀 해와!”
“예!”
드워프들과 인간이 합심하여 다 같이 보수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광경을 둘러보며 천천히 영지 내부를 걸었다.
“으…. 시끄러.”
은현의 뒤를 따라와 동행하고 있는 에린은 남들보다 청각이 뛰어난 만큼 귀를 계속해서 울리는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굉장히 불편했다.
“괜찮아?”
앞서 걷고 있던 은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에린의 상태를 살폈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의 소음에 양손으로 자신의 두 귀를 막고 있던 에린이 자신을 걱정해주는 은현을 보고 배시시 웃어 보였다.
“괜찮아! 버틸 수 있어!”
살짝 거슬리긴 했지만, 전장을 가득 채우는 많은 이들의 비명과 무기의 소음, 폭음에 비하면 이 정도 스트레스는 참아줄 만했다.
무엇보다도 남편의 관심이 고픈 에린에게는 은현의 걱정이 몹시 기분이 좋았다.
“팔 빌려줘. 끼고 걸을래.”
“그래.”
은현이 피식 웃으며 팔을 내밀어주자, 에린은 곧바로 그의 팔을 끌어안고는 얼굴을 묻었다.
“하아…. 냄새 좋다아….”
셔츠에 묻어있는 남편의 체취 냄새를 만끽하고는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에린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걸음을 옮긴 은현이 도착한 곳은 짧은 신장을 가진 난쟁이들이 한창 작업중인 간이 대장간이다.
“어이! 이쪽은 가공 다 끝났다고!”
“알았네! 내 금방 만들어주지!”
“…이 아저씨들은 뭘 만들고 있는 거야?”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화로 앞에서 수십 명의 드워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망치질을 반복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에린이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양한 것들을 만들고 있지.”
많은 드워프들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은 보수작업에 사용될 자재들과 다양한 도구들이었다.
“저건…. 미스릴이잖아?”
“잘 알고 있네?”
“나 놀리는 거야? 나도 금위계 모험가야. 현아. 당연히 미스릴 정도는 알아보지.”
모험가의 활동을 통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에린은 야생에서 발견한 광물의 종류를 알아보는 안목도 길러두었기 때문에 드워프들이 제련하고 있는 금속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스릴이라는 금속은 그리 드문 것은 아니었으며 시중에도 비싼 가격으로 자주 나돌고는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것을 제련하여 무기로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들이 극히 적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철보다 마력의 전도율이 더 높고 내구성이 단단한 금속인 미스릴로 제작된 무기는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이 소문으로 나돌 정도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만큼, 모험가인 에린이 미스릴이라는 금속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헐.”
그리고 에린은 그 금속을 이용하여 만들고 있는 도구의 정체를 알아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성스럽게 제련된 미스릴로 드워프가 만들고 있는 도구는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무기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곡…괭이…?”
다른 대장장이나 모험가들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한 미스릴을 가지고 제작하는 것이 고작 곡괭이라니.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에린의 상식을 강하게 때려 부수는듯한 강렬한 충격이 에린의 머리를 강타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에린의 모습을 보며 은현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혀, 현아…. 저게 맞아…?”
“…뭐. 저들 사이에서는 저게 일반적이기는 하지.”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미스릴을 제련하는 방법을 배우면서부터 대장장이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미스릴이라는 금속 자원만 있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가공하여 도구를 제작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뭐, 그냥 받아들여야지.”
쓴웃음을 지으며 드워프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차, 한 드워프가 은현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가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은현에게 달려왔다.
“음? 오오! 야장께서 오셨군!”
짧은 다리를 이용하여 한걸음에 달려와 은현과 에린을 맞이해준 것은 에린도 익히 알고 있는 드워프였다.
“아, 이 아저씨….”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자신에게 눈치 없는 무례한 언사를 늘어놓았던 드워프.
황금 망치 부족이라는 곳의 족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고몬이었다.
“하하! 아가씨도 함께 왔구만. 그런데 아직도 내가 했던 말이 신경 쓰이는 겐가?”
대놓고 자신을 보며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미간을 좁힌 에린을 본 고몬이 호탕하게 웃어보이며 에린에게 물었다.
“시, 시끄러워요!”
“…무슨 말을 했는데?”
고몬과 에린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를 모르는 은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하! 내가 인간들의 가치관도 모르고 다짜고짜 야장의 아내분께 무례한 말을 했지 뭐요! 좋은 여성이라 하면 엉덩이가 큰….”
“아! 말하지 마요!”
멋쩍게 자신이 했던 실수를 자랑스럽게 입에 담으려는 고몬의 말을 재빨리 에린이 끊었다.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에린의 반응으로 보아 몹시 민망한 상황이 있었다는 것은 파악할 수 있었지만, 고몬이 순순히 사과한 듯도 보이고 에린도 그 사과를 받아들였는지 껄끄럽긴 해도 고몬이 말을 걸어오는 것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은현은 이 이야기는 나중에 에린이 없을 때 듣기로 하고, 자신이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입에 담았다.
“새로운 드워프 마을의 공사 상황을 보러 왔어.”
“오오! 그렇구려! 내 바로 공사 현장을 안내해드리리다!”
고몬은 반갑게 은현과 에린 부부를 맞이했고 간이 대장간을 나가려 했을 때, 한 드워프가 급히 달려와 고몬을 불러세웠다.
“족장니이이임!”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내지 못한 어린 드워프의 다급한 목소리가 매우 급한 용건을 전하려는 것처럼 들렸기에 고몬은 움직이려는 발을 다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또?”
무언가 짐작가는 게 있다는 듯 고개를 굳힌 고몬이 어린 드워프를 향하여 짧게 물었다.
“네! 이걸로 일곱 번째입니다! 이제는 더는 못하겠다는 대장장이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어요!”
“…후우우.”
“뭔가 문제가 있어?”
작게 한숨을 내쉰 고몬을 보고, 은현이 현재 드워프들의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고몬에게 사정을 물었다.
“그것이….”
고몬은 최근에 어떤 인간 여성이 드워프들의 대장간을 찾아와 검 한 자루를 만들어주었으면 한다고 부탁을 해왔다고 한다.
안 그래도 새로 이주할 예정인 마을의 공사와 모그라프령의 개축 공사들로 몹시 바쁘게 움직여야 했던 드워프들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 여성 검사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적당히 만든 검 한 자루를 쥐어주고 돌려보낼 생각이었지만.
“그 인간 여성이 다짜고짜 그 검을 바닥에 꽂고는 다른 검으로 그 검을 단칼에 베어 버렸지. 그리고는 이딴 허접한 검 말고, 제대로 된 검을 만들라고 말하면서 우리 드워프들의 자존심에 불을 지폈다네.”
이후 드워프들은 진지하게 야금술을 펼치면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검들을 여성 검사에게 선보였고, 어디 아까와 같은 그 검격을 펼쳐보라고 여성 검사를 도발했다.
이번에는 쉽게 절단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들을 도발한 여성 검사에게 이것도 하지 못하냐고 면박을 주면서 받았던 도발을 되돌려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로 끝났지.”
여성 검사의 검격을 버텨낸 검들은 한 자루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조리 일도양단으로 깔끔하게 절단시켜버리면서 드워프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뭉개버렸다.
사정을 들으면서, 어린 소년 드워프의 안내를 따라 은현과 에린이 대장간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던 망치 소리가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자, 에린은 오히려 적응되지 않는 듯 신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시. 다시 만들어.”
“으아아아! 그냥 돌아가! 제발 돌아가라고!”
“아까도 말했을 텐데? 난 내가 만족할 만한 검을 받을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음?”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여성 검사가 제발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는 드워프에게 향해 있던 시선을 목소리가 들린 입구 쪽으로 옮겼다.
이내 은현의 얼굴을 확인하고 시큰둥한 표정을 보이며 중얼거렸다.
“뭐야. 너였구나.”
“…스승님. 이거 영업 방해에요.”
“흥. 내가 만족할만한 검을 만들어내지 못한 게 잘못이지.”
“크흑….”
자신은 일절 잘못하지 않았다는 듯 당당한 시에테의 태도에 자신들이 제작한 검들이 모조리 부러진 드워프들이 가슴에 비수라도 맞은 듯 신음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