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5화 〉 515. 동굴 난쟁이(4)
* * *
레지나로부터 흘러나온 정갈한 마력이 허공 위로 응집되어, 그것을 잔잔한 바람이 감싸기 시작한다.
그것은 레지나가 자신과 계약한 바람의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과정.
[중급 정령술]
[중위계 정령소환]
“이건….”
은현은 지난번 고대 마수의 토벌 때, 한차례 레지나의 정령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정령이 본래 누구였는지, 그 정체를 깨달았을 때 몹시 당황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다시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마음을 단념했던 과거의 인연 중 하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여왕님? 무슨 일로…. 어…?]
엘프 여왕 레지나의 부름을 받아 하계에 현현한 중급 정령 실비아는 알현실에 와있는 은현의 존재를 눈치채고 당황했다.
[어, 어째서 이곳에…?]
“전에 너무 애매하게 넘어간 것 같아서 잔뜩 아쉬워하셨잖아요.”
[제가 언제요!?]
퍼뜩 놀라며 따지듯 묻는 실비아의 태도는 엘프 여왕에게 대할 수 있는 백성의 모습이 아니었다.
애초에 세계수의 힘으로 정령으로 환생하게 된 실비아는 더는 엘프 여왕을 따를 의무는 없어졌지만, 그녀의 태생부터 이어왔던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실비아가 자신에게 따지듯 소리를 치는 것은 레지나로서 그렇게 썩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는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었죠. 선생님?”
“…그랬지.”
고대 마수와 그것들을 소환한 원흉인 용인(?人) 레나트를 처리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였던 만큼, 오랜만에 만난 실비아와 재회의 감상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
싸움이 끝난 이후로도 오염된 대지와 숲을 재건하는 일로 바쁘게 움직였던 만큼 은현과 실비아의 재회는 흐지부지되어 애매한 형태로 마무리를 지었다.
드워프의 소개장을 써주는 것을 조건으로 은현에게 실비아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려는 레지나의 작은 배려였다.
“천천히 이야기들 나누세요.”
“…릴리?”
“네. 주인님.”
“잠시만…. 자리를 비켜주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릴리는 곧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으로 응집되어 하계에 소환된 정령이라는 생소한 존재를 처음 본 것에 신비로운 감상을 품으면서도, 은현과 복잡한 사연으로 얽혀있는 존재라는 것을 곧바로 헤아렸다.
“먼저 선생님의 거처로 안내해드리죠.”
둘의 대화가 얼마나 걸릴지 몰라, 레지나는 은현의 부탁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릴리를 데리고 알현실을 나갔다.
여왕을 알현하기 위해 원로와 손님들이 찾아오는 장소에 여왕이 자리를 비우는 애석한 상황이 발생했지만, 정작 여왕인 레지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인다.
“…….”
앞장서 걷는 레지나의 뒤를 따르며 릴리는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보며 걸었다.
알현실에서 레지나의 소환에 응하여 현현한 정령이라는 존재와 은현의 관계를 묻고 싶었지만, 과연 자신이 그것을 물어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이 가득하다.
그 정령이나 은현이나, 서로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고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신경 쓰이나요?”
“네?”
계속 자신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는 릴리의 시선은 감각이 예민한 레지나에게는 굳이 뒤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기척이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그녀가 악마라니, 그동안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있던 인식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기분을 느끼며 릴리에게 물었다.
“선생님과 제가 소환했던 정령이 어떤 관계인지.”
“…….”
당연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더 걱정인 것은 일리아나와 엘레노아는 이것에 대해 알고 있을까?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레지나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침묵하자 레지나는 웃었다.
“저 정령께선 정령이 되시기 이전에, 저희와 같은 숲의 주민이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선생님과 인연이 있으셨던 분이시죠.”
“…….”
“궁금해하셨던 것 치고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이군요.”
“그, 그야…. 아무리 그래도 주인님의 과거 이야기는…. 주인님에게 직접 들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지당한 논리다.
비록 절반은 대륙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악마의 피가 섞였다고 하더라도, 하는 행동과 말은 그녀의 곧고 올바른 심성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정말로 처음에 보았던 인상과는 달리,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여성이다.
‘그 두 분도 그렇지만, 선생님의 부인분들은 정말 특별하네.’
한 명은 대륙 전체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며 세계수를 부활시킬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마법 실력을 자랑하는 고위 자릿수 마법사.
또 한 명은 신에게 선택을 받아 상위계의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성녀라고 불리우는 사제.
그리고 눈앞에 답지 않게 정갈하고 깨끗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악마까지.
아내는 총 네 명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레지나는 마지막 아내는 도대체 어떤 이일까 하는 궁금증까지 생겼다.
그런 생각을 가지며, 레지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선생님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네?”
“저희 엘프들이 과거에 겪었던 이야기를 할 뿐이죠. 거기서 선생님이 저희 마을을 위해서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도.”
◆ ◆ ◆
“…….”
“…….”
둘만이 남겨진 알현실의 내부에는 어색한 침묵이 가득 맴돌았다.
고대 마수의 토벌전에서 직접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대면하기는 했었지만, 그때는 이렇게 둘만의 자리에서 여유가 있도록 이야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었다.
레지나의 통찰대로, 실비아가 그것에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애써 내색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많은 것을 상상하고 두려워했다.
스스로 자결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그의 머릿속에 평생 남는 상처를 남겨주었던 자신이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대화하고 싶은 마음을 품으면서도, 그것이 두려워서 실비아는 은현에게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
이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는 실비아를 앞에 둔 은현이다.
“오랜만이에요. 실비아.”
자신을 부르는 은현의 목소리에 실비아는 반투명한 자신의 어깨를 들썩이며 작게 떨었다.
그 목소리에는 400년 전 자신을 불렀던 때와 같은 친숙함이 담겨있었지만 바뀌어버린 호칭으로 명백한 차이가 존재했다.
[이, 이제는 누나라고 불러주지 않는 거니…?]
“저 이제 실비아보다 나이도 많은데요?”
[…….]
어깨를 으쓱이며 웃고 있는 은현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마음 한편이 몹시 서운하다.
[나이를 먹었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그때 이후로 400년이 조금 안 되게 지났어요.”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버릇은 어디서 배운 거니? 예전의 너는 이렇지 않았어!]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너는 정말…! 후우….]
실비아는 왠지 지금까지 고민하고 망설이고 있던 자신이 바보가 되는 기분을 느끼며 맥이 빠진 듯 긴 한숨을 늘어뜨렸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흥. 몰라.]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약간의 장난이었지만, 실비아는 고개를 홱 돌리며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나이만 많았지, 생전에도 이상하게 연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성격은 여전한 듯 보인다.
[어떻게 애가 나이를 먹고 능글맞아졌니? 60살이었을 때는 그래도 순했는데.]
인간의 시점으로도 60살은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노인이지만, 여신의 가호로 육체의 노화가 진행되지 않은 은현은 엘프들에게 있어 어린애나 다름이 없었다.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 이후로….”
[…….]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은현의 표정에는 씁쓸함을 비롯한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있었다.
순간 흠칫한 실비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은현을 바라보고는 지금껏 망설였던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결심했다.
[…미안했어.]
“네?”
[그때…. 네 눈앞에서 스스로 목을 긋고 자결하는 선택을 해서….]
다크 엘프에게 붙잡혀 목덜미에 칼날이 드리워지고 인질이 되었을 때, 실비아는 스스로 그 칼날에 목을 들이밀어 자결을 택했다.
그것은 동족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한, 엘프로서 숭고하고 영광스러운 희생이었지만, 계속 은현이 마음에 걸렸었다.
“…괜찮아요.”
은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실비아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저, 지금은 굉장히 상태가 좋아요.”
분수에 맞지 않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점점 피폐해져 갔던 정신은 베르단디를 포함한 아내들의 많은 노력으로 점점 치유되어 갔다.
지금은 그녀들의 도움을 받고,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닥쳐올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언제나 음지에서 혼자서 움직이며 발버둥을 쳤던 과거와는 다르다.
[…그렇구나.]
은현의 진심이 담긴 밝은 미소를 본 실비아는 죄책감으로 무거워진 마음 일부를 덜어낼 수 있었다.
실비아는 자신이 죽고, 엘프의 마을을 떠난 은현이 어떠한 경험을 하며 지금, 이 순간에 다다랐는지에 대해 가늠할 수 없었다.
천천히 허공에 떠오른 자신의 몸을 하강시켜 지면에 착지하고는 의자에 앉아있는 은현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얘기해줄 수 있겠니? 네가 지금까지 해왔던 경험들….]
“…네.”
은현은 작게 미소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현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실비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힘들었겠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녀의 중얼거림은 은현의 가슴 속에 따뜻한 위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윽고 이야기를 마친 실비아의 형체가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레지나에게서 공급받은 마력이 슬슬 고갈되면서 하계에서 유지되고 있던 형태가 점점 무너져 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그저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언제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는지 이미 바깥의 해는 지고 밤이 찾아왔다.
[또…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럼요. 레지나는 그렇게 심술궂지 않아요.”
[…여왕님은 이미 충분히 심술궂어.]
다짜고짜 자신을 소환하여 방치하고 자리를 떠버린 레지나는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즐거운 미소를 띠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다음에는 웃으면서 봐요. 오늘처럼 어색한 시작이 아니라. …누나.”
[…응.]
실비아는 다음을 기약해주는 은현의 말이 굉장히 기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이전처럼 자신을 친숙한 호칭으로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지금껏 무겁게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죄책감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또 보자. 현아.]
시간이 다 된 실비아가 역소환되어 사라지자, 알현실 내부에는 은현만이 혼자 남았다.
곧바로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복도에는 이미 레지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꽤 이야기가 기셨네요.”
“…레지나. 너무 심술궂었어.”
“후후, 그런가요? 하지만 실비아가 나쁜 거예요. 그렇게 끙끙거리면서 티를 내고 다녔으니까. 보는 입장이었던 제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선생님은 모르실 거예요.”
발걸음을 옮겨 건물 밖으로 향하던 은현을 배웅하면서, 레지나는 드디어 가슴 속의 답답함을 해소했다는 듯 후련한 표정을 보였다.
“드워프에게 보여줄 소개장은 이미 릴리에게 전달해두었습니다. 내일 바로 출발하시나요?”
“그래야지. 가능하면 빠르게 처리하고 싶어서.”
“앞으로도 종종 찾아와서 실비아와 대화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또 답답해질 것 같아요.”
“…그래. 알았어.”
은현은 작게 쓴웃음을 지으며 레지나의 짓궂은 농담을 받아들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레지나의 배웅을 받으며 릴리가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거처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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