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2화 〉 542. 전사의 혼(1)
* * *
“어, 그러니까…. 여기는 모그라프라는 변경령의 숙소인데….”
[그렇게 말해도 나는 모른다.]
“…네?”
서로의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시에테의 물음에 답하여 이 장소를 설명하려던 에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흐음.]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힘들 것으로 판단한 시에테는 부유한 자신의 영체를 움직여 방안 내부를 살폈다.
대부분 원목으로 제작된 이 방은 지구의 기술과 문화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구가 멸망했다고는 들었지만….’
이미 프로세르피나에게 하계라고 칭하고 있는, 지구가 멸망한 이후 차원 통합을 통해 재창조된 이곳에 대해, 대강이나마 이야기는 들었기에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체의 상태에서라도 직접 보고 들으며 체감하는 것 또한 새삼 다르다.
‘그나저나.’
이윽고 다시 시선을 돌려 에린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속으로 품평했다.
에린이 은현의 아내이자 제자라는 것은 시에테도 미리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
은현을 가르친 스승인 시에테에게 있어서 에린은 손제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흥미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씀도 없이 쳐다보세요?”
[…아니. 아무것도.]
당연히 에린은 시에테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은현에게서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의 존재를 잠깐이나마 언급했던 적은 있었지만 이름이나 자세한 행색까지는 전해 듣지 못했기 때문인지, 자신의 눈앞에 등장한 유령은 에린에게 있어 몹시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에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권속의 서약이라는 것을 맺은 자신에게 여신의 힘 일부를 부여한 우르드의 존재다.
‘…혹시 이 유령님이 우르드님이 부여해준 힘인가?’
힘의 부여가 끝나자마자 자세한 설명도 없이 갑작스레 내쫓아내진 에린은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우…. 일단 움직이자.”
침대 위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머릿속 고민과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에린은 행동을 개시했다.
지금은 갑작스레 부여받은 힘의 사용방법이나 느닷없이 나타난 유령의 존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어디에 가려는 거지?]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에린은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마자 곧바로 사람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에이라 언니!”
이윽고 계단을 타고 올라와 자신이 잠들어있던 방 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에이라를 발견했다.
반색하며 빠른 발걸음으로 에이라에게 달려가 안기고는 그녀의 몸 상태를 살폈다.
“어머나. 뛰면 안 되지.”
“몸은 좀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응. 괜찮아. 에린이 기절한 이후로 다행히도 한성이가 와줘서 나나 아니에스님도 별 탈 없이 복귀할 수 있었어.”
“다행이다….”
전원이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는 에이라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에린은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몸의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인 문제로 현재 모그라프령이 위기를 넘겼다는 것은 아니다.
“그…. 마수와 언데드들이 점점 국경 쪽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는 거는요?”
“그건….”
정신을 차린 에린을 보자마자 반가운 웃음을 지었던 에이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져 갔다.
자연스레 분위기가 딱딱해져 가는 것을 느낀 에린도 지금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안도했던 몸을 다시 긴장시켰다.
“일단…방에 들어가서 설명해줄게.”
“…네.”
방안으로 들어와 책상에 비치된 두 컵에 물 따른 에이라는 컵 하나를 에린에게 건넸다.
“자.”
“감사합니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의 고민 때문인지, 아주 에이라와 그녀의 소대를 수색하기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수분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후아아.”
컵 속에 담겨 있는 물을 단번에 모조리 마셔버리자, 전신에 보충되는 수분이 뒤늦게 자각한 갈증을 해소했다.
그리곤 곧바로 에이라를 보며 이야기를 꺼내길 조용히 기다렸다.
“…아마 에린도 짐작하고 있을 거로 생각해. 지금은 이 영지 전체가 엄청 위축된 상태야.”
“그렇…겠죠.”
그것은 에린도 에이라와 마찬가지로 예상하였던 부분이다.
점점 숲을 잠식하여 오염시키고 있는 언데드와 그것을 피해 점점 이쪽으로 접근해오고 있는 마수들의 존재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재앙과 다름이 없다.
특히나 지난번 마수 대범람 사태를 경험해보았던 모그라프 변경령의 영지민들에게는 더더욱 그럴 터.
그때의 그 사건으로 누군가는 가족을, 연인을, 친한 친구를, 동료를 잃었으며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왕가와 아르미타스 공작령의 도움으로 국경의 수비가 뚫리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었지만, 큰 피해를 면치 못했던 지금의 모그라프령은 또다시 들이닥치는 언데드와 마수들이라는 재앙에 저항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없다.
잃어버린 병력을 충원하여 시간과 돈을 투자해 훈련을 시키고, 무너진 성벽의 보수와 물자의 충원 등 다방면으로 도움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병사들의 사기다.
“모두 아직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때 그 지옥을 다시 경험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고 있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앞에 나서서 위험에 맞서는 것은 이제 막 훈련을 받기 시작하여 실전 경험이 제대로 쌓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 현실에 조금씩 근접해오고 있는 재앙은 병사들의 훈련과 마음가짐을 갖출 수 있는 여유 따위 주지 않았다.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그것을 알려 대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작점부터가 몹시 불안정한 이 상황은 마치 이가 다 빠져 파손되기 직전의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는 것과 같다.
“…그렇군요.”
상황을 모두 전해 들은 에린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에이라가 상정하고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은 간신히 복구된 모그라프령의 국경 수비가 뚫려버리고 파견 중인 아르티아 기사단과 병력을 포함한 모그라프령의 영지민의 전멸이다.
과연 전체가 아닌 일부에 불과한 기사단원들과 아직 미흡한 모그라프령의 병사들만으로 접근해오는 언데드와 마수들을 모두 막아낼 수 있을까.
아무리 언데드를 상대로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아니에스가 있다고는 하지만 에린은 자신할 수 없었다.
에이라가 이 상황에 대해 고민하면서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에린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에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에린?”
곧바로 손목에 차고 있던 아티팩트를 발동시켜 인벤토리 안에서 통신용 수정 구슬을 꺼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에이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에린을 보았지만, 에린은 고민에 잠겨 에이라의 부름에 미처 답하지 못했다.
‘…일단 상담만이라도 해보자.’
웬만하면 다른 이에게 상담하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으나, 아르티아 기사단원과 영지 전체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니만큼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도움이 되기 위해 이쪽에 왔건만 결국엔 자신의 힘이 부족한 탓에 다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이 상황이 에린은 민망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필요한 일이라 스스로 생각을 마치고 수정 구슬을 작동시켰다.
[에린? 무슨 일이니?]
“엘레노아님…. 혹시 바쁘세요?”
◆ ◆ ◆
마침내 재앙은 찾아왔다.
“왔습니다!”
성벽의 위에 설치된 감시탑에서 초소 근무를 서고 있었던 위병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병사들을 소집해!”
언제 도달할지 알 수 없었던 위협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오자 위병소장은 황급히 영주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부하를 보냈다.
절대로 마주하기 싫었던 순간이었지만, 결국엔 이 순간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병사들의 집합은 신속했다.
신호에 맞춰 성문으로 집합한 것은 병사들뿐 만이 아니라, 파견을 온 아르티아 기사단원들과 베스타 신전 모그라프 지부의 성기사들과 사제들 또한 마찬가지다.
“…….”
소집된 병력의 규모는 그 모두를 합쳐서 약 800명 남짓.
아르티아와 신전의 병력이 절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변경을 수호하는 철벽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규모의 병력이다.
그 인원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숨을 죽이며 성문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은 침을 삼키는 누군가의 소리조차도 선명하게 들릴 정도.
숲을 헤치고 스산한 기분과 함께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죽음을 묘사하기라도 한 듯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는 언데드들이다.
흐느적거리며 천천히 국경을 향해 접근해오고 있는 것은 야생의 마수들에게 파먹히고 썩어들어간 시신들.
모두 근처의 마을이나 왕국에서 흘러들어온 민간인들의 시신들이다.
콰직!
그뿐만이 아니라, 느린 걸음으로 성벽을 향해 접근해오는 언데드의 시신들을 거칠게 짓밟고 전진해오는 마수들의 존재까지.
“이럴 수가….”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 병사는 죽음이라는 것을 형상화한 듯 기괴한 몰골의 언데드 마수들이 점점 가까워져 가는 이 상황에 절망했다.
그저 멀찍이서 언데드들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손발이 떨리고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압도적인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언데드들이 앞으로 전진해올 때마다 무심코 뒷걸음질을 치게 만드는 공포.
‘무리야.’
‘저것과 싸워서는 안 돼.’
‘처참하게 물어뜯기고, 찢기고, 사람으로서 죽을 수 없어.’
‘죽으면 나도 저런 몰골로….’
많은 병사들이 공포에 짓눌려 도저히 발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그런 와중에 앞으로 나서는 것은 기사도, 사제도 아닌, 단 한 명의 모험가.
성문의 입구에서 이쪽을 향해 전진해오는 언데드들을 등지고 병사들을 바라본 것은 에린이다.
“도망치고 싶나요?”
“…….”
에린의 질문에 병사 중 그 누구도 쉽게 답하지 못했다.
자신들보다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성 모험가의 질문일 뿐인데.
어째서인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려있는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에린을 응시한다.
[호족요술(????)]
[감정왜곡(???曲)]
“우리가 여기서 저 괴물들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그다음에 위험에 처하는 것은 우리의 뒤에 있는 사람들이에요.”
“아….”
젊은 병사 한 명이 작게 탄식했다.
그것을 계기로 가슴 속의 술렁임을 자각한 병사들이 하나둘씩 자신들의 무기와 방패를 꽉 움켜쥐었다.
자신의 뒤, 이 영지에 사는 영지민들은 누군가에겐 연인이며, 아내이자, 부모며 가족들이다.
공포로 질려있던 병사들의 눈빛에 조금씩 전의가 싹트는 것을 확인한 에린은 속으로 자신의 감정왜곡이 제대로 통했음을 확신했다.
원래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는 것은 에린으로서도 전혀 좋아하지 않는 능력이었지만.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사기를 다시 끌어 올리기 위해, 병사들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두려움을 억제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억제할 수 있을 뿐, 그들의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에린은 은현의 말을 떠올렸다.
두려움이라는 건 마음속에서 스스로 결론을 내린 확신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야. 상대를 이길 수 없다.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게 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처참한 미래를 상상하고 그 끔찍한 미래에서 도망치라는 경고가 본능을 자극하는 거지.
즉 이 병사들에게도 충분히 언데드를 상대로 자신감을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에린은 곧바로 아니에스를 바라보며 신호를 보냈다.
“흥.”
사람들을 선동하는 기술을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딱 알맞다는 생각과 함께 작게 코웃음을 친 아니에스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에린의 옆에 섰다.
[여신이시어.]
짧은 기도 속에 담겨 있는 경건한 신성력은 이내 에린과 아니에스를 집어삼킨 것을 시작으로 성문 입구를 밝은 빛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베스타의 축복]
[성역화의 결계]
“이, 이건…!?”
가장 먼저 경악스러움을 표시한 것은 막대한 신성을 통해 행해진 기적이 얼마나 고위의 기적인지를 알아본 사제들과 성기사들이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베스타 신전 대주교의 기적을 직접 경험해본 것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이 시작이었다.
근력, 민첩, 체력 등을 비롯하여 회복력의 향상까지 신체의 전반적인 능력을 종합적으로 끌어 올려주는 이 기적을 체감한 병사들 또한 당황을 넘어 경악했다.
“약속하지.”
그 기적을 행한 아니에스가 입을 열자, 소집된 병력들 전원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이 결계는 절대로 풀지 않아.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만들어 내지 않아. 그러니까.”
손가락으로 이쪽을 향해 접근해오고 있는 언데드들을 가리키며 아니에스는 말을 이었다.
“너희의 영지와 너희의 가족들은 너희의 손으로 지켜. 알겠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