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540화 (523/730)

〈 540화 〉 540. 여신의 권유(1)

* * *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린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환경에 당황하여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뭐야. 여기는…?”

당황한 이유는 자신이 현재 있는 공간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물감으로 칠해진 것 마냥, 주위의 모든 곳이 새하얗다.

이윽고 에린은 가장 최근까지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떠올렸다.

연락이 끊긴 에이라와 그녀의 아르티아 기사단 소대를 찾기 위해 국경을 넘어 마수가 우글거리는 숲으로 진입했고, 세 사람과 함께 황급히 모그라프 령으로 귀환하던 도중, 무리로 인해 결국 정신을 잃었던 일련의 과정을 깨닫는다.

정신을 잃자마자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지금 자신의 상황을 추측했다.

“그럼 여기는…꿈?”

하지만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생생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새하얀 공간이지만, 자신이 설 수 있도록 두 다리를 디딜 수 있게 해주는 바닥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감각마저도 생생하며 이 공간이 거짓이 아니라 진짜라고 자신의 예민한 감각은 말하고 있다.

순간적으로 서큐버스가 사용하는 ‘몽환의 숲’이라는 고유 결계도 떠올렸지만, 그것과도 뭔가 느낌이 다르다.

“…이상한 곳.”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끝은 보이지 않고 공허함이 가득 한 공간에 어째서 자신이 와 있는 걸까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에린은 불안이나 초조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으음…. 뭐지?”

듣도 보도 못한, 생전 처음 와보는 곳에 덩그러니 홀로 방치된 이 상황인데도 어쩐지 평온했다.

이 공간에 가득 차 있는 신비로운 기운은 이상하게도 에린에게 있어 몹시 친숙하게 느껴져 낯설지가 않았다.

스스로도 이것이 무엇 때문인지 바로 결론을 내지 못한 에린은 생각에 잠겼다.

“마치 현이랑 있을 때랑 비슷한 기분인데….”

마력이나 신성력과는 다른, 한층 더 정갈하고 깨끗한 기운을 느끼며, 그 기운으로 가득 찬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를 추측한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덩그러니 홀로 놓인 것보다도, 에린은 그 의문을 해소하기에 바빴다.

[신수 아이야.]

“으음…. 여긴 도대체 뭘까?”

[신수 아이야.]

“꿈은 아닌데….”

[신수 아이야!]

“꺄악!?”

자신을 부르는 신비로운 목소리에 뒤늦게 반응한 에린이 펄쩍 이며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어깨를 들썩이며 비명을 지른 에린이 고개를 전후좌우로 내저으며 전 방향을 확인해보았지만, 에린을 부른 익숙한 존재의 목소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 뭐지? 방금 베르단디님의 목소리가….”

에린은 당황했다.

자신의 청각을 타고 말을 걸어오는 것과 달리, 영혼 자체에 직접 말을 걸어오는 그 소통 방식은 오감 쪽이 특화된 에린에게는 익숙지 않은 낯선 방식이다.

목청을 높여 자신의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울리게 만드는 강렬한 파장을 느낀 에린은 놀란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며 찾아보아도, 자신을 부른 베르단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위쪽이다.]

“네? 위? 아…!”

자신의 영혼에 파장을 일으켜 직접 소통을 해오는 특이한 방식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처음의 강렬한 파장과는 달리 몹시 온화하여 아까처럼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목소리의 유도에 따라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린 에린은 먼 허공에서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고 있는 여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베르단디님?”

[그래. 나다.]

드디어 자신을 발견해준 것이 기쁜 것인지, 베르단디는 작게 미소지으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온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따스해지는 것만 같은 상냥함이 가득한 여신의 손길은 에린에게 마치 어렸을 적 어머니의 손을 떠올리게 만들어 그리움과 기쁨이 공존하는 신비한 기분을 느꼈다.

그 손길을 즐기면서, 에린은 머릿속으로 떠오른 의문을 묻기 위해 베르단디를 불렀다.

“베르단디님?”

[왜 그러느냐?]

“그…. 이곳은 어디인가요?”

[이곳은 하계와 신계의 경계에 속해 있는 ‘계단’의 일부다.]

“…계단?”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계단’으로 보이는 것은커녕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이 공간을 확인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은 베르단디가 웃어 보이며 에린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후후, 정확하게는 신계로 올라가는 중간 단계의 공간이지. 계단이라는 것도 적절한 표현을 빌렸을 뿐이다.]

“…신계로 올라가는 길.”

은현에게서 신계에 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듣기는 했지만, 그곳과 연관된 곳에 자신이 발을 들이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고 새로운 시선으로 새삼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이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나요?”

[아니. 아이는 이곳에 와본 적이 없다. 아이는 이렇게 중간 단계에 부를 필요 없이, 신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지.]

인간이긴 하지만 신의 사도로서, 인간이라는 종을 초월하여 신격을 갖추고 있는 은현은 이미 엄연한 신의 반열에 올라와 있다.

“자격…. 권리….”

[신수 아이를 부르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이 최선이었구나. 미안하다.]

“아뇨. 괜찮아요.”

에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괜찮음을 표시했다.

본래라면 인간인 자신이 이렇게 신과 범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베르단디가 직접 자신을 대면하고 싶어 하는 어떤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후후.]

베르단디는 기쁜 마음을 표현하듯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사정을 이해하고 담담히 자신의 용건을 기다리고 있는 에린의 태도가 마치 그녀의 성장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 것 같아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든다.

[신수 아이를 부른 이유는 따로 신수 아이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다.]

“권하고 싶은 것…인가요?”

[음.]

미소를 짓던 베르단디는 고개를 흘끗 돌려 뒤를 돌아보고는 손가락을 뻗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어…?”

베르단디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한 여성이 앉아 있는 거대한 옥좌다.

어떻게 갑작스레 생겨난 것인지, 언제부터 존재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옥좌에 앉아 있는 여성은 다리를 꼬고 팔걸이에 걸친 손으로 턱을 괴어 에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품평이라도 하듯이 내면 전체를 꿰뚫어 보는 그 존재의 시선을 받은 에린은 몸을 움찔 떨었다.

그거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은 마치 처음 베르단디의 모습을 보았을 때와 같은 것.

에린은 곧바로 옥좌에 앉아 있는 존재가 베르단디와 같은 여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분은 뭔가….’

뿜어내는 존재감과 위압감이 베르단디보다 더하다.

‘아니. 이게 정상인 건가?’

은현에게서 하계에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현현하는 베르단디는 법칙을 거슬러 은현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인간 여성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설명을 떠올렸다.

오히려 자신을 인자한 태도와 모성으로 대해주는 것으로 덧씌워진 탓인지, 베르단디의 경우가 더욱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베르단디에게는 실례일 수도 있지만, 진짜 신이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 것 같아 자연스레 긴장하게 되었다.

[언니. 그렇게 눈에 힘주지 마. 우리 아이가 긴장하고 있잖아.]

[흥. 언제부터 저 인간이 네 아이가 됐지?]

[내 아이의 아이가 되었으니. 당연히 나의 아이이기도 하지. 신수 아이야. 소개하마. 지금 신수 아이의 앞에 있는 여신은….]

[그럴 필요 없어.]

새롭게 등장한 여신은 베르단디의 말을 끊었다.

[내 소개는 내가 직접 하지. 나는 노른의 세 자매 여신 중 하나인 우르드다.]

“아…!”

에린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은현에게서 베르단디 이외에도 은현에게 힘을 선사해준 여신이 둘이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놀라운 마음을 쉽게 추스를 수가 없다.

‘이, 이럴 땐 어떻게 하더라…?’

황급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마치 왕족을 대하듯 격식을 차리려 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그럴 필요 없다.]

“…네?”

[그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격식이지. 너는 나를 지금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보고 있는 것이냐?]

“그, 그런 게 아닌데….”

신을 마주하게 된 것에 대해 머릿속으로 예우를 갖추기 위한 표현을 쥐어 짜내어 떠올린 생각이 이것뿐이었을 뿐, 에린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흥.]

활짝 핀 손가락을 한쪽 무릎을 꿇은 에린에게 내밀어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듯 손짓을 하자, 여신과 에린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읏…!?”

순식간에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우르드를 보고 에린은 숨을 삼켰다.

이윽고 우르드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우르드의 앞으로 옮겨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형이나 공기의 흐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저 자신이 옮겨졌다는 결과만이 존재하고 있다.

‘이게…. 여신…?’

우르드가 에린의 위치를 자신의 앞으로 이동시킨 것은 여신으로서 가장 사소한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전조를 눈치채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것은 명백히 인간과 여신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실감하게 된다.

[언니! 뭐하는 거야!]

부리나케 달려온 베르단디가 우르드에게서 에린을 빼앗으며 품에 끌어안았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과보호하다시피 에린을 감싸고 도는 베르단디를 보며 우르드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요사이에 편법을 사용하여 하계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인간 하나를 감싸고 도는 태도는 하계와 다른 시간의 흐름을 흘러가는 이곳에서는 눈 깜짝할 사이의 변모와도 같다.

“저, 저어 베르단디님….”

[음?]

“노, 놓아주시면….”

에린은 자신의 머리에 가득 밀착해오는 풍만한 가슴의 감촉을 느끼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여신에 대해 불경스러운 생각이라며 스스로 타일러보지만, 일리아나보다 커다란 여신의 가슴은 순간 정신을 빼앗길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 의도치 않게 동성의 에린을 유혹했다.

부끄러움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어떻게든 베르단디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지만,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베르단디의 양팔은 가녀리면서도 어쩐지 견고했다.

[후후. 신수 아이는 귀엽구나.]

“네…?”

도리어 베르단디는 은현과는 달리 몹시 쑥스러워하는 에린의 반응이 신선하여 더욱 에린을 자신의 가슴에 밀착시켰다.

“베, 베르단디님! 다른 신님이 보고 계신 데…!”

[후후.]

[…뭐하냐. 지금?]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철없는 자신의 여동생을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우르드의 시선에도, 베르단디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에린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감촉을 억지로 참아내며 어떻게든 용건을 이어나갔다.

“저를 불러주신 용건을 말씀해주세요!”

[그래. 그래야지.]

부끄러워하는 에린을 놀리는데 재미를 들렸던 베르단디는 그녀의 요망에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르드를 흘끗 쳐다보자, 우르드가 작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자격은 갖추고 있다. 이제는 선택만이 남았을 뿐이지.]

“…선택?”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던 에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했다.

[신수 아이야. 아이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다. 아이의 무기를 혼쭐내고 싶어서 단단히 벼르고 있다고 했다지?]

“아.”

에린은 곧바로 은현과 은현의 무기인 브류나크를 떠올렸다.

자신을 무시했던 그 건방진 창을 언젠가 혼내주고 싶어서 단단히 벼르고 있었지만, 은현의 중재와 자신의 힘이 부족한 탓에 그 소원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베르단디님이….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후후. 그럼. 이것은 신수 아이의 소원을 들어줌과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니.]

“…어떻게요?”

자신을 도우면서 넓게는 은현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데, 흥미를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건방진 창에게 본때를 보여줄 수 있다니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에린은 솔깃해진 마음이 시키는 대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귀를 기울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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