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543화 (526/730)

〈 543화 〉 543. 전사의 혼(2)

* * *

모그라프 변경백작은 지금 기적을 경험하고 있었다.

“꿈인가….”

성벽의 위에서 전황을 바라보고는 스스로 자조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틀림없는 현실이다.

“으아아!”

미숙한 한 명의 젊은 병사가 광활한 숲에 울려 퍼지는 기합과 함께 언데드에게 검을 휘둘렀다.

퍼억!

대상을 베어버리지 못하고 타격의 소리를 만들어내는 그 참격은 염연히 말하자면 검술로서는 한없이 미흡하고 조잡한 공격에 불과했다.

그것은 당연하다.

신병으로서 무기를 잡아본 것이 가장 최근에 불과한 젊은 병사에게 큰 기대를 바랄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자신의 뒤에 있을 영민들,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는 젊은 병사의 기백은 틀림없는 전사의 소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병사뿐만이 아니다.

서투르지만 몸을 움직여 무기를 휘두르고 언데드들을 대항하는 자신의 병사들을 보며, 지휘관인 모그라프 백작은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하다.

자신의 영지민과 병사들이 언데드들에게 살점을 뜯어먹히며 무참히 살해당하고, 그들의 시체가 다시 언데드가 되어 국경의 수비가 뚫리리라는 것이 모그라프 백작이 생각하고 있었던 최악의 미래다.

마수 대범람 사태 이후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영지의 상태를 회복시켰지만, 또다시 덮쳐온 재앙을 해결할 수 없다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대단하다.”

이렇다 할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신입 병사들이 대등은 물론 압도하며 언데드들을 처리해나가고 있는 광경은 저 언데드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여 왕가에 도움을 요청했었던 모그라프 백작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만큼 베스타 신전의 최고위 사제라고 일컬어지는 대주교, 아니에스의 신성 마법은 기적에 가깝다.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자신이나 병사들, 영지민도 아니며 베스타 신전의 사제들과 성기사들, 심지어 아르티아 기사들도 아니다.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두 명의 여성이 만들어낸 이 상황은 몹시 비상식적이면서도 기이하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득히 자리 잡은 두려움과 공포를 없애고 거기에 자신들도 언데드에게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투쟁심을 깃들게 만든 것은 모그라프 백작에게는 불가능했다.

그 과정에 에린의 감정 왜곡으로 병사들의 감정을 건드렸다는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이가 어린 젊은 여성 모험가가 몹시 대단해 보였다.

“나에게…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지는 건가.”

타인들의 손을 빌렸다지만, 아직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국경의 수호 임무라는 가문의 역할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는 천운과도 같은 기회.

모그라프 백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너희의 영지와 너희의 가족들은 너희의 손으로 지켜. 알겠냐?

“그래. 맞는 말이지.”

도움은 받을지언정, 이 영지를 지키는 것의 주체는 모그라프 영지의 병사들이지 그 역할을 다른 소속에 넘겨서는 안 된다.

국경의 수호는 모그라프령의 영지가 부여받은 역할이며 책임.

그것을 다른 쪽에 빼앗겨서는 오랫동안 이어온 책임과 역사에, 자신들의 선조를 볼 낯이 없어져 버리기 때문.

모그라프 백작은 새롭게 마음을 다잡으며 전장을 지휘했다.

◆ ◆ ◆

서걱

에린은 또 하나의 좀비를 베어 넘기고 굳은 표정으로 최전방에 몸을 던져 언데드들을 처리해나갔다.

아니에스의 결계 속에서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향상되는 축복의 혜택을 받는 상태로, 굳이 구미호의 모습으로 변신하지 않더라도 좀비들을 휩쓸며 처리할 수 있었다.

반면 신성의 결계에 노출된 언데드들의 시신은 눈에 띄게 약화하여 제대로 훈련을 받지 않은 병사들에게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수준.

에린은 물론 아르티아의 기사들처럼 수많은 전투경험을 쌓은 이들에게는 크게 위협적인 문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얼마나 남은 거지?’

에린은 사기(死?)에 노출되어 처참한 몰골로 움직이고 있는 인간들의 시신들을 베어 넘기며 생각했다.

자신이 처리한 언데드의 숫자만 벌써 스물이 넘는다.

그들 모두가 모두 생전에는 평범한 생을 살았던 인간들.

언데드들은 많은 사람에게 있어 적이었지만 그것들을 베는 쪽의 기분도 최악이었다.

젊은 남성과 여성, 늙은 노인과 어린아이들까지 살점이 파먹히고 뜯겨 뼈마디가 보이는 처참한 몰골로 공격해오는 그들 또한 아무런 죄도 없이 희생당해 생을 마감한 피해자들이었기에, 그냥 적을 배제하는 살인보다도 더욱 기분이 최악이다.

­언데드를 상대하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깎여나가는 것만 같은 고역이나 마찬가지야.

언젠가 한 번 했었던 은현의 말이 어떠한 의미인지 뒤늦게 이해했다.

썩어버린 뼈와 살을 파고드는 검날의 감각이 손가락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엉성하군.]

“…….”

[빠르긴 하지만 동작의 연결이 아직도 어수룩하고 정밀하지 못해. 그렇기 때문에 검에도 모든 위력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기분도 최악인데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상한 유령이 자신의 검술을 보며 품평하고 있다.

[제법 노력한 흔적이 보이긴 한다만, 너 정도의 검사는 세상에 널리고 널렸겠지.]

게다가 그 평가 또한 굉장히 비관적으로 에린의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푹푹 꽂히듯 더욱 기분을 상하게 만든다.

친한 사람이나 리오드, 아니면 자신을 가르친 은현이라면 상처가 되더라고 울며 겨자 먹기로 그 혹평을 받아들일 생각이기는 했지만.

“아니. 왜 자꾸 말 거예요. 집중 안 되게.”

[나는 그저 네 검술에 대해 평가했을 뿐이다. 무릇 검술이란 것은….]

“그만. 그만!”

검술이란 무엇인가.

그 주제로 이어나가 시작하는 시에테의 일장 연설을 벌써 수십 번을 반복했다.

이제는 유령이 되어버린 그녀가 생전에 얼마나 대단한 검술을 했고 어떠한 위업을 쌓았는지를 모르는 에린에게는 전혀 관심 없는 주제였다.

게다가 자신 글 가르친 은현의 교육방식과도 굉장히 틀리다.

‘잘한다. 잘한다.’라고 오냐오냐해주면서 자세부터 틀린 부분은 모조리 지적하여 고칠 때까지 교정해주는 은현의 가르침과는 달리, 시에테의 가르침은 마치 뜬구름을 잡는 듯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표현들로 가득하여 그 흐름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다.

현재의 에린에게는 검술에 대한 시에테의 일장 연설보다 모그라프령을 위협하는 언데드들의 배제가 현재 최우선 순위인 만큼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지금 엄청 바쁘니까 말 시키지 마세요!”

[…….]

다시 언데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빠르게 달려간 에린이 사라지자 대화 상대를 잃은 시에테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에린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놈은 도대체 어떻게 교육했길래 저렇게 버르장머리가….]

그저 자신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해버리고 사라져버린 에린에 대하여 기분이 상한 시에테는 에린을 가르친 은현을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단단히 혼을 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무기 좀 바꿔주세요!”

에린은 곧장 후방으로 달려가 보급 담당의 병사에게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없는 자신에게 임시로 지급되었던 장검을 보여주었다.

변방의 영지에 보급되어 있던 무기인 만큼 싸구려에 불과한 장검이었다 하더라도, 검의 상태는 심각하다.

언데드의 썩은 뼈와 살점들을 가르면서 묻은 피로 더러워지고, 이가 빠지고 금이 가기 시작한 장검은 용케도 이런 거로 싸우고 살아남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

“여, 여기 있습니다!”

자신의 또래, 또는 젊은 여성 모험가의 활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보급담당 병사는 급히 당황을 추스르면서 새로운 무기를 에린에게 지급했다.

“고마워요! 몸 조심하세요!”

이것으로 무기의 교체는 세 번째.

슬슬 국경을 향해 접근해오는 언데드의 무리도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길 수 있어!”

“살 수 있다고!”

조금씩 전투의 양상이 자신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은 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이 가장 먼저 체감하고 사기는 최고조로 치솟았다.

“아직…. 아직이야.”

그런데도 에린은 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까지 긴장을 놓지 마라!”

지휘관이자 이 변경의 주인인 모그라프 백작의 우렁찬 사자후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한 병사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언데드 무리만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은 에린뿐만이 아니라, 아르티아 기사단들, 그리고 모그라프 백작은 잘 알고 있었다.

쿵! 쿵! 쿵!

“…이…건!?”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땅을 찰 때마다 울리는 거센 진동의 소리.

점점 가까워질수록 진동과 소리의 세기가 점점 강해지는 이 감각은 며칠 전 숲에서 느껴보았던 익숙한 감각이었다.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전방의 숲 깊숙한 곳으로 시선을 옮긴 에린을 따라 너도나도 고개를 돌려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존재들을 보며 온몸의 긴장을 곤두세웠다.

“오, 오우거라고!?”

그것도 한 개체가 아닌 다 여섯의 여러 무리.

뿐만이 아니라 오우거와 함께 등장한 워울프, 코볼트, 고블린 등 야생에 서식하는 다양한 마수의 무리는 언뜻 보기에도 현재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인간 측의 병력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에린은 본능적으로 감지를 펼쳐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수들의 규모를 살폈다.

“끄….”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 순간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두통을 느낀 에린은 이를 꽉 깨물며 그 정보들을 수용했다.

“사백…. 아니. 육…. 팔백!?”

가늠하여 결론을 내린 숫자의 규모에 에린이 경악했다.

거의 이쪽의 규모에 두 배나 달하는 병력의 차이는 지금껏 치솟았던 아군의 사기를 단번에 바닥으로 끌어 내릴 수 있는 소식이다.

‘어쩌지?’

에린은 망설였다.

이제는 부러져 버린 자신의 레이피어가 오우거의 목을 완전히 절단하지 못했을 정도로 뛰어난 방어력을 싸구려에 가까운 조잡한 장검으로 상대를 할 수가 있을까.

심지어 한 개체도 아닌 다수의 개체와 수백에 달하는 마수들을 상대해야 하는 지금은 조건도 제약도 너무도 최악이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검. 뽑지 않는 건가?]

“네?”

에린은 느닷없이 자신의 검을 가리키는 시에테의 물음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검을 놔두고 다른 조잡한 검을 사용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검사란 무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딱 보기에도 훌륭한 무기를 내버려 두고 내구성도 공격력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검을 사용하는 것은 그냥 어리석은 것이나 마찬가지.

“이 검은…. 아직 못 뽑아요.”

[못 뽑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그게…. 아직 자격이 없어서….”

시에테는 영체를 조작하여 에린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그녀의 허리춤에 채워진 레이피어를 유심히 관찰했다.

[…호오.]

익숙한 형태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그 검은 누가 만들었는지 금방 눈치챘다.

[그 어리숙한 녀석이 이제는 이런 훌륭한 검도 만들 수 있게 되다니….]

“네? 현이를 아세요?”

에린은 자신에게 검을 제작하여 선물한 은현을 아는듯한 시에테의 말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뽑아라.]

하지만 시에테은 에린의 그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짜고짜 에린에게 명령했다.

[내가 뽑는 법을 알려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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