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0화 〉 520. 천일야장(?一??)(3)
* * *
무심코 시선을 빼앗을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두 자루의 칼날을, 은현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하아….”
이윽고 오란이 남긴 유언이 적혀져 있는 석판을 응시하며 고개를 푹 떨구고 깊은 한숨을 흘렸다.
“나보고 완성하라니…무슨 소리를….”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대장장이에게 주어지는 칭호.
천일야장이었던 오란이 완성하지 못한 검을 어떻게 자신이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무리수라는 생각에 벌레를 씹은 얼굴로 천천히 두 자루의 칼날을 꺼냈다.
이윽고 칼날의 소재가 되는 금속의 정체를 알아보고 두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이건…. 오리하르콘?”
대륙에서 가장 귀한 금속이며, ‘신철(??)’이라는 이명이 붙어있는 소재로도 유명한 오리하르콘은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금속이 아니다.
과거 몇백 년 전에 제작되어 현재 페르니아스 왕국의 국보라고도 알려진 성검 듀란달 또한 이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특별한 검.
듀란달은 과거 페르니아스 왕국이 건국되었을 당시, 초대 국왕이었던 오르타스가 드워프의 마을을 찾아 오리하르콘이라는 금속을 맡겼고 검의 제작 의뢰를 맡긴 것이 그 유래의 시작이다.
“…듀란달은 오란의 작품이 아니야.”
한 차례 부러져버렸던 성검을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했던 은현은 그때 당시 그것이 오란의 작품이 아니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랜 가르침을 받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년 동안 교육을 받으면서 그의 방식과 성향, 기술을 이어받은 자신이 오란의 작품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단순히 뛰어난 작품이 탄생하게 되고, 그것을 따라잡는 것은 물론 초월하기 위해 대장장이의 자부심을 불태우며 이 두 자루의 검을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추측은 곧바로 접었다.
“오란….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두 자루의 검날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뒷 일을 자신에게 맡긴 것일까.
은현은 오란의 속내를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생각을 알아낼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
은현은 물끄러미 공구 상자 속에 가지런히 정리된 망치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래. 우리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었죠.”
오란과 나누었던 의사소통은 모두 대장장이로서의 기술에 관한 것뿐.
그렇다면 그가 했었던 생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이 유작과 대화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필요한 것은 대장간 내부를 가득히 태우는 불과 망치, 그리고 망치를 두들기는데 필요한 체력과 정신력이다.
은현은 화로 속에 장작을 차례로 쌓아 넣고 불쏘시개를 던졌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활활 타오르는 화로 앞에 놓여있는 검은색 모루 위에 오리하르콘으로 제작된 미완성의 칼날 한 자루를 올려다 놓고 망치를 꽉 거머쥐었다.
“나한테 뭘 전하려고 했는지, 한번 말씀해보세요.”
그래. 좋지.
아주 오랜만에, 과거를 회상시키는 드워프의 걸걸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라, 은현의 귓가를 속삭이는 환청을 만들어냈다.
◆ ◆ ◆
까앙!
내려치는 금속의 충돌음은 몹시 맑으면서도 공기를 떨리게 만드는 진동이 강하다.
까앙!
일정한 주기로, 일정한 소리가 반복되는 대장간 안의 상황을 짐작할 수 없는 드워프들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대장간의 입구를 응시했다.
“소리가 굉장히 맑군.”
“벌써 몇 시간 째 인지 모르겠어.”
은현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간 지 약 4시간이 넘게 흘러가자 은현의 등장과 함께 인간에게 천일야장의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드워프들의 표정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굉장히 아니꼽다는 표정과 함께 불만을 가득히 드러냈던 드워프들은 점차 답답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토로했다.
“젠장! 도대체 뭘 만들고 있는 거야!”
“구경 좀 하게 해줘!”
“장로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럴 수 없다.”
짧은 다리를 동동 구르며 궁금해 죽겠다는 것을 토로한 드워프들이 오란의 대장간 안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는 은현의 상황을 관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항의했지만, 도란은 한사코 부족원들의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전에 은현에게 설명했던 대로, 천일야장의 시험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으며,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서만 치러야 한다.
당연히 시험에 임하는 은현에게는 한창 신경이 예민할 때, 드워프들의 시선은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하다.
도란 또한 대장간 안에서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알 길이 없으니 궁금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자신의 조부였던 천일야장의 자리를 계승하는 이 시험의 규칙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도란은 은현이 들어가 있는 대장간의 철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릴리에게 시선을 흘끗 옮겼다.
“힘들지 않으시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죠.”
도란의 물음에 릴리는 솔직히 답했다.
시선을 떼지 않고 한 장소를 몇 시간 가까이 응시하고 있는 릴리의 집념 또한 몹시 놀라웠다.
“힘들다면 어젯밤에 묵었던 거처에 가서 쉬도록 하시오. 시험은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오.”
일반적인 대장장이들의 작업이었다면 지금쯤 작업을 마쳤을 시간이었지만, 은현이 치르고 있는 이 시험의 내용을 아무도 모르는 이상, 얼마나 걸릴지는 이 시험의 주최자인 도란조차도 알지 못한다.
은현이 이 시험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안에서 완성되고 있는 무언가가 완성되는 것이 천일야장의 시험이 종료되는 순간이다.
도란은 대장장이도 아닌 평범한 인간 여성이 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릴리에게 베푸는 도란의 작은 배려였으나, 릴리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 도란의 배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뇨.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이곳에 있고 싶어요.”
릴리는 대장간의 앞에서 은현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를 고집했다.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자신보다도 더 힘든 것은, 이 문 너머에서 뜨거운 열기 속에 갇혀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드리고 있는 은현이 아닐까.
있는 힘껏 금속을 두들기는 맑은 망치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것은 그만큼 은현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이 문에 가로막혀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자신은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은현을 맞이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렇구려.”
릴리의 생각을 헤아린 도란은 더는 이야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감사드려요. 저희에게 신경을 써주시고.”
“…별 것 아니요.”
“아뇨. 사실…. 도란님께서 주인님과 저를 이렇게 배려를 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검은 모루 부족을 포함한 이 마을에 있는 모든 드워프들이 은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은현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단지 오란의 독단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지, 은현도 몰랐으며 억울한 부분이 가득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천일야장이라는 드워프들 사이에서 몹시 영예로운 자리가 300년 동안 계승되지 못하고 있게 된 원인이라는 점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은현과 릴리는 오란의 손자이자 현 검은 모루 부족의 족장인 도란이 조부의 독단 행동으로 인해 많은 원성을 들어, 자신들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상과는 달리, 도란은 굉장히 호의적으로 은현과 릴리를 맞이해주었으며 잠을 잘 수 있는 거처를 제공해주고 식사까지 제공해주었다.
“도란님은 드워프 마을을 너무 늦게 찾아오신 주인님을 원망하시지 않나요?”
“원망이라…. 잘 모르겠소.”
늘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던 도란의 얼굴이 처음으로 변하여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어쩌면 나 또한 저자를 기다렸던 것인지도 모르지.”
“…저희 주인님을요?”
계속해서 은현이 있는 대장간의 문을 응시하고 있던 릴리의 고개가 처음으로 옆으로 돌아가 도란의 얼굴을 응시했다.
“조부가 돌아가시기 전, 아직 어렸던 나에게 항상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었소. 그 이야기의 대부분이 저자에 관한 이야기였지.”
그것은 릴리는 모르는, 드워프 마을에서 지냈었던 은현의 과거 이야기다.
“자세히 이야기 해주실 수 있나요?”
“…음.”
흥미를 보인 릴리의 부탁에, 도란은 담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시험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만큼, 도란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담소로 자신이 들었던 도란과 은현의 과거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 ◆ ◆
햇빛이 들지 않는 깊은 땅굴 속 지하.
그곳에 만들어진 드워프의 마을은 반영구적으로 계속 작동하는 마법등으로 낮을 비추는 장인들의 마을이다.
까아앙!
화로에 불을 지피고 철을 두드리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을 전체를 달구었던 열을 식히듯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드워프들의 밤은 술과 음식이 가득하다.
그것은 천일야장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 오란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야금술을 활용하여 온종일 철을 두드리고, 밤에는 동족들과 술을 퍼마시며 잔뜩 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가 잠이 드는 것이 일상.
그런 그의 일상에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동족 드워프에게서 들은 어떠한 소문 때문이다.
“이봐. 오란. 그 얘기 들었나?”
“무슨 얘기?”
마을 안에 나돌아다니는 소문이라는 소문을 모두 꿰고 있는 자신의 술꾼 친구는 대장장이로서 망치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야기와 소문들을 모으고 다니는 호사가 기질이 다분한 친구였다.
드워프이면서 야금술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 그 친구는 장인으로서는 최악이었지만, 함께 마시는 술자리에서는 굉장히 입담이 재미있어 자주 만남을 가졌다.
이번에는 또 어떤 소문을 가져와서 술안주로 풀 것인지 기대 반으로 물었다.
“마을에 인간이 들어왔다는데?”
“…인간이?”
“그래. 인간. 그것도 무려 ‘그때 그 인간’이라는 거야.”
“‘그때 그 인간’이 누군데.”
자꾸만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는 술꾼 드워프의 말에 오란은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 사람이 진짜! 자네는 전에 그 길쭉귀들과 전쟁이 날 뻔했던 그 사건을 잊었나!?”
“흥. 나면 나는 거고, 안 나면 안 나는 거지.”
“이렇게 마을 일에 관심이 없어서야!”
“그런 건 부족의 족장들이 하는 일이지. 나는 무기를 만드는 장인이야.”
오란은 실제로 엘프들과 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사건이나 정치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대장장이로서의 기술의 향상과 성취뿐.
“그래서 ‘그때 그 인간’이라는 게 도대체 누군데?”
“아, 글쎄 길쭉귀들과 우리 사이에서 중재를 통해 협약을 맺도록 일조한 인간이 이번에 홀로 우리 마을을 찾아왔단 말일세!”
“…흐음. 꺼으흑!”
오란은 술꾼 드워프의 이야기를 들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트름을 내뱉고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채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 인간이 이곳에서 야금술을 배우고 있다는데?”
“…흠?”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맥주잔을 쥐고 있던 오란의 손이 처음으로 멈칫했다.
야금술에 관한 이야기 밖에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오란의 성격을 알고 있었던 술꾼 친구가 푸는 이야기보따리의 주제는 당연히 야금술과 관련된 것 일터.
“어떤가? 구미가 좀 당기나? 오늘 자네가 이 술을 산다면 내가 이 이야기를 술안주로 제공하지.”
씨익 웃으며 술꾼 드워프는 이제야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오란에게 술안주 삼아 ‘미친놈처럼 망치를 두들기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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