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4화 〉 514. 동굴 난쟁이(3)
* * *
알현실의 내부.
싸늘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풀어졌다.
릴리의 정체를 눈치챘던 것은 다행히도 마력의 흐름에 민감한 감각을 보유하고 있는 레지나 뿐이었다.
어째서 레지나가 은현과 동행했던 릴리를 보며 적대하려 했는지,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엘븐가드들이 도리어 당황했다.
“…모두. 밖으로 나가주세요.”
레지나는 곧바로 알현실의 경비들을 모두 물렸다.
“여왕님?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자신의 결정을 굽히지 않는 레지나의 태도에 엘븐 가드의 대장 엘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의 은인인 은현과 나눠야 할 이야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으며 경비를 서고 있던 엘븐 가드 엘프들에게 명령을 내려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후우….”
넓은 알현실에 단 세 명 만이 남게 되자 싸늘했던 분위기는 레지나의 한숨으로 단번에 풀어져 갔다.
“자세히…설명해주실 거죠?”
“당연하지.”
은현은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레지나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일반적인 정령과는 전혀 다른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인공 정령인 엘빈을 보여주었을 때도 몹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레지나지만, 지금의 표정은 그때와도 조금 다르다.
‘마치 베르단디님이 가끔 날 한심하게 바라볼 때와 같네.’
지금은 이 자리에 없는 은현의 여신이 그 말을 들었다면 곧바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그를 흘겨보았을 것이다.
굳이 자세히 설명하자면, 지금 레지나가 은현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은 한심하다기보다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이 상황에 대해서 뭐라 기분을 표현할 수가 없어서 기가 찬다는 표현이 옳다.
그런 기분을 가지며, 레지나는 은현의 이야기를 차분히 가졌다.
시작은 릴리를 만나게 된 계기부터였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의 만행으로 인해 가정은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나고, 그로 인해 어머니와 함께 노예로 팔려갔다.
노예의 생활을 전전하다가 흑마법사에게 팔려간 이후로 각종 생체실험을 통해서 서큐버스의 마력을 받아들이게 되어 인간도, 악마도 아닌 어중간한 반인반마(半人半?)의 형태가 되어버린 릴리의 이야기를 들은 레지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정말로…힘들었겠네요.”
레지나가 릴리를 바라보며 품은 감상은 몹시 짧았지만, 그 작은 중얼거림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종족을 알아채자마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려 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부끄러움, 안쓰러움 등의 다양한 감정이 레지나의 마음속에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은현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반인(半人)’의 부분이 은현의 신력을 받아들이면서 악마이면서도 오염되지 않은 정갈한 기운을 품을 수 있게 되어 지금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끝으로 이야기는 마무리가 되었다.
“…그랬군요.”
이런 악마를 처음 보는 레지나는 아직도 당황스러운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릴리를 보고 엘프의 위험이 되는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적으로 간주한다고 쳐도, 자신보다도 이 영역 전체를 수호하고 있는 세계수가 가장 먼저 릴리의 접근을 차단했을 것이다.
세계수는 악마이지만 은현의 반려인 릴리를 위험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정을 들은 레지나 또한 같은 의견으로 릴리를 숲의 내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릴리라고 했나요?”
“…네.”
“당신의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적의를 보이려 했던 제 행동을 사과드릴게요.”
“아, 아닙니다.”
릴리는 적잖게 당황했다.
은현이 곁에 있기는 했지만, 절반은 악마의 피가 섞여 있는 자신을 보고 어쩌면 적대 의사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릴리도 내심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다.
자신의 기준으로 한 나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과분한 처사에 릴리가 어쩔 줄을 모르며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환영해요. 엘프의 여왕으로서, 저와 세계수는 비록 악마일지라도 당신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아….”
릴리는 작게 몸을 떨었다.
비록 반은 인간일지라도, 절반은 악마인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인지 릴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순전히 은현의 아내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앞에 배치된 고난을 훌륭하게 이겨내고 지금이 자리에 서 있는 릴리를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손을 내밀어준 엘프 여왕의 손을 양손으로 맞잡으며 릴리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담은 릴리의 인사를 받아들인 레지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이제 막 20년하고도 더 남은 짧은 생을 살아온 릴리가 그런 험난한 경험을 겪고 지금은 좋은 사람의 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고 흐뭇한 마음을 품었다.
릴리와의 인사를 마친 레지나는 다시 은현에게로 시선을 옮겨 다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리고 선생님? 설마 세 번째 부인을 소개해 주시기 위해서 숲을 방문하신 건 아니겠죠?”
“맞아.”
대강의 릴리에 대한 오해가 정리되고 정식으로 릴리의 방문을 인정받게 되자마자, 레지나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곧 대륙에 또 한 번 전쟁이 터질 거야.”
“전쟁….”
서론으로 들어가는 은현의 말에 레지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곧바로 얼굴을 굳혀 분위기를 전환했다.
집단과 집단, 또는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아닌 이 대륙 전체를 범위로 지정하는 은현의 표현은 레지나로서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전에 다크엘프들과의 교전에서 등장했던 흑마법. 기억해?”
“…알죠.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요. 그 저주를.”
다크 엘프의 우두머리가 스스로 심장을 꺼내어 바치면서 숲 전체에 강력한 저주를 걸었고, 그 저주로 인해 많은 동족 다크 엘프들의 목숨이 희생되어 데스나이트가 소환되어버렸던 그때를 떠올리며 레지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뿐만이 아니라 제물로 희생된 다크 엘프들의 시체들이 구울로 변하면서 힘겨운 교전을 치렀던 것은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선생님과 선생님의 아내분들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아마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겠죠.”
그 싸움에서 레지나와 엘븐 가드 측이 전무한 피해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데스나이트를 단신으로 쓰러뜨렸던 은현과 세계수를 부활시켰던 일리아나, 엘븐 가드 엘프 전사들을 신성력으로 지원했던 엘레노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를 떠올렸던 레지나는 어째서 은현이 그때의 싸움을 언급하는지 그 의도를 깨달았다.
“선생님. 설마….”
“…맞아. 그 저주의 근원을 다루는 자가 지금 대륙에서 날뛰고 있어.”
“…….”
레지나는 할 말을 잃고 은현과 얼굴을 마주했다.
망자를 다루는 사령술이라는 능력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레지나 또한 아주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면도, 식량도 필요 없으며 아픔을 느끼지 않는 망자의 군대는 점점 그 규모를 늘려가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터.
“지금이라도…. 움직여서 그들을 치는 방법은 불가능한가요?”
“무리야. 그게 가능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가 가만히 있지 않았어.”
은현은 주먹을 꽉 쥐며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순순히 인정하며 분한 표정을 지었다.
단 한 명의 개인이 대륙 전체의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손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신과도 같은 존재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건 겨우 나라 하나 정도를 어떻게든 지켜보는 거야.”
그것도 평범한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걸 위한 체계도 이제 막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렌디르 왕국의 멸망 소식을 빠르게 전파하여 점점 다가오고 있는 외부의 위협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어 페르니아스 왕국의 내정을 다스리는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어떻게든 군사력을 강화하여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은현과 그를 돕는 주변 인물들의 도움으로는 이것이 한계다.
“나라 하나만으로는 안 돼. 그래서 너를 찾아온 거야. 레지나.”
“…….”
“엘프들의 방침과 규율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아. 하지만…이번만큼은 이야기가 조금 틀려.”
나라 하나가 망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고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생명 모두가 망자들의 손에 놀아나는 파멸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부디 결전의 그때가 되었을 때, 힘을 빌려주지 않을래?”
침묵을 지키며 생각에 잠겨 있던 레지나는 은현의 부탁에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선생님.”
“…그래.”
은현은 낮게 깔린 진중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레지나를 보며 답했다.
“어째서 제가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그건….”
숲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인간들과의 교류를 일절 차단하여 폐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엘프들의 규율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엘프와 엘프 여왕은 오로지 종족과 세계수의 직접적인 위기에만 검과 활을 들고 대항하며, 인간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냉정한 이야기지만,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숫자가 죽던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저희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에요. 선생님과 인간들이 패배하여 이 대륙이 암흑으로 물든다면, 그다음은 저희 엘프와 세계수일지도 모르니까요.”
“…….”
레지나는 조용히 여왕의 자리에서 일어나 은현에게 다가갔다.
양손을 뻗어 은현의 왼손을 붙잡고는 양손을 포개어 은현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이 손이, 선생님의 노력이 몇 번이나 저희를 구원하셨는지, 저와 엘프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400년 전 다크 엘프들과의 항쟁에서도, 작년에 있었던 그들과의 재전에서도, 가장 최근에 있었던 고대 마수와의 교전에서도, 은현이 없었다면 엘프는 진즉에 멸망했다.
“엘프는 평생을 걸쳐 갚아야 하는 은혜를 입은 선생님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부디 선생님의 싸움에, 저희가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숲의 종족을 대표하는 엘프 여왕의 의지는, 엘프라는 종족 전체의 의지와도 같다.
그 굳은 결의가 은현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우며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레지나는 웃으며 은현의 감사에 대꾸했다.
한때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어린 꼬마 엘프가 어느샌가 종족 전체의 의지를 대표하는 여왕의 자리에 올라와 있다는 실감이 뒤늦게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는데.”
“뭔가요?”
“난쟁이들의 거처. 아직 알고 있지?”
“아.”
레지나는 곧바로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눈치채고 작게 웃었다.
“그럼요. 아직도 교류는 이어가고 있어요.”
“오란은…죽었겠지?”
“네.”
“그렇구나.”
은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과거를 회상했다.
“지금은 그의 손자가 대를 이어서 부족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들었어요.”
“손자라….”
은현은 자신에게 야금술을 가르쳤던 드워프의 손자가 이제는 한 부족의 족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면 그 역시도 세월의 흐름을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항상 자신이 남고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경험은 익숙해질 수가 없는 쓸쓸함을 가득 채운다.
아마 지금 난쟁이들을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기억하는 이는 몇 되지 않을 터.
“그들에게 보여줄 소개장을 하나만 써줬으면 해. 가능하면 그들의 도움도 받고 싶어.”
레지나를 찾아온 은현의 두 번째 용건은 이것이다.
앞에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엘프들의 협력을 구함과 동시에, 자신과 드워프의 사이를 중재해줄 수 있는 다리의 역할을 부탁하기 위함.
“쉽지 않겠지만, 선생님도 계획이 있으시겠죠.”
레지나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소개장을 써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으면 하는 분이 계셔서요.”
“…이야기를?”
레지나가 이 정도로 존대를 하는 존재라니,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은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레지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선생님도 잘 아시는 분이에요.”
레지나는 못된 장난을 치려는 웃음을 지으며 마력을 일으켰고, 자신과 계약한 정령을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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