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4화 〉 554. 부활과 재회(4)
* * *
“후우…. 오랜만에 좀 빡셌네.”
브류나크를 에린에게 던져두고, 은현은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곧장 욕실로 들어왔다.
땀과 먼지로 더러워진 몸을 간단하게 씻어내고 곧바로 따뜻한 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탕에 몸을 담갔다.
“하아….”
등받이로 만들어둔 자리에 안착하며 몸을 기대자 따뜻한 온기와 입욕제의 향기로 가득한 온탕은 지금까지 긴장되어있던 신체의 피로를 풀어주고 있다.
에린과 백귀들과의 대련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었다.
처음 부활했었던 구미호가 소환하였을 당시의 백귀들도 만만치 않았었지만, 지금은 힘을 거의 회복하다 못해 생전의 완전한 육체까지 손에 넣은 상태.
명백히 대련의 영역을 넘어선 싸움이었지만, 신력을 사용하지도 않고 그 싸움을 흐지부지하게 넘긴 것은 정말로 천만다행이다.
“미안하다. 브류나크.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죽이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대련의 형태로 에린과 백귀들, 도합 10명을 상대로 모조리 제압하는 것은 솔직히 은현에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솔직히 무리라고 순순히 인정하고 대련을 중단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은현은 그 수단을 고를 수 없었다.
“나도 아직인가…?”
아무리 목숨이 오가지 않는 고작 대련의 형태였으며 수가 압도적으로 열세였다고는 하지만, 스승이 되어서 어떻게 제자에게 졌다는 걸 순순하게 인정할 수가 있을까.
순전히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였다.
그래서 에린에게 브류나크를 팔았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 난 죄 없어.”
애초에 브류나크가 시작부터 에린의 힘을 가늠하고 그녀를 깔보았던 것이 이 사단이 원인.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수고했구나.”
영체의 상태로 에린과 백귀들, 그리고 은현의 대련을 관전하고 있었던 베르단디가 허공에서 육체를 현현시키며 은현이 들어와 있는 욕탕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로 은현의 몸 위에 올라타고 상체를 꼭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부드럽고 풍만한 맨가슴이 밀착됐다.
모성과 애정이 가득한 그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기분이 좋아서, 은현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베르단디의 포옹에 호응하여 여신의 가녀린 허리를 꼭 끌어안고 지탱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풍만한 가슴 속에 얼굴을 묻었다.
“후후.”
처음에는 여신과 사도라는 관계 사이에서 많은 것을 망설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욕망에 충실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은현을 보며 베르단디는 웃었다.
서로의 맨살을 맞대고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잠시간 얼굴을 묻고 여신의 맨가슴 감촉을 충분히 즐긴 은현이 다시 얼굴을 들어 올렸고 베르단디와 시선을 마주했다.
“베르단디님.”
“음.”
무언가 궁금하다는 것이 있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은현의 목소리에 베르단디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에서 나올 질문이 어떠한 것인지를 대강이나마 짐작했다.
“에린에게 일어난 변화…. 베르단디님과 관계가 있으신가요?”
은현은 빙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묘하게 에린과의 대련을 주선하면서 에린을 밀어주는 태도나, 아무리 신수의 힘이라도 죽은 자들의 영혼인 백귀들에게 전생의 육체라는 명확한 실체가 존재하는 그릇을 제공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했다면 진즉에 구미호가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을 터.
은현은 에린이 가지고 있는 신수의 힘에 베르단디가 어떠한 간섭을 하여 은혜를 내려주었을 것이라 곧바로 간파했다.
“그렇지.”
“그럼…. 에린에게 설마….”
“음. 우르드 언니의 힘이 부여되었다. 백귀들이 살아있는 육체들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그 영향이지.”
베르단디는 모그라프령에서 언데드와 마수들과 싸움을 벌이면서 에린이 무엇을 하였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자신의 제안으로 은현의 권속이 되는 서약을 맺고, 그 대가로 부여받은 우르드의 힘 일부.
그것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것’이라는 모호한 개념이었으나, 에린이 그것을 통해 불러온 것은 무려 백귀들의 생전 육체들.
우르드에게서 자세한 사용방법도 듣지 못하고 그저 본능과 바람대로 여신의 힘을 사용한 결과는 백귀들의 소생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저 영혼이 텅 비어있는 과거의 육체를 불러온다고 해서, 그저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하계의 규율에도 간섭받지 않고 에린의 소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백귀들의 영혼이 생전의 육체에 호응하여 합쳐진 것은, 예속된 백귀들의 영혼을 가지고 있던 오직 에린에게만 가능했던 일이다.
“…엄청나네요.”
한 차례 죽은 자들에게 생전의 육체를 다시 재구성하여 소생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히는 일인지, 그 결과를 끌어낸 에린은 아마 생각도 못 할 터.
“나도 설마 저런 결과를 만들어낼 줄은 몰랐다….”
이것은 힘을 부여한 우르드나 에린에게 우르드를 소개한 베르단디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
처음에는 몹시 당황스러웠으며 우르드 또한 마치 사령술과도 같은 힘을 발현시킨 에린을 두고 우려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베르단디는 언니와는 달리 에린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기만 했다.
큰 성장을 이뤄낸 에린은 은현에게 아주 큰 힘이 될 터이니, 베르단디로서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결과가 흘러갔으니 제법 만족스러웠다.
“…아이야?”
하지만 은현의 얼굴은 기쁨보다는 조금 복잡해 보이는 감정을 드러냈다.
베르단디는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인지, 그 이유를 추측했다.
“…혹시 내가 마음대로 신수 아이를 아이와 권속의 서약을 맺게 한 것이 별로였느냐?”
자신의 의사는 관계없이 일을 진행시킨 것에 대한 복잡함일까.
베르단디로서는 은현을 생각해서 한 일이었지만, 은현은 자신의 동생인 스쿨드가 이번의 에린과 우르드처럼 멋대로 나서서 일리아나에게 사도의 권속 서약을 맺게 하고 힘을 부여했던 것을 그렇게 탐탁지 않게 여겼었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일이 에린에게 일어났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기엔 역시나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살짝 눈치를 보며 물어보는 베르단디의 말에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스승님의 얼굴이 떠올라서요.”
“아이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그때 신계에서 다시 만났던 그 스승 말이더냐?”
“네.”
은현은 베르단디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로 쓴웃음을 짓고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에린의 성장을 지켜보는 건 즐거워요.”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집안도 변변찮았고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의 밑에서 커왔던 무력한 소녀.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깡마른 몸과 당장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만 같았던 유약한 멘탈을 가지고 있었던 에린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 그녀의 성장은 아주 대견하다.
지금은 연인으로, 아내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은현은 에린을 절대 물렁한 생각과 훈련으로 키우지 않았다.
불합리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던, 자신이 부여한 과제를 성실히 클리어하여 단계를 밟아나가듯 성장해온 에린을 지켜보는 것은 이제는 은현이 가진 즐거움 중의 하나다.
그러다가 문득, 시에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친 자신의 스승은, 과연 자신의 성장을 보며 즐거워했을까.
은현은 그랬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자신과 에린의 관계에 만족함과 동시에, 반대로 시에테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에 큰 아쉬움이 남았다.
“흐음….”
베르단디는 은현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이유에 대해 뒤늦게 깨달았다.
제자의 성장을 지켜보고 큰 성취와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은현은 자신의 성장을 지켜보고 시에테가 큰 성취와 만족감을 선사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하고 있다.
“아이는 바보구나.”
“네?”
“아이는 이미 신격을 갖추기 위해 임했던 세 번째 시련에서 아이의 스승을 뛰어넘지 않았느냐?.”
“…….”
그리고 그곳에서 스스로 정체를 드러냈던 시에테는 자신을 뛰어넘었던 은현을 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보였으며, 다음에는 그를 제자가 아닌 하나의 검사로서 검을 겨뤄보고 싶다고 말을 했었다.
“그것은 성장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냐?”
“…하지만 그건 지금의 제가 아니었어요.”
그때 은현이 시에테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권능으로 약 800년 뒤 검의 극에 도달했던 또 다른 미래의 자신을 자신에게 빙의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것만으로는 뛰어넘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은현은 그런 수단 없이, 자신의 노력과 시간으로 쌓아 올린 기술로 직접 시에테를 뛰어넘고 싶었던 만큼, 그 시련에서 보였던 성과는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그때 아이가 아이의 스승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아이의 성장이 아니다. 아이의 가능성이지.”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했던 스승을 따라잡고 뛰어넘는 것.
결국엔 그것을 이뤄내는 미래는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은현에게도 절대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른하늘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은 작은 희망이었으나, 두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 경지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과 원한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 제약이다.
“800년이라….”
자신이 지금껏 살아왔던 것보다 두 배에 달하는 시간.
그 시간을 검의 길에만 매진해야만 얻을 수 있었던 검성의 칭호는 지금의 은현에게 있어 끝이 보이지 않는 여로를 걷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시에테는 현재 명계에 있을 터이니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건 걱정할 것 없다.”
“네?”
“아이의 스승은 지금…. 아니. 아니다.”
“……?”
베르단디는 웃으며 시에테가 에린의 힘으로 하계에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하려 했지만,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해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알몸의 자신을 앞에 두고 다른 여성을 생각하고 있는 은현에 대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령 시에테가 은현에게 있어 애정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사제 간의 정으로 이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알몸의 자신과 밀착시킨 상태로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니 베르단디에게는 굉장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여신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체를 꽉 짓누르듯 밀착시키며 목에 두르고 있었던 팔을 풀고, 은현의 어깨를 꼬집었다.
“…베르단디님?”
무언가 화가 났다는 것을 감지한 은현이 어리둥절하며 베르단디를 응시했고, 살짝 미간을 좁힌 베르단디가 맨살의 가슴을 더욱 밀착시키며 은현에게 말했다.
“아이의 그 아쉬움을 해결할 수 있는 선물은 이미 준비해두었다.”
“네? 그게 무슨….”
“그건 나중에 확인하면 된다. 지금은…다른 생각은 품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 말은 대답을 필요로 하는 요구가 아니었다.
베르단디는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 은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고 그의 입안에 혀를 넣어 진한 키스를 시작했다.
농밀한 감정 하나하나가 다 전해지듯 요염한 혀의 움직임은 다른 여자는 생각하지 말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는 여신의 강렬한 의사가 전해졌다.
천천히 진한 키스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던 베르단디의 손이 욕탕의 안쪽, 은현의 아래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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