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1화 〉 531. 변경의 전조(3)
* * *
에린과 아니에스가 모그라프령으로 향하는 수단으로는 일리아나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을 전이시키기 위해 텔레포트 마법을 준비하기 전, 일리아나는 웃으며 에린을 배웅했다.
“아가. 다치지 말고 무사히 갔다 와야 해?”
“헤헤. 네. 일리아나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일리아나의 상냥한 손길이 기분이 좋았던 에린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걱정해주고 배웅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고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언데드가 출몰하는 변경으로 향하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크게 긴장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그만큼 여러모로 그녀가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하이고. 아주 애 엄마 납셨네. 누가 보면 네가 낳은 딸인 줄 알겠어?”
그런 일리아나의 새로운 면모가 적응되지 않던 아니에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나 주변 사람에 대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는 남편이 된 은현과 함께 만든 울타리 안의 자기 사람들을 아끼는 그 모습은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다.
일리아나는 코웃음을 치며 친구의 비아냥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설마 자신도 이렇게 누군가를 아끼고 챙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지만 이렇게 변한 자신이 크게 싫지는 않았다.
“시끄러워. 너도 우리 애 안 다치게 잘 돌봐. 알았어?”
게다가 심지어 자신에게 불똥이 튀기기까지 하는 이 상황이 아니에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알아서 하겠지. 그놈이 가르쳤는데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애로 키우진 않았을 거 아니야.”
“괜찮아요. 일리아나님. 저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어요.”
“그래. 조심히 갔다 와.”
“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에린과 아니에스는 텔레포트를 통해 지정된 좌표로 전이됐다.
마법진의 중앙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배경이 뒤바뀌고, 집안이 아닌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로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한 에린은 곧바로 자신의 손목에 채워둔 팔찌를 작동시켰다.
이 팔찌는 은현과 에밀리아가 사용하는 간이 ‘인벤토리’라는 마법이 내장된 아티팩트.
능숙하게 마법을 작동하여 인벤토리로부터 에린이 꺼낸 것은 마력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이륜구동형 바이크다.
“…신기한 걸 가지고 있네.”
당연히 아티팩트는 물론 이 바이크를 본 적도 없었던 아니에스는 흥미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요? 이거 현이가 만들어준 거예요!”
“아, 그러셔?”
마치 아빠에게 선물 받은 장난감을 친구에게 자랑하듯이 들뜬 표정으로 바이크를 자랑하는 에린의 모습에 아니에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제부터 이딴 걸…. 아니. 원래부터 계획은 가지고 있었던 걸까.’
이전부터 그의 비범함이나 이상한 점은 대강이나마 예상하였지만, 신에게 부여받은 역할을 수행하는 사도라는 것을 하는 이후로 보이는 그의 행보는 이전과는 달리 몹시 특별했다.
이제는 놀라운 것보다 새삼스럽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거리낌 없이 저런 것을 만들고, 점점 자신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는 은현의 행동은 마치 지금껏 꾹 참아 왔던 걸 터뜨리기라도 하는 양,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폭주하고 있는 모양새가 가깝다.
“자, 제 뒤의 자리에 올라타서 저를 잡으시면 돼요.”
“…이렇게?”
무언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아니에스는 순순히 바이크 위에 올라타 있는 에린의 뒤에 안착하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렇게 붙잡으시면 떨어지실 텐데….”
“됐어. 떨어지지만 않으면 되잖아.”
아니에스는 에린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양손에 힘을 실었다.
“윽….”
아니에스의 양손에서 쥐어진 어마어마한 악력은 살과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은 강한 압박을 선사해줘 에린이 신음을 흘리게 했다.
마치 자신의 양어깨가 뜯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란 무시무시한 의지가 느껴진다.
“추, 출발할게요.”
“그래.”
잠시간 그 악력에 당황하긴 했지만, 에린이 엑셀을 감으며 출발을 알리자 아니에스는 순순히 손의 악력을 풀어주었다.
부르릉
마력을 연료로 불태우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엔진음이 들썩이며 바이크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달렸다.
일리아나가 전이시켜준 지점은 모그라프령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마차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바이크로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모그라프령의 성벽이 보이는 외곽에서 바이크를 다시 인벤토리로 역소환한 에린은 아니에스와 함께 변경령까지 도보를 이용했다.
“…그거 재밌던데 계속 타고 가면 안 되는 거야?”
편한 게 있는데, 굳이 시간이 더 걸리고 체력을 소모하는, 귀찮기 짝이 없는 도보를 이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다는.
바이크를 타고 질주하여 속도감을 더는 즐기지 못하는 것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
“…죄송해요. 이건 아직 많은 사람한테 공개하기엔 꺼려지는 거라 가능하면 감추라고 했거든요.”
여행처럼 장거리의 이동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사륜구동형 레토나나 이륜구동형 바이크외에도, 인벤토리 안에는 은현과 에밀리아, 일리아나가 개발한 다양한 아티팩트들이 존재했으나 아직 이것을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은 상태.
이 기술들의 핵심은 정말로 유용하고 편리성이 높은 아이디어의 보고로 무척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르미타스령에 크나큰 이익을 가져다줄 타이밍을 노리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쯧. 그래.”
아니에스는 혀를 차며 아쉬워하기는 했지만, 굳이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은현이 그렇게 판단하여 제약을 걸어두고 있는데,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그것을 굳이 깨고 싶을 정도로 원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일리아나도 아니고, 겨우 이 정도 걷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긴 하지.”
“…일리아나님은 그렇게 움직이는 걸 싫어하셨나요?”
“걔는 옛날부터 그랬어. 행군을 이어갈 때면 가장 염려되는 건 일리아나의 체력이었으니까.”
어떨 때는 온종일 걸어야 할 때도 있었고,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하고 행군을 이어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체력이었다.
은현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팀원 중 가장 체력이 낮았던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팀 안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일리아나였다.
“오죽했으면 여덟 자릿수의 고위 마법에 해당하는 텔레포트를 개량해서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려고 노력을 했겠어. 그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것도 지금은 걔와 니 남편인 은현이지.”
걷지도 않고 이동을 할 수 있다니 최고잖아?
은현의 이야기를 들은 일리아나는 곧바로 연구에 몰두했고 원정 중에도 텔레포트 마법의 계량화에 끊임없이 몰두했다.
현재 위치와 목표 지점의 좌표, 거리의 연산, 소모되는 마력, 보내는 인원 등 다양한 요소들을 따져보고 최적화된 고위 자릿수 마법은 일리아나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승화되었고, 팀원들 전체가 이득을 보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면 텔레포트 마법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어떻게 팀 활동을 해오셨는데요?”
“어떻게 했겠어? 당연히 업고 다녔지.”
“…네?”
에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점점 성벽을 향해 걸어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보면 저질에 가까운 체력을 가지고 있는 일리아나가 팀원들과 함께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원정을 다녔다는 것부터가 무언가 모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대강 짐작하고 있었던 이야기였던 것은 맞지만, 직접 그 이야기를 들어보니 에린은 당혹스러웠다.
“참고로 일리아나를 매번 업고 다녔던 건 은현, 그 녀석이야.”
“…….”
아니나 다를까, 이것도 에린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추측이었으며 정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걔는 그때부터 그 녀석한테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타인과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흥미도 없었고 몹시 서툴렀던 일리아나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의지했던 인간이 은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언젠가 두 사람이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아니에스도 생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일리아나의 성격을 모두 받아줄 수 있는 남자가 은현 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네.”
“…….”
울타리에 속해 있는 자신이나 엘레노아, 릴리에게는 한없이 상냥하고 인정이 많아 어떤 의미로 리더쉽과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이 일리아나이지만, 그 이외의 부분에서는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무신경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일리아나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 녀석이 살아 돌아왔다는 건 정말로 천만에 다행이지.”
그것이 세상의 순리와 법칙을 무시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두 번째 인생을 부여받은, 평범한 이들이라면 납득할 수 없는 방식이었을지라도, 아니에스와 다른 동료들에게 은현의 부활은 안도와 감사, 기쁨 등의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하는 소식 그 자체였다.
특히나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은현을 붙잡아 연인이 되었고 결혼에 골인하여 부부로서, 심지어 반신과 권속으로서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었던 일리아나에게는 가장 극적인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일리아나님이 심각하셨었나요?”
“심각했지. 한때는 그놈 따라서 자살을 결심하는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을 정도로.”
에린은 20년 전, 은현이 사망했을 때 당시의 상황을 모른다.
얼마나 참혹한 싸움이었는지, 얼마나 큰 감정들과 목숨이 소모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는지, 이야기로만 들었을 그 시절은 에린이 겪어보지 못한, 공감할 수 없는 시대.
은현이 사망하고 일리아나의 멘탈이 무너져 폐인에 가까운 상태로 몰렸다는 이야기는 제라드에게서 얼핏 들은 적이 있었기에 에린도 몇몇 짐작 가는 부분이 존재했다.
가끔가다가 일리아나가 보여주는 은현에 대한 집착은 정말로 정상이 아닐 때가 존재한다.
“지금이야 배 속에 아기도 생기고 아주 깨가 쏟아지는 부부가 되긴 했는데, 그 녀석이 죽은 이후의 일리아나는 진짜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 그 자체였어.”
발걸음을 멈춘 에린을 따라 멈춘 아니에스는 굳은 얼굴로 에린에게 당부했다.
“명심해라. 너나 다른 그 녀석의 다른 아내들은 일리아나를 따라서 은현을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너희가 챙겨야 하는 건 은현뿐 만이 아니라 일리아나도 마찬가지야.”
◆ ◆ ◆
은현과 일리아나의 과거 이야기는 대체로 무거운 주제로 시작이 되기는 했지만, 이외에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꽤 많았다.
그런 자잘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에린과 아니에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그라프 변경령의 입구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검문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다.
금위계의 모험가임을 증명하는 신분패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검문소를 지키고 있던 위병들은 곧바로 에린을 환영하는 태도를 보였다.
처음에는 웬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를 데리고 동행하는 에린에게 의문을 품었으나, 그녀의 신분을 알자마자 병사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이것은 그만큼 변경령의 내부 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실제로 그것을 대변해주듯 영지 내부는 굉장히 싸늘하고 조용하다.
영지 내부 자체가, 영민들이 위축되어 긴장 상태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어 주고 있었다.
“아니에스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몰라. 니가 알아서 해.”
“…….”
태연하게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그 태도가 몹시 당당해서, 에린은 도리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애초에 20년 전 은현을 비롯한 동료들과 팀으로 활동했을 때도, 아니에스는 사제로서는 최상위에 속하는 스페셜리스트였지만, 그 이외의 분야에서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딱히 생각하고 움직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에린은 뭔가 은현이 했을 고생을 상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이렇게 정보 수집이나 계획을 짜는 것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짧지 않은 모험가 활동을 해오면서 기본적으로 만들어진 습관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일단은…. 들어야 할만한 곳은 세 군데 정도인가?’
첫 번째는 이곳에 파견 온 아르티아 기사단원 소속의 에이라를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아니에스의 지원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녀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변경령의 베스타 신전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직접적인 지원 요청을 해온 모그라프 백작을 만나는 것이다.
페르니아스 왕국에서 기사들과 병사들을 파견한 규모에 비하면, 이쪽은 고작 두 명이었지만 그 두 명 중 한 명인 아니에스는 언데드와의 교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최상위계의 대사제다.
에린은 어디부터 먼저 가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먼저 아니에스의 방문과 그녀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신전으로 향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결정했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몇 번을 부탁하셔도 지금은 기사님의 요청을 들어드릴 수 있을 만한 상황이…!”
그렇게 아니에스와 함께 모그라프 변경의 베스타 신전 입구에 도착한 에린은 건물 안에서 들려온 익숙한 남성의 외침에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에이라의 후배이자, 파트너인 고대인 남성.
차한성의 목소리임을 떠올린 에린은 급박한 그의 음성을 듣고 차한성의 불안, 초조, 다급함의 복합된 감정을 읽어 들였다.
“…차한성님?”
“네?”
신전 사제를 향해 강하게 호소하던 차한성이 자신을 부르는 에린의 목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에린님…? 에린님이 어째서 여기에…? 아니. 잠깐.”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인 차한성이 빠르게 당황하는 표정을 결의로 굳히고 곧바로 에린에게 다가왔다.
“왜, 왜 이러세요!?”
곧바로 자신의 양손을 붙잡고 모으며 올리는 차한성의 돌발 행동에 에린이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눈빛을 읽어 들이고 몹시 심각한 사태임을 직감했다.
“선배를…. 선배를 도와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머릿속으로 떠오른 불길한 상상은 점점 구체화 되기 시작했고, 에린은 얼굴을 굳혔다.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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