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4화 〉 544. 전사의 혼(3)
* * *
[그 검은 현재 검집과 손잡이가 하나로 결합이 되어있는 상태지.]
본래 검집이란 검의 날을 집어넣는 보관의 용도로 사용되지만, 이 경우에는 전혀 다르다.
주인 이외에 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인의 형태로 장치가 채워져 있다.
“…손잡이와 검집이 합쳐져 있다고요?”
에린은 머릿속으로 그것이 무슨 상태인지를 생각하였지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하다. 신철이라면.]
신철(??).
또는 오리하르콘이라고 불리는 신의 금속은 사용자의 마력에 반응하여 특수한 변화를 일으키는 특수한 금속.
은현은 검집과 손잡이를 하나의 형태로 결합하여 그 검을 뽑을 수 없도록 특수한 장치를 걸어두었다.
[그 녀석이 설마 신철을 제련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을 했다는 건가. 하하.]
시에테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 보였다.
검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만큼 훌륭한 검에 관한 관심도 높았던 그녀는 에린이 차고 있는 레반테인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훌륭한 검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던 과거의 제자라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신기했다.
검술뿐만이 아니라 체술 쪽에도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던 것처럼, 전투를 포함하여 심지어 그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끊임없이 위를 추구하며 노력해온 은현의 노고 일부가 보이는 것만 같다.
“유령님은 이런 걸 어떻게 아세요?”
[…내 이름은 시에테다.]
시에테는 기껏 자기소개했건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에린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뭐 신기할 것도 없지. 내가 있던 곳에서는 흔히들 사용하던 방식이었으니까.]
“…응?”
에린은 시에테의 답변에 의아함을 느꼈다.
은현이 만들어낸 검의 잠금장치에 대해서 단번에 파악하였고, 자신이 생전에 살았던 곳에서는 이 방식이 흔하다는 것은 시에테가 은현과 같은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묘하게 은현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는 몹시 신경 쓰였다.
그녀가 하는 말과 표정들이 마치 스승인 은현이 자신을 대견하게 보는 그런 느낌과 비슷하여 기시감이 일었다.
“끄아악!”
“괴물…!”
“도, 도망쳐어!”
“아…!”
작게 당황한 에린은 곧바로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전방으로 돌렸다.
점점 근접해오는 마수들을 보고 기겁한 병사들이 황급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그냥 일반적인 야생의 마수들이 아니고, 사기(死?)에 노출되어 죽음을 거부당한 시체의 마수들.
썩어버린 것도 모자라 벌레들에게 파먹힌 그 기괴한 몰골을 마주한 병사들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인간형 언데드와는 차원이 다름을 느꼈다.
덩치도,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분 나쁜 사기(死?)의 기운도, 하나부터 열까지 구토를 유발하는 역겨운 모습 그 자체.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자연스레 뒷걸음질을 치고 기겁하며 하나둘씩 전선을 이탈해가는 모습을 본 에린은 다급해졌다.
감정 왜곡을 통해 그들의 마음속에 공포심을 지우고 대항심과 투쟁심을 심어놓았듯, 역으로 에린이 심어둔 감정들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공포와 두려움을 채우는 것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에린도 그것을 예상하기는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자신조차도 순간 전신의 피부를 오싹하게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언데드 군단.
죽고 싶지 않다는, 저것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생존 본능을 자극당하여 도망치는 저들을 어떻게 탓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탓할 틈도, 망설일 틈도, 생각할 틈조차도 지금의 에린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고 선택을 강요당했다.
허리춤에 채워진 자신의 남편이 선물해준 레반테인의 손잡이를 꽉 쥐고 뽑으려 했지만, 단단한 잠금장치가 걸려 있는 레반테인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곧바로 시에테를 홱 돌아보며 에린은 물었다.
“검! 어떻게 하면 뽑을 수 있죠!?”
[간단하지. 네가 두를 수 있는 최대한의 마력을 검에 불어넣어라. 칼날에 검기를 두를 수 있게 되는 순간이 네가 진짜 검사로서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이밀게 되는….]
“알겠어요!”
에린은 또다시 시작되는 시에테의 장황한 설명을 곧바로 끊어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자신의 말을 또 끊어버린 에린의 괘씸함에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에린을 크게 나무랄 수도 없었다.
‘제자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아주 혼을 내야겠군.’
그저 속으로 에린을 가르친 은현을 혼내기 위해 마음속의 짜증을 차곡차곡 저장해나갔다.
일단 중요한 것은 에린과 레반테인이었기에 그녀를 주시했다.
[생각해보니 그때도 이곳이었지.]
에린은 일전의 모그라프령에서 벌어졌던 마수 대범람 사태 때, 구미호의 도움으로 레반테인을 한 번 뽑았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도움 없이,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검을 뽑게 되는 순간이 왔다.
비록 시에테라는 정체불명의 유령 여검사의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 순간은 틀림없이 자신이 성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할 수 있어.’
은현은 언젠가 자신이 뽑을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며 이 훌륭한 검을 자신에게 맡겼다.
그의 아내이자, 제자로서 마음에 답하기 위해 에린은 정신을 집중했다.
체내에서 끌어올려 외부로 방출되는 밀도 높은 마력은 신수의 마력과 은현의 신력이 뒤섞여 만들어진 강력한 힘의 집합체.
구미호에게서 갖은 면박과 구박을 받으면서 수행을 통해 성장시킨 에린의 마력 컨트롤은 그 방대하면서도 밀도 높은 마력을 완벽히 제어했다.
‘낭비가 없게 흘러넘치지 않도록 일정량을 유지하면서…이걸 검으로….’
철컥!
마침내 에린의 마력에 반응한 레반테인의 검집에 걸려 있던 잠금 장치가 해제되었다.
“돼, 됐다아!”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염원했던 레반테인을 스스로 뽑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에린이 크게 환호한다.
이것은 그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으며 은현이 바라마지 않는 훌륭한 검사로 성장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과이기도 하다.
“끄아아!”
“아, 아차!”
에린은 병사들의 비명을 듣고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너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미처 사람들을 돕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곧바로 레반테인을 뽑았다.
에린의 마력으로 형성된 푸른색의 청염이 레반테인의 날카로운 예기를 더욱 강조한다.
다시 한번 볼 수 있게 된 검신의 그 아름다운 자태에 무심코 넋을 잃고 바라만 볼 뻔했지만, 에린은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하지 않았다.
레반테인을 꽉 쥔 채로, 에린은 달렸다.
“으아악!”
목표는 앞에서 후방을 향해 도망쳐오고 있는 젊은 병사를 위협하는 언데드.
오크의 시체로 만들어진 거구의 언데드에 겁을 집어먹고 뒤로 도망쳐오는 병사와 교차하듯이 에린이 병사들을 지나쳐 질주했다.
바람을 가르고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저 자신의 옆을 무언가가 지나갔다는 것밖에 깨닫지 못했다.
빠른 속도로 가속하여 힘이 더해진 레이피어가 사선상에 놓인 거구의 오크 좀비의 머리를 겨눴다.
[갤러해드 세검술]
[질풍사(?風?)]
검으로 만들어진 ‘참격’의 부류에 속하지만, 질풍으로 가속된 그 공격은 엄연한 ‘사격’의 범주에 들어가는 위력과 속력을 만들어낸다.
에린과 오크 좀비의 거리가 근접해지자, 에린은 땅을 세차게 차며 더욱 빠르게 가속했고 오크 좀비의 품속에 뛰어들었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품에 파고든 에린의 레이피어는 그대로 오크 좀비의 머리를 관통했다.
퍼엉!
응집되어있던 푸른색의 청염은 좀비의 몸을 모조리 불태우는 것이 아닌 강렬한 폭발을 만들어냈으며 오크 좀비의 머리를 형체도 남아있지 않도록 없애버렸다.
“어, 어…?”
급작스러운 언데드 마수의 등장에 당황하며 도망치기 바빴던 병사들과 필사의 항전을 이어나가고 있던 아르티아 기사단원들, 베스타 신전의 사제와 성기사들의 이목이 일제히 에린에게 집중됐다.
강력한 마력을 전신에 두르고 오크 좀비 하나를 압살해버린 에린의 등장은 마치 절망의 나락에 떠밀린 자신들을 구원해주는 영웅의 등장과도 같았다.
에린은 하늘 위로 레반테인을 높게 들어 올렸다.
어두운 밤하늘의 달빛을 머금고 위로 들어 올려진 레이피어는 푸른색의 청염의 열기를 사방에 흩뿌리며 모든 이의 이목을 한데 모았다.
이윽고 에린의 전신에 뒤덮은 마력이 응집되어 백은의 아홉 꼬리와 여우귀를 만들어냈다.
‘힘이 넘쳐흘러.’
체내에 있는 정갈하고 밀도 높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아홉 꼬리는 명백히 평소의 신수화와는 다르다.
전신은 물론이고 주위의 몇백 미터를 뒤덮는 백은의 아홉 꼬리는 그녀의 이전 대였던 구미호의 영역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신수의 마력에 막대한 기운을 품은 은현의 신력이 더해진 결과로 힘의 크기만으로 이미 구미호를 뛰어넘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
레반테인의 검날을 제작하는데 만들어진 소재, 신철 오리하르콘은 그런 에린의 마력을 가득 흡수하며 더욱 빛을 발하고 예기를 날카롭게 하여 존재감을 과시했다.
계속해서 축적되고 쌓여가는 마력은 레반테인의 검날을 두르며 거칠게 휘몰아쳤다.
잘 봐둬라. 이건 미숙한 네 녀석의 현재 수준으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사용할 수 있게 되겠지. 동물도 알아들을 수준으로 설명해주마. 그냥 모아서 전방에 휘두름과 동시에 터뜨리면 된다. 알겠느냐?
‘미호가 알려준 게…. 이게 맞나?’
에린은 구미호가 가르쳐주었던 기술을 떠올리며 레반테인에 자신의 마력을 끊임없이 밀어 넣었다.
이윽고 검신이 부르르 떨리며 에린의 손까지도 그 진동이 전해져 마침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전방을 향해 레이피어를 휘둘렀다.
“에잇!”
[호족 요술(?? ??)]
[괴력난신(?力?)]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는 일섬과 함께 레반테인에 응축된 청염의 검기가 휘몰아치며 사선상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땅을 가르고 공기를 찢어발기며 휩쓸린 언데드 마수의 전신을 갈가리 찢는 것도 모자라 터뜨려버리면서 형체도 남기지 않았다.
“세상에….”
한 기사가 에린의 검기를 보며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왕국 최강의 기사인 리오드 올리비온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그를 제외한 어떤 기사들의 공격보다도 뛰어나다.
울창한 수풀이 이어졌던 숲은 갈라진 대지와 휩쓸린 폐허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만들어낸 여파.
하지만 에린은 이러한 공격을 퍼붓고도 자신의 내부에 솟아오르는 마력의 기운에 전율했다.
‘이건 어쩌면….’
곧바로 떠오르는 것은 자신에게 힘의 일부를 부여한 우르드.
과거를 불러오는 힘이지.
너는 어떻게 네 몸을 움직이는지 설명하라면 할 수 있나?
‘…과거를 불러오는 힘.’
그 개념은 몹시 모호하고 애매하다.
그렇다고 그 예시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은현이 허공에서 무기를 소환해오는 개념은 바로 과거에 존재했던 무기를 현재로 불러오는 것.
그와 같은 힘이 자신의 영혼에 부여되었다면 자신에게도 그것이 가능할 터이다.
‘그래도 난 그런 건 못해.’
은현처럼 과거의 물건에 대한 개념과 생김새, 구성 등 정확한 배경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불러올 수 있을까.
에린은 자신의 능력을 발동시켰다.
[호족 요술(?? ??)]
[백귀야행(???行)]
‘어떻게’라는 의문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우르드의 말대로 의식하지 않고 바랄 뿐이다.
에린이 불러오는 것은 백귀들의 혼을 매개로 그들의 육체.
주인의 부름을 받아 소환되는 아홉 백귀들은 무언가, 평소와 다른 이질감을 느꼈다.
“이건…?”
푸른 청염으로 둘러싸인 갑옷의 안에서 들리는 것은 명백한 육성이다.
성대를 타고 흘러나오는 음성은 이제 다시는 내지 못할 거로 생각했던 인간의 육체다.
검사 백귀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백귀들 또한 당황스러운 상태.
인간의 오감으로 느껴지는 생생한 감각은 몇백 년을 넘어 포기했던 그 감각이었다.
뒤늦게 현실을 직시한 백귀들은 확신했다.
자신들은 되살아났다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