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5화 〉 545. 전사의 혼(4)
* * *
[이건….]
하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에린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베르단디는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래 영혼으로만 예속되어 있던 백귀들은 신수의 마력을 통해 현현한 존재들로 영적인 존재들에 가깝다.
실체를 가지고 현실에 현현할 수는 있지만 제공된 몸은 에린이 소환을 해제해버린다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릴 마력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 신수의 힘으로 소환된 백귀들의 몸은 마력이 아닌 명백한 실체를 가지고 있는 육체다.
그것은 우르드의 권능과 백귀들의 영혼을 매개로 소환된 백귀들이 생전에 사용하였던 과거의 육체들.
살아생전에 사용했던 육체에 백귀들의 영혼이 정착하여 하계에 부활한 현재 상황은 베르단디에게 있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당혹스러운 사건이었다.
그것은 영락없는 ‘사자소생(死者??)’의 영역으로 명계의 신들이 관리하는 규율에 어긋나는 금기다.
[…….]
베르단디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물끄러미 하계를 지켜보고 있는 우르드를 흘끗 바라보았다.
[언니는….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어?]
[아니.]
우르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여신인 자신이 하계의 존재와 같은 사고방식과 생각을 가지 있을 리가 만무한데 에린의 행동과 생각을 읽었을 리가 없다.
우르드가 에린에게 은현과 맺은 사도의 권속을 매개로 자신의 힘 일부를 부여한 것은 다름 아닌 베르단디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지, 에린에게 어떠한 것을 기대하거나 바라고 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힘을 어떻게든 활용하여 좋은 결과를 끌어냈던 은현이라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은현에게 시에테의 영혼을 보내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에린이 만들어낸 이 상황에 대해 우르드 또한 떨떠름했다.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은 엄연한 금기의 영역으로 그 금기를 실행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존재들이 바로 언데드이다.
[…미쳤군.]
우르드는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죽음을 거부당하고 평생을 비참한 몰골로 하계를 떠돌아다니며 방황하는 언데드들.
그리고 그러한 언데드들을 부리는 정점에 있는 망자의 여왕이라는 메디아에 의해 하계가 큰 위험을 직면했던 과거의 사건은 하계의 관리자인 신들의 사이에서도 큰 골칫거리였다.
어떠한 의미로 죽은 자들을 되살려 그들을 부리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내어버린 이 상황은 에린에게 힘을 부여한 우르드를 금세 후회스럽게 만들었다.
망자를 되살려 자신의 부하로 부린다는 공통점이, 어쩌면 먼 훗날에 메디아처럼 재앙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텄기 때문이다.
[역시…. 인간 따위를 믿는 건 실수였던 걸까.]
[아니. 아직 단정하기엔 일러.]
하지만 우르드와 달리, 베르단디는 이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신수 아이는 그렇게 인간들을 위협할 정도로 재앙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아니야. 그리고…. 나의 아이가 잘 이끌어주겠지.]
다른 신들은 몰라도, 하계에 직접 내려가 에린과 함께 살을 맞대어본 경험이 있었던 베르단디는 에린이 메디아처럼 불안한 존재로 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은현이 붙어있기 때문에, 그녀가 변하지 않도록 앞에서 잘 지탱해줄 거라는 믿음이 확고하다.
[너는 너무 물러. 혹시라도 저 인간이….]
[언니.]
동생처럼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우르드는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우르드의 말을 끊은 베르단디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내가 선택한 아이가 받아들인 아이야.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언니가 나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신수 아이에게 힘을 부여한 것도 절대로 후회가 되지 않도록 나와 아이가 노력할게.]
[…그래.]
우르드는 동생의 설득에 결국 의지를 굽혔고 에린에게 부여했던 자신의 힘을 회수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하계를 살피며 에린의 모습을 주시했다.
◆ ◆ ◆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여 멀뚱멀뚱 서 있던 백귀 하나가 육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갑옷과 무기의 무게.
귀를 타고 들리는 무기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소음.
구역질이 나는 시체의 썩은 내와 피의 냄새.
갑옷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새벽바람의 싸늘함.
자신의 전방에 펼쳐진 마수와 인간들의 싸움.
모든 감각이 활성화되어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이제는 사라져버린 지 오래인 자신의 생생한 육체다.
그렇게 당혹스러웠던 것은 다른 백귀들 또한 마찬가지.
“너 지금 말했냐?”
한 백귀가 당혹스러워 중얼거렸던 백귀에게 어리둥절한 투로 물었다.
목소리의 톤부터 ‘이게 왜 되냐?’라는 뉘앙스가 가득 담겨 있는 동료의 말을 들은 백귀는 도리어 그 백귀에게 물었다.
“니도 지금 말하고 있잖아.”
“…그러네? 뭐냐. 이거 지금?”
“아니. 낸들 아냐고.”
당혹스러웠던 백귀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한쪽을 응시하는 동료 백귀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 있는 것은 현재 자신들이 모시는 새로운 주인.
그들은 자신들이 갑작스레 생전의 육체를 되찾아 완전히 부활하게 된 원인을 깨달았다.
“백귀님들! 상태 어떠세요!?”
주위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백은의 꼬리 중심에 서 있는 어린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작게 웃음을 지었다.
“아주 좋습니다.”
검사 백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을 이었다.
“재차 소개하겠습니다. 백귀야행에 속한 검사 백귀. 아서 브렌델이라고 합니다.”
리더격에 속한 검사 백귀가 정중한 격식을 차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를 따라 하듯 여덟 백귀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새롭게 모시게 된 어린 주인에게 말했다.
“가웨인 솔텐.”
“란슬롯 트발.”
“퍼시벌 테룬.”
“트리스탄 다일!”
“베디 엔데른.”
“모드레 갈레오.”
“아그라베 인데어.”
그리고 마지막 남은 백귀는 자신이 가르쳤던 기술을 훌륭하게 선보인 에린을 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갤러해드 아리엔입니다.”
제일 처음으로 에린의 의식에 말을 걸었던 백귀이자, 그녀의 세검술의 기초를 제시했던 여성.
청염의 불길을 전신에 두르며 백은의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있지만, 자신을 소개하는 갤러해드의 목소리에는 다양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대견함, 뿌듯함, 기쁨.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자신을 포함한 백귀들을 부활시키는 특별한 능력을 갖춘 자신의 주인에 대한 경외심이 섞여 있다.
“우리의 주인이시어. 부디 명령을.”
에린은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백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원! 언데드들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고 모조리 배제해주세요!”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백귀들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 주인의 명령을 수락했다.
천천히 무릎을 꿇었던 몸을 일으키는 검사 백귀.
아서를 따라, 다른 백귀들이 잇따라 일어서며 일제히 자신의 무기를 거머쥐었다.
검, 세검, 창, 전투 도끼, 활 등 다양한 무기를 쥔 그들은 무시무시한 투기를 뿜어내며 주인이 섬멸을 명령한 적들을 주시했다.
“진형은 3번으로 간다. 단 베디와 아그라베는 사람들의 백업과 구조를 우선시.”
“확인.”
“그러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두 백귀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하하! 설마 살아있는 몸으로 이렇게 소통을 하며 싸우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카아앙!
양손에 착용한 건틀렛을 서로 부딪치며 백귀 하나가 호탕하게 전의를 불태웠다.
육성으로 말을 하고, 전장의 중심에 서서 전장을 오감으로 느끼는 지금, 이 순간에 전율한다.
전신을 풀 플레이트 메일로 착용하고 있어도, 한껏 달아오른 그의 기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트리스탄. 퍼시벌.”
“그래! 하하하!”
“알았다.”
건틀렛을 착용한 백귀와 전신만큼이나 커다란 그레이트 소드를 뽑아든 백귀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나머지는 나를 따른다. 그리고…갤러해드.”
“네. 아서.”
“주인을 모셔라.”
“배려 감사합니다.”
갤러해드는 고개를 숙이며 아서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다.
아홉 백귀들은 모두 신수의 마력이라는 근원에 혼을 예속된 존재들.
현실에 스스로 현현할 수 있는 육체는 물론 육성으로 말할 수 있는 성대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이 일사천리로 진형을 갖추고 딱 들어맞는 연계를 맞춰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그 근원을 함께 공유하면서 심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서는 같은 세검을 사용하는 세검사로서 훌륭한 성장을 이뤄낸 에린이 대견하면서도 뿌듯함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갤러해드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 들였다.
“그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갤러해드의 감사를 받아들인 아서는 다른 백귀들과 함께 에린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자, 그럼. 우리도 시작해볼까요? 아, 그나저나….”
갤러해드는 자신의 세검을 쥐고는 에린을 흘끗 바라보았지만, 이내 왠지 모르게 에린의 뒤, 허공에 떠 있는 시에테의 모습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검성을 뵙게 될 줄은…. 영광입니다.”
[흠?]
시에테는 느닷없이 자신에게 경의를 표해오는 백귀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백귀의 정체도 정확히 모를뿐더러, 이 대륙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는 은현 이외에 단 한 명도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의 소식이었다.
[나를 알고 있나?]
“그럼요. 지구에서는 ‘검성 시에테’의 이름을 모르는 검사는 없었습니다.”
시에테가 사망한 정확한 이유는 악마와의 교전 때문이었지만, 세간에서는 돌연 종적을 감춰버리면서 행방 불명 처리가 되어 있었다.
행적 자체가 사라진 것은 물론, 악마와 싸운 끝에 패배한 그녀의 시체는 수습할 수도 없을 정도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그녀의 영혼은 마계에서 악마들에게 농락한 끝에 최악의 사령술사의 손에 들어갔다.
많은 검사가 돌연 자취를 감춰버린 그녀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유산과 기술을 계승하기 위해 행적을 좇았지만.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으며 끝내 시에테의 검술은 세간에서 그녀의 행적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남아있는 것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검성 시에테’라는 이름뿐.
에린의 마력 속에서 기억 일부를 엿들었던 갤러해드는 시에테가 에린에게 자신을 시에테 로페즈라는 이름으로 소개를 했던 순간부터 그녀가 검성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응…?”
한없이 정중한 목소리와 태도로 고개를 숙이며 유령에게 인사를 건네는 갤러해드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것은 에린이다.
“검성? 그게 뭔데요?”
“검의 성인(成人). 즉 검술이라는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분을 저희들 쪽에서는 검성이라고 불렀죠.”
“…….”
자신이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은 얼굴을 보이며 화들짝 놀란 에린이 손가락으로 시에테를 가리키며 되물었다.
“이, 이 유령님이 그렇게 대단한 분이셨다고요…?”
“네. 모르고 계셨나요?”
오히려 어째서 모르고 있는 건지, 갤러해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에테는 다름 아닌 에린을 키워낸 은현을 가르쳤던 스승일진데,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그 눈썰미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
에린의 단편적인 기억만으로 그것을 간파해낸 시에테는 도리어 화들짝 놀라며 되묻는 에린의 모습이 자못 우스웠다.
“그, 그냥 말 많은 아줌마인 줄 알았는데….”
[…뭐?]
작게 중얼거린 그 말은 그저 무의식 속에서 흘러나온 혼잣말에 불과했으나, 그것은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수준으로 영체뿐인 시에테의 가슴에 비수가 박혀 날아왔다.
살아생전에 결혼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던 자신을 아줌마라고 부르다니, 언젠가는 은현에게 분풀이하기 위해 지금까지 꾹 참으며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던 응어리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소환해라.]
“네?”
[저 백귀라는 것들의 육체를 소환했던 것처럼, 과거의 내 육체를 다시 소환해라.]
“아니. 저…. 그게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라면 해.]
지금까지 그저 방관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사사건건 훈수만을 두었던 시에테가 갑자기 전의를 불태우며 강압적인 말투를 사용하는 것이 몹시 당황스러웠던 에린은 어느샌가 시에테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호족 요술(?? ??)]
[백귀야행(???行)]
우르드의 중재를 통해서 에린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어온 시에테의 영혼은 마침내 열 번째 백귀로서, 또한 에린이 만들어낸 첫 백귀로 새롭게 탄생하는 순간.
그저 영체에 불과하여 허공을 부유하던 시에테의 영혼이 점점 명확한 실체를 가진 생전의 모습으로 부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몹시 기묘하다.
다른 백귀들과 달리 풀 플레이트 메일은커녕 방어구는 전혀 착용하고 있지 않고, 기껏 가지고 있는 무장이라고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세 자루의 장검.
시에테는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장검 한 자루를 뽑아 들고 에린을 노려보았다.
“……!”
그녀의 그 시선이 몹시 사나워서 순간적으로 에린은 물론 갤러해드 또한 움찔거리게 만들 정도.
‘아, 큰일났다.’
갤러해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심성 없이 나온 에린의 발언이 불러온 것은 검성의 분노라는 대참사다.
“잘 봐둬라. 검술이란 이런 것이다. 이 건방진 손제자 녀석.”
“소, 손제자…? 그게 무슨….”
에린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틈도 주지 않고, 시에테는 콧방귀를 뀌며 언데드 마수의 무리 사이에 돌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