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1화 〉 541. 여신의 권유(2)
* * *
[간단하지. 마녀 아이처럼 되면 되는 것이니.]
“제, 제가…일리아나님처럼요?”
베르단디의 그 말은 아주 쉽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에린은 경악하며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저었다.
어떻게 여덟 자릿수의 고위 마법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모, 못해요. 저는….”
열 번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할 것이라, 에린은 확신했다.
‘현이도 이런 무리한 건 안 시킬 텐데….’
은현의 수업은 언제나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강도가 높지만, 그 한계를 파악하고 조절을 할 줄 알며 합리적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일리아나처럼 되라는 것은 한계의 문제가 아니라, 출발지점이나 걸어가는 길 자체가 전혀 다른 별도의 영역 문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을 읽은 베르단디는 웃으며 자세한 설명을 개시했다.
[후후. 신수 아이는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구나.]
“네…?”
[신수 아이는 지금 마녀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하구나.]
“…….”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은 에린은 계속해서 베르단디의 말을 기다렸다.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것은 재능이나 실력으로 마녀 아이를 따라잡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요?”
[정확히는 우리가 신수 아이를 마녀 아이처럼 만들어주려는 것이지.]
그것은 에린을 일리아나와 같은 고위자릿수의 마법사로 만들어주겠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마녀 아이는 아이와 영혼으로 맺어지면서 또 다른 나의 자매 여신의 힘을 받아들였다.]
일리아나는 은현과 권속의 서약을 맺으면서 수명을 초월한, 반신의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권속의 서약을 통한 매개로 노른의 세 여신 중 하나인 스쿨드의 힘 일부를 얻게 된 것은 함께 걸어가면서 은현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던 일리아나가 거머쥔 성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럼…일리아나님처럼 되라는 베르단디님의 말씀은….”
에린은 그제야 베르단디의 의도를 파악했다.
순간적으로 우르드의 얼굴을 흘끗 보며 눈치를 살폈다.
일리아나와 마찬가지로 사도의 권속이 되는 서약을 맺으라는 이야기는 그녀가 스쿨드라는 여신의 힘 일부를 받아들인 것처럼, 자신은 눈앞에 우르드라는 여신의 힘을 받아들이라는 뜻.
…자격은 갖추고 있다. 이제는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지.
곧바로 우르드가 자신을 보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건은 이미 채워졌다.
남은 것은 자신의 선택뿐.
“…….”
처음 느꼈던 여신의 부드러운 살결에 정신을 팔렸던 것도 잊은 채로, 에린은 생각에 잠겼다.
베르단디가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은 여신의 기대에, 은현의 기대에 보답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저어, 베르단디님.”
[무엇이냐?]
“이걸…. 현이와 상담하지 않고 제가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걸까요?”
우르드의 힘을 받기 위해서는 중간 단계인 은현과 권속의 서약을 맺는 것은 필수 조건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당사자인 은현과의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는 걸까.
중요한 선택을 결정지어야 하는 부분에서는 언제나 은현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짙었던 만큼 이번 베르단디의 권유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다.
당연히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선뜻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지는 에린은 현재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후후, 아이가 상의도 없이 이 권유를 승낙했다고 화를 낼까 봐 걱정인 것이냐?]
“그,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는데요….”
다른 아내들을 포함하여, 특히나 은현에게 미움받는 걸 정말로 두려워하는 에린의 속내를 파악한 베르단디는 꼭 끌어안은 팔을 들어 올려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마녀 아이의 때는 스쿨드의 독단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에 나도 당황스러웠었지.]
스쿨드가 일리아나에게 자신의 힘 일부를 부여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일리아나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수명의 한계로, 인간과 반신의 관계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리아나가 자신과 은현의 관계를 영원히 붙들어 놓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은현과 같은 존재가 되는 방법뿐이었다.
세계수를 복원시키는 위업을 달성시키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신을 은현과 영원히 맺어지도록 강하게 열망하는 집념과 집착에 스쿨드는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스쿨드가 힘을 부여하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이 사도의 권속화다.
[아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것을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그 방식을 싫어했을 뿐, 상의도 없이 이런 권유를 승낙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스쿨드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일리아나가 선택했던 방법은 세계수의 복원.
자칫 잘못하면 막대한 정보량을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정신이 무너져버리면서 폐인이 될 수도 있었던 위험한 도박을 해야 했던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이다.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걸면서 다른 아이들이 그런 무리한 행동을 하다니, 정말 어쩔 수 없는 아이지.]
그만큼 일리아나를 아내로서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신수 아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만약 아이가 상의도 없이 이런 권유를 받아들였다고 혼을 낸다면, 내가 아이를 따끔히 혼내주마.]
“…정말요?”
에린은 베르단디의 호언장담을 들으며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앞에서 방패의 역할을 해주겠다는 베르단디는 그 은현조차도 꼼짝 못 하는, 집안 서열의 가장 위에 있는 존재.
이렇게까지 해주겠다는데 망설이고 있던 마음이 조금씩 혹하기 시작했다.
“할게요.”
몸을 돌려 뒤에서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던 베르단디와 시선을 마주하고 결심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권속의 서약. 맺을게요.”
사실 에린 또한 일리아나나, 엘레노아, 릴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같은 남자와 평생을 함께한 동반자로서 그의 곁에서 그를 돕고 싶어 하는 에린에게 이번 권유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브류나크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린의 확실한 의사를 들은 베르단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그 얼굴과 확답을 보고 들으니, 나도 기쁘구나.]
“헤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감촉이 기분 좋아 헤실헤실 웃고 있는 둘의 반응을 지켜보던 우르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힘을 부여하는 건 나인데, 아주 둘이서 장단이 잘 맞는군.]
“베르단디님.”
[왜 그러느냐?]
“그…. 베르단디님의 언니 여신님은 어째서 저렇게 화가 많으신 건가요?”
[…뭐?]
느닷없는 에린의 질문에 되물은 것은 눈썹을 꿈틀거리던 우르드였다.
자신을 칭하는 호칭부터 자신의 태도에 대해 신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져버린 에린의 표정은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듯 궁금함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질문에 답해준 것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우르드가 아닌 베르단디다.
[신경 쓰지 말아라. 그냥 하계에 너무 많은 간섭을 하는 것을 싫어할 뿐이니.]
기본적으로 우르드는 규율이나 법칙을 준수하고 그것을 깨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신에게 있어 하계는 자신들이 지켜야 할 장소는 맞으나, 그 구성원을 온존한 형태로 지킬 의무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계’라는 거대한 형태는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할 뿐, 그 형태 속에 담겨 구성하고 있는 무수한 생명이 어떻게 되던, 그것은 신에게 있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감화되어 하계에 현현하는 베르단디가 몹시 특이한 케이스.
스쿨드는 일리아나나 은현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에 대해 흥미를 느낀 것을 계기로 일리아나에게 힘을 부여하긴 했지만, 스쿨드 또한 그 이외에 다른 인간들을 비롯한 생명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 그런데 저한테 힘을 부여해주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굉장히 탐탁지 않아 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자신이 정말로 우르드의 힘을 받아도 괜찮은 걸까.
에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최근에 언니 또한 아이를 보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지.]
“…현이를요?”
[아주 최근에 아이가 신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을 하는 부분을….]
[베르단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베르단디의 설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우르드가 하계의 법칙에 간섭하여 은현의 아내인 에린에 힘을 부여하기로 한 것은 다름 아닌 우르드의 판단이다.
스승과 끝없는 사투 끝에, 시련을 통과하여 신격을 갖추면서 엄연한 반신(半?)으로서 완성된 은현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한 것이 그 계기.
자랑스럽게 그것을 떠벌리려는 베르단디의 말을 가로챘다.
[아무튼, 너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 자체는 나 또한 동의한 일이다. 탐탁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멀리 보았을 때는 이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니.]
우르드는 다시 에린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손바닥 위에 떠 오른 작은 크기의 금색 구체가 우르드의 손을 떠나 허공에 부유했다.
느린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금색 구체를 에린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위험은커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기운의 집합체는 은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력으로 구성된 것과 비슷하다.
허공을 부유하여 마침내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온 금색 구슬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듯 사라지자, 에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끝인가요?”
[그래.]
“그…. 어떤 힘을 부여해주셨는지…. 대강의 설명이라도….”
[과거를 불러오는 힘이지.]
“아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혀 이해 못 하겠는데요?”
에린은 당황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굉장히 추상적이고 모호한 설명으로 표현된 힘이 자신의 영혼 속에 들어왔는데, 에린은 무언가의 변화를 느끼기는커녕 힘을 받기 전과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그게 도대체 무슨….”
[인간의 말로 표현하자면…. 흠, 그래.]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우르드는 알맞은 표현을 찾았는지 에린을 보며 다시 말했다.
[너는 어떻게 네 몸을 움직이는지 설명하라면 할 수 있나?]
“…….”
에린은 돌처럼 몸을 경직시키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힘을 사용하는 방법 따위 그냥 사용하면 되는 것을. 용건도 끝났으니 이제 그만 사라져라.]
“아니. 잠시만…!”
어처구니가 없었던 에린이 급하게 다시 말을 걸려 했지만, 우르드가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허공을 휘젓자, 에린의 몸이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무런 저항도, 항의도 해보지 못하고 에린이 하계로 돌아가 버리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공간에는 두 여신만이 남았다.
[…언니.]
[왜.]
[방금 신수 아이의 영혼에 부여했던 힘…. 거기에 영혼 하나가 붙어 있었던 거 같은데?]
[그런데.]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하는 시선을 느낀 우르드는 귀찮다는 듯 혀를 작게 차며 사정을 설명했다.
[회랑에서 만난 프로세르피나한테서 작은 선물을 받았지.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던 차에 그냥 이참에 같이 보내버렸어. 문제라도 있어?]
[…아니.]
베르단디는 먼 곳을 바라보듯 허공으로 고개를 돌려 하계에 있을 은현을 생각했다.
[그냥…. 아이가 조금 놀랄 것 같아서….]
은현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 조그마한 깜짝 선물로 에린에게 힘을 부여해줄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커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을 느꼈다.
◆ ◆ ◆
“…아오.”
정신이 각성하자마자 곧바로 두 눈을 뜬 에린은 마음속에 가득 찬 이 불합리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이불을 걷어찼다.
누적된 피로로 인하여 정신을 잃은 직후 주위의 상황을 파악하는 습관을 무시할 정도로, 용건만을 전달하고 자신을 파리 쫓듯 내쫓아낸 우르드에 대해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후우우…. 그런데…여긴 어디야?”
작게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추스른 에린은 뒤늦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상황을 살폈다.
정신을 잃은 직후 아니에스에게 업혀 옮겨졌다는 것까지는 바로 기억이 났지만, 자신이 정신을 잃은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현재 모그라프령에 파견 중인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이 사용하는 숙소 건물이라는 것이다.
“무사히 돌아왔구나.”
아니에스와 에이라와 함께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에린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여긴 어디지?]
“어?”
에린은 느닷없이 자신에게 말을 건 어떤 여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려 소리의 출처를 확인했다.
청각을 통해 들은 육성이 아닌 자신의 영혼에 직접 말을 걸어오는 특이한 소통 방식은 몇 번인가 경험해본 적이 있는, 평범한 인간의 소통 방식이 아니다.
자신의 옆 허공에 떠 있는 하나의 반투명한 영혼을 발견하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기다란 머리카락을 묶어 올린 포니테일의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성의 모습.
신기했던 것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처음 보는 복장이다.
[…….]
“…….”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고 계속 이어지던 조용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깬 것은 에린 쪽이었다.
“저어…. 누구세요?”
[내가 누구인지를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이름을 대는 것이 예의일 텐데.]
무덤덤한 유령의 지적에 에린은 적잖게 당황하여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일면식도 없는 유령일진데, 어째서인지 저 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는 이 위압감은 에린 스스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는 에린…헤르샤라고 하는데…. 그으…. 유령님의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시에테.]
“네?”
[내 이름이다. 시에테 로페즈. 이곳은 어디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