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9화 〉 529. 변경의 전조(1)
* * *
엘레노아는 수정구슬을 통해 현재 드워프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보고받았다.
본래라면 현재 영주로서 영지의 내정을 관리해야 하는 것은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알렉스의 일.
하지만 지금 알렉스는 유리아 왕녀의 왕위 계승 문제로 그녀의 교육에 대해 많은 조력을 아끼지 않고 있어서, 영지의 내정 부분은 사실상 알렉스와 엘레노아가 서로의 역할을 분담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공작 가문의 의사를 대표하여 유리아의 지지 기반 세력을 다지고, 영지의 내정을 동시에 돌보고 있었고.
엘레노아는 영지 안에서 현재 활동 중인 베스타 신전의 총 관리 감독과 알렉스가 미처 돌보지 못한 영지의 내정을 백업하는 역할로 몹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게다가 엘레노아의 경우에는 사제로서 현재 임신 중인 일리아나의 몸을 돌보는 역할까지.
하루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맡겨진 역할은 몹시 많아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역할들을 모두 수행해내고 있다.
“그렇구나.”
[네. 아마도 1개월은 더 이곳에 있을 것 같아요.]
은현은 드워프들에게 골렘의 제작기술을 시작으로 연금술, 공학 등의 기술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 밖에 나와 있는 상태.
엘레노아에게 보고를 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은현의 뒷바라지를 하는 릴리다.
드워프 마을에서의 체류 기간에 관해 이야기를 들은 엘레노아는 생각에 잠겨 작게 중얼거렸다.
“1개월이라…. 시간이 촉박하네.”
[많이 힘드시면…. 주인님께 사정을 말씀드려볼까요?]
“아니. 촉박한 건 사실이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1만 명이라고 했지?”
엘레노아가 고민하는 것은 아르미타스령 내부에 은현을 따로 새로 이주하게 되는 새로운 종족들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다.
[정확히는 1만 2천 명이요.]
“…그래.”
몇백 명의 이주도 아니고, 드워프라는 종족 전체를, 1만 명 이상의 숫자를 수용하는 것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다.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 위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들에게 하루도 아니고 장기간 제공할 식수들 또한 절대로 적은 양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초반의 상황만 잘 넘긴다면 그들이 아르미타스령에 가져다 둘 이익은 그 이상일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릴리는 염려의 마음을 담아 엘레노아에게 물었다.
영지를 경영하는 위정자의 관점으로서 이 계획이 얼마나 피곤하고 손이 많은 계획인지, 릴리는 잘 알고 있었다.
드워프들을 영지 내부로 수용하는데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이들만의 생활 방식과 문화다.
지하 마을 내부에 쩌렁쩌렁 울리는 망치의 소리는 쉴새 없이 종일 울려 퍼져 귀를 시끄럽게 만들고, 외양의 차이부터 시작해서 밥을 먹는 식습관부터 일하는 방식과 생각들까지 같은 것보다 다른 것을 나열하는 게 더 많다.
엘레노아는 잠깐 엘프의 숲에서 살아보았던 경험을 통해 종족과 문화의 차이를 이해했고, 이와 같은 맥락의 지레짐작으로 예상만 하고 있을 뿐이지만, 릴리의 경우에는 드워프들의 문화를 가장 가까이서 체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차이가 확연한 두 종족을 한 울타리 안에서 화합을 시킬 수가 있을까, 걱정이 든다.
릴리의 우려를 이해한 엘레노아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결정한 일이니까.”
다름 아닌 은현이 결정했고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자신은 그의 기대에 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었다.
정말로 상냥한 자신의 남편은 불가능하고, 불합리한 일과 명령를 내리는 남자가 아니다.
“해 봐야지.”
[그렇군요.]
다시금 결의에 찬 릴리의 목소리를 들은 릴리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하는 그녀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일리아나님은 좀 어떠세요?]
“괜찮으셔. 요즘엔 곧 출산을 앞두고 계신 테레지아님과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다양한 걸 배우고 계시거든.”
대체로 임산부의 몸에 좋은 음식이나 보약, 평생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기초 운동을 시작하여 노력을 보이는 일리아나의 근황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충실하고 건강했다.
“에린의 경우에는 아직도 신수님에게 혼나면서 수양을 계속하고 있고.”
자신의 후예로서 한심한 꼴을 보이는 것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구미호는 아직도 에린에게 혹독한 수행으로 몰아붙이며 강하게 키워나가고 있다.
은현이 없는 요즘, 수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고인 눈물을 훌쩍이고는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외로움을 못 이기고, 수행에서도 구박을 받는 서러움에 어리광을 잔뜩 부려오는 에린을 달래주는 것도 엘레노아와 일리아나에게 맡겨진 역할이라면 역할이랄 수도 있다.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평소와 다름없는 바쁘면서도 평화로운 나날을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릴리도 미소지으며 작게 안도했다.
“너도 그 사람의 뒤를 잘 받치고 있구나.”
휴가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은현의 뒤를 보조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써 충실함을 느끼고 있는 릴리의 모습을 보니 엘레노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하지만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은현이 생각하고 있는 드워프들의 이주 계획과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며 서론을 시작했다면, 지금부터는 엘레노아가 하고 싶은 본론에 해당했다.
“…그 사람에게 바로 상담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네.]
릴리도 엘레노아의 표정을 보고, 곧바로 평범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룻바닥에 좌선하여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은 채로, 체내의 마력을 활성화하고 있던 에린은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져 멈칫했다.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던 마력의 순환은 그 잠깐 멈칫한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버렸고 에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 큰일났다.’
라고 직감하기를 곧바로 다시 체내의 마력을 활성화하여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맹렬한 속도로 순환을 유지했던 이전과 새롭게 시작하여 속도가 붙지 않은 지금의 차이를 눈치채지 못할 구미호가 아니었다.
차악!
“아야!”
가차 없이 대나무로 제작된 막대가 에린의 어깨를 때렸다.
막대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소리와는 달리, 따가움에 몸을 들썩인 에린이 비명을 질렀다.
“다시.”
“씨이…!”
“뭐 불만 있느냐?”
“그만 때려!”
에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구미호에게 항의했다.
조금이라도 집중이 흐트러지면 가차 없이 날아오는 구미호의 매타작은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니지만, 맞을 때마다 기분이 몹시 언짢다.
그렇다고 좌선의 상태로 집중하여 마력의 순환을 장시간 유지하는 이 수행이 그리 쉬운 것도 아니었다.
“흥. 맞는 것이 싫다면 그만큼 집중하여 내가 정한 시간을 채우면 된다.”
“이 상태로 10시간 동안 정신을 집중하라니. 말도 안 되잖아! 다리 아파! 배도 고파!”
가만히 앉아서 10시간을 가까이 끊임없이 신체 내부의 마력을 순환시키는 것을 유지하라니, 정말로 불합리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은현과 해왔던 그 어떤 훈련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미호의 수행 방법은 에린에게 있어 최악이었다.
은현이 에린에게 가르쳤던 것이 기초적인 체력과 기술, 꾸준함을 동반한 자기 단련으로 몸을 움직여서 익히는 육체적인 분야라면.
구미호가 현재 에린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체내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기 위한 집중력의 향상과 감각의 발달로 정신적인 분야가 강하다.
차라리 몸을 움직여서 고되게 혹사하는 은현의 훈련이 낫지, 구미호의 훈련은 몸은 편한 편에 속하지만, 몹시 지루하고 난해하다.
이것은 이미 육체적인 스펙으로는 페르니아스 왕국의 기사들과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완성되어있지만, 그녀의 내면적인 정신은 아직 미성숙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에린의 투정을 들은 구미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겨우 이런 것도 하지 못해서야. 내가 너만 했을 때는 이 수양을 통해서 100시간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거야 미호 너니까 가능한 거지! 나는 인간이야! 100시간이나 굶으면서 이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고!”
“누가 너더러 100시간을 유지하랬느냐? 10분의 1밖에 안 되는 10시간도 채우지 못해서야 그래서는 내 힘의 절반도 따라잡지 못한다.”
“진짜…. 진짜로 10시간은 말도 안 되는데….”
에린은 자신의 의견을 도저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구미호에게서 시선을 피하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다.
“흥. 그러면 저놈은 대체 어떻게 설명할 테냐?”
구미호는 에린의 말을 반박하며 멀찍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제라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미호님! 저녁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앞치마를 두르고 국자를 손에 쥔 나이 마흔에 가까운 남자의 모습은 대륙을 구한 영웅과는 거리가 몹시 멀다.
그저 주부에 불과한 그의 모습을 보고 도대체 누가 그를 왕국 최강의 기사인 리오드나 여덟 자릿수 고위 마법사 일리아나, 베스타 신전의 대주교 아니에스와 동급으로 분류되는 영웅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저놈은 이미 이 수행을 10시간은 물론, 20시간 이상을 유지하고도 여유를 보이는데. 인간이기 때문에 10시간도 하지 못한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씨이.”
뭐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에린은 분한 마음을 속으로 삭이며 씩씩거릴 뿐이었다.
실제로 제라드는 구미호의 수행 방식을 곧잘 이해하여 이른 시간으로 그것을 달성했고, 지금은 거의 전업주부마냥 구미호의 사당 안을 청소하고 관리하여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자진하여 행하는 제라드의 모습을 보고 구미호도 ‘뭐 저딴 놈이 다 있지?’라는 생각을 품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샌가 그 생활에 익숙해져 버렸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오르타스의 배신으로 더는 인간을 믿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구미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으로 큰 만족과 충실함을 느끼고 있는 제라드의 호의 어린 감정이 이상하리만치 싫지 않았다.
믿었으나 배신당했던 오르타스와는 확실히 다르다.
“엇, 에린양? 수행은 끝나셨습니까?”
“아, 그, 그게….”
에린은 머뭇거리며 말을 하기를 주저했다.
도저히 실패해서 또 구미호에게 한 대 맞았다고 말하기가 민망했다.
꼴은 이래 보여도 제라드는 리오드나 일리아나와 같은 영웅이며 은현과도 친분이 두텁다.
자신의 민망한 추태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대답을 머뭇거리자, 제라드는 금방 사정을 파악했다.
“하하! 또 실패하셨군요! 그럴 수도 있죠! 금방 성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도 했으니까요!”
“…….”
하지만 이미 자신보다도 신수의 힘을 늦게 받아들였으면서 더욱 빠르게 성장하여 자신을 추월한 제라드의 말은 에린에게 전혀 위로되지 않았다.
‘진짜 눈치 없어. 이 사람! 왜 지금까지 독신이었는지 알 것 같아!’
악의가 없는 만큼 악질적이기까지 하다.
“실례합니다.”
마침 수행의 흐름이 깨져 에린의 마음이 조금씩 침울해져 있을 때, 사당을 방문한 엘레노아의 목소리에 에린이 반응하여 고개를 곧바로 돌렸다.
“엘레노아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에린을 보러 왔지.”
“어…? 저를요?”
“응.”
엘레노아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구미호를 바라보았다.
“수행 중에 죄송합니다. 신수님. 급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흐음?”
구미호는 팔짱을 낀 채로 계속 이야기를 해보라며 눈짓했다.
“당분간 에린을 보내야 할 곳이 생겼습니다.”
“네? 하지만….”
에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구미호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왔다는 것은 그놈이 시켜서 왔다는 뜻인가?”
구미호가 말하는 ‘그놈’이란 은현을 이야기하는 것.
엘레노아는 작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구미호의 말에 답했다.
“그 사람이 시킨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의 허락을 받고 이렇게 신수님의 사당을 찾아뵐 정도로…. 급한 용건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무언가 심각성을 느낀 제라드가 국자를 꾹 쥔 채로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주부에 가까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엘레노아는 물론 누구도 웃지 않았다.
“언데드가…. 출몰했습니다.”
“…그렇군.”
구미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현이 예상하던, 죽음을 거부당한 존재들과 인간의 전쟁이 마침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