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9화 〉 559. 중간의 계단(2)
* * *
하계에서 신계로 올라가는 통로이자 ‘계단’.
두 장소를 연결하는 비밀의 통로는 하계의 존재들이 신계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수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신계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신의 격을 갖추고 있는 은현조차도 스스로 신계에 입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로지 그곳에 속한 여신, 베르단디의 힘을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으니 사실상 하계에서 신계로 발을 들이미는 수단 자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은현은 아니에스와 베스타 여신이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장소로 이 공간을 선택했다.
엘레노아와 아니에스의 막대한 신성을 쏟아부어 올린 기도로 만들어진 이 ‘계단’은 기도의 주체였던 엘레노아의 ‘여신을 불러오고 싶다’라는 염원을 형태로 구현시킨 것.
어떤 의미로 두 사제가 사용하는 ‘강신(??)’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 계단에 나타난 두 여신은 베르단디와 베스타였다.
베르단디의 경우에는 은현과 직접 이어져 있는 여신이며, 베스타는 엘레노아와 아니에스가 사용하는 신성의 제공자이며 힘의 원천이다.
세 사람을 매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두 여신이 간섭의 규율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이 계단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으며, 단 한 번도, 하계의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베스타 여신의 모습을 직접 알현하게 된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현 성녀와 차기 성녀였다.
그리고 이 영광스러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 왜애! 제발 나도 한 번만 만지게 해주라!”
“절대 안돼.”
여신의 가슴을 두고 벌어지는 유치한 실랑이였다.
[…하아.]
“…괜찮으신가요?”
작게 한숨을 내쉰 베스타를 걱정하며 말을 건넨 것은 엘레노아다.
[위로해주는 거니? 후후. 고맙구나. 하지만….]
엘레노아의 위로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웃음을 지어 보였던 베스타는 어떻게든 은현을 제치고 베르단디에게로 손을 뻗으려는 아니에스를 보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꿈으로만 보아왔던 장난감을 향해 손을 뻗는 어린아이와 그녀를 필사적으로 제지하고 있는 아버지와 같은, 아니에스와 은현의 실랑이를 보고 있자니 허탈한 마음이 가득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저 아이를 고른 내 선택에 처음으로 의문을 가져봤어.]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베스타는 마치 딸아이의 추태가 친한 친구와 아들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을 참고 있는 것만 같다.
“아니에요. 아니에스님은 훌륭한 분이세요.”
엘레노아는 필사적으로 아니에스를 변호했다.
자신의 선임에 해당하며 성녀인 그녀가 대륙을 구하고 많은 사람을 구해온 지금까지의 업적은 그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어린 외관이나 사제라는 외부의 모습과는 맞지 않게 조금 거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엘레노아는 아니에스 예르살레카라는 자신의 선임 사제를 존경하고 있다.
“너 임마! 치사하게 너 혼자 꽃밭에서 행복하게 살지 말라고…! 침대 위에서 여신님이나 일리아나, 엘레노아의 가슴에 둘러싸여 뒹굴다니! 이런 부러운 자식!”
“뭔 소리 하는 거야!”
아직도 이어지는 실랑이를 들은 엘레노아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며 민망한 모습을 드러냈지만, 애써 그 동요를 감추며 말했다.
“조, 좋으신 분이에요….”
창과 방패의 싸움을 보듯 필사적으로 아니에스의 목덜미를 붙잡아 그녀를 제지하고 있는 은현은 속으로 자신의 실수를 한탄했다.
‘실수했어.’
이 상황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여 미처 아니에스의 성향을 고려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결혼이나 가정을 꾸리지 않고 그녀가 사는 이유는 신성의 축복으로 인해 육체의 성장이 멈춰 15살 소녀의 외관 그대로인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의 취향 때문이다.
이성보다 동성 쪽에, 그것도 살집이 있는 글래머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이상할 정도의 취향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그녀의 성장이 멈추게 되어 성인의 몸을 가질 수 없게 된 아니에스 자신이 존재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성이냐 동성이냐 이전에, 결혼에 크게 흥미가 없었지만, 성숙한 몸매에 대해 내심 부러워하는 눈치를 보였었던 만큼 베르단디의 몸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아, 아이야. 굳이 닳는 것도 아닌데, 나는 상관이….]
“저는 싫습니다.”
이상한 쪽에서 고집을 부리며 말하는 은현의 태도도 무척이나 완고하다.
하지만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실랑이도 결국엔 끝을 맞이했다.
무언가 정신적인 피로와 함께 강한 탈력감을 느끼고 잠시간 휴전의 상태에 들어간 두 사람은 그제가 되어 서야 대화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쳇…. 저분이 우리 여신님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작게 중얼거리는 아니에스의 중얼거림은 불경함이 가득한 신성 모독에 가까웠으며 베스타의 귀에 확실히 들어갔다.
[조용히 하렴.]
자신의 딸아이를 훈계하듯 아니에스의 머리에 꿀밤을 쥐어박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은현과 베르단디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우리 아이가 좀 철이 없어서.]
“…아니요. 이해합니다. 그래도 말은 저렇게 해도,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니. 괜찮다.]
베스타는 작게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태도는 몹시 불경하고 가볍지만, 미운 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그녀가 자신이 부여한 사명을 받들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얄밉기는 해도 이제 와 아니에스를 싫어지지는 않았다.
베스타는 다시 은현을 보며 이야기를 재개했다.
[그래서? 아이는 나를 불러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제가 이곳에 이러한 기회를 마련한 이유는 아니에스와 베스타님께 어떠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입니다.”
“…이야기?”
[흐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던 둘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띄우며 은현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마리우스 홀튼’ 알고 있지?”
“……!”
자신을 향해 물어오는 단도직입적인 은현의 질문에 아니에스가 몸을 움찔 떨었다.
그 이름은 현재 신전 내부에서도 언급조차 금기시되는, 고위 상층부만이 알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
예상치 못한 이름이 나왔기 때문인지, 베스타 또한 미간을 좁히며 그리 좋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몇 년 전에, 왕국 안에서 사령술사가 출몰했던 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아니에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사령술사가 바로 마리우스 홀튼이며, 과거 에레니아 신성국의 국교인 베스타 신전의 사제였다는 사실도.
은현은 마리우스가 민간인들이 사는 마을들을 습격하고, 산적들을 부리며 페르니아스 왕국을 위협하였을 때, 포로로 체포한 산적들을 심문한 결과 그의 출신을 알아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도,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알려진다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페르니아스 왕국이 에레니아 신성국에게 어떠한 형태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으며 그것이 정당한 수순이었겠지만.
더 나아가 갈등과 분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이 문제는 쉽게 다룰 수 없는 문제.
특히나 현재 렌디르 왕국의 멸망과 함께 대륙 전체에 큰 혼란이 다가오고 있는 만큼 신중해야만 했다.
“…그래.”
당연히 에레니아 신성국과 베스타 신전에서는 마리우스의 출신이 자신 쪽이라는 것이 굉장히 껄끄러운 문제였으나, 아니에스는 올 것이 왔다는 듯 결의에 찬 시선으로 은현을 마주했다.
“알고 싶은 게 뭐야?”
“마리우스 홀튼에 대해 신전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 그리고….”
이윽고 베스타 여신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어째서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가 망자들을 부리는 최악의 사령술사가 되었는지. 모두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사제에게 신성력을 제공하는 베스타 여신의 잘못된 판단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하계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중시하면서, 신력을 신성력이라는 하위의 힘으로 희석하여 대륙의 인간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은혜를 내렸건만, 오히려 그 은혜를 입은 사제들 중 하나가 재앙으로 변모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아마 다른 신들 사이에서도 베스타 여신은 이 판단에 대해 많은 질책을 받은 전적이 있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은현이 아니에스 뿐만이 아니라, 베스타 여신에게까지 마리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던 것은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묻기 위함이 아니다.
메디아의 사령술을 사용하는, 자신이 죽여야 할 불구대천의 원수를 상대하기 위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했을 뿐, 다른 의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아…. 젠자앙….”
신전의 치부나 다름이 없는 이야기를 다름 아닌 자신의 입에 담아야 한다니, 정말로 짜증이 나는 일이었기에 한숨과 짜증이 절로 나왔다.
‘뭐, 그래도 이 둘이라는 게 다행인가.’
많은 사람 앞에서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은현과 엘레노아에게만 이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라는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과 안도가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누군가가 엿들을 위험도 없으니 쓸데없는 경계를 하지 않아도 되어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보고에 따르면 마리우스라는 그 남자는…. 변방 쪽의 작은 신전에 소속되어있던 부임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최하위계의 사제였어.”
아니에스는 미간을 좁히며 마리우스 홀튼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마리우스는 사실 자신이 모시는 베스타라는 여신을 그렇게 믿는 신실한 사제가 아니었다.
그의 태생은 알 수 없었으며, 부모의 얼굴도 몰랐고 그저 변방의 작은 마을에 위치한 보육원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왔다.
보육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었고, 늦은 시기에 갑작스레 전신에서 신성의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본래 신성력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 중에서는 아무런 전조도 공통점도 없이,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능력을 검증받은 이들은 모두 신전에서 교육을 받은 끝에 사제나 성기사와 같은 신전 소속의 명예로운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과 절차다.
“이건 기회야!”
마리우스는 환호했다.
이 신성력의 능력을 인정받고 신전에서 교육을 마친다면, 자신은 사제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걸로 우리 보육원의 생활도 조금은 나아지겠지!”
그의 머릿속에는 신전 사제가 되면서 얻게 되는 명예와 지위보다는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보육원의 식구들을 지원할 생각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막 교육을 마친 최하위계의 신전 사제에게 지급되는 급여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겠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생겼다는 것은 마리우스에게도, 보육원에도 긍정적인 요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잘 됐다! 정말 다행이야! 마리우스!”
마리우스와 같은 또래의 여성, 네스는 마리우스의 신성력을 다른 이들 누구보다도 기뻐해 주었고 축하해주었다.
“그래도 너무 우리를 위해서 열심히 하지는 마. 너 한 사람에게 의지할 생각은 없어. 우리도 우리 살길을 모색해나가면서 이 보육원을 유지할 수 있어.”
네스 뿐만이 아니라, 이 작은 변방의 마을 안에는 마리우스와 네스와 같은 보육원 출신의 사람들이 각자의 살길을 모색하며 마을 안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힘들기는 했지만, 성인이 된 그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자신이 밥을 먹고 잠을 잤었던 보육원의 유지에 많음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보육원의 운영에 힘쓰고 있는 여성이 바로 네스였다.
기아나 분쟁 등으로 외부로부터 버려진 어린아이와 갓난아이를 데려와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며 재우고 키우며 시간을 보냈던 네스를 그 보육원 출신의 모두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누나처럼 이끌어주고, 동생처럼 의지를 해오면서 보육원 안의 활기를 담당하고 있는 네스의 축하와 격려는 마리우스에게도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오! 마리우스!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나중에 출세하면 우리 마을 잊으면 안 돼!”
“하하! 그럴 리가요!”
뿐만이 아니라 보육원 출신이 아닌 마을의 주민들이 늘어놓는 농담 섞인 덕담에 웃음꽃이 피었다.
비록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부모의 태생조차 모르지만, 자신이 자라왔던 보육원과 이 변방의 작은 마을에 사는 주민들 모두가 마리우스의 형제고 자식이며 부모였다.
때마침 마을을 방문한 상인에게 소정의 값을 지불하고 가까운 신전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신의 사정을 적은 편지를 부쳤다.
편지를 가진 상인이 떠나고 약 2주 뒤.
“마리우스!”
호들갑을 떨었던 네스가 밭일을 하고 있던 마리우스를 찾았고 그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신전에서 사제님이 오셨어! 주교님이시라는 고위 사제이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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