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3화 〉 513. 동굴 난쟁이(2)
* * *
“난쟁이….”
유리아는 은현이 한 말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왕녀님은 땅속에 숨어있는 난쟁이라는 저 종족에 대해 알고 계신 바가 있습니까?”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알고는 있죠.”
이쪽에서도 엘프라는 숲의 요정족과 함께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춰버린 땅의 요정족에 대한 이야기와 전승은 존재하고 있다.
유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은현을 보며 재차 확인했다.
“정말로…드워프와 연이 있나요?”
“있습니다.”
은현은 망설임 없이 빠르게 답했다.
“진짜로 당신은…. 아니에요. 후.”
그의 정체와 목적에 대한 설명은 이미 들었다.
신의 사도, 불멸자, 베스타가 아닌 다른 여신에게 선택을 받은 남자.
유리아는 꼬치꼬치 캐물으며 따져야 할 시기는 진즉에 지났으며 이제는 은현의 계획을 듣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할 순간이다.
“그 드워프…. 난쟁이라는 종족은 어떤 종족이지?”
작게 한숨을 쉬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유리아에게서 이어받든 대화를 잇는 것은 알렉스였다.
“너는 몰라?”
“알고는 있지. 하지만 내가 아는 드워프라는 종족에 대한 지식은 그저 책으로만 접한 단편적인 정보들에 불과해. 그러니까 그 종족에 대한 걸 네 입으로 자세히 듣고 싶은 거야. 너는 이전에 성검을 복원할 때, 다른 대장장이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수준의 뛰어난 야금술도 다룰 줄 알고 있었지.”
이제는 왕가에 반납하긴 했지만, 한때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의 가보였던 성검 듀란달을 복원에 성공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은현이었다.
아니에스나 엘레노아에게서 결계를 펼침으로써 효율적인 작업을 위한 조력을 받았다지만, 몇십 시간을 쉬지 않고 망치를 휘두르며 막대한 신력을 때려 박았던 그의 집념이 놀라운 수준이었던 것이 아직도 알렉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네 야금술은 그 드워프라는 종족에게서 배웠던 건가?”
“맞아.”
은현은 숨길 것도 없는 정보에 대해 간단히 긍정했다.
그리고 알렉스의 말에 따라 자신이 알고 있는 드워프라는 종족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드워프라는 땅의 요정은 일반적인 사람의 절반 정도로 키가 작고 뭉툭한 체형을 가지고 땅속을 개척하여 지하에서 삶을 살아가는 종족이야.”
“…지하?”
“그래. 지하.”
엘프들이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숲의 주변에 결계를 쳐둠으로써 마법적인 분야로 외부와 단절되는 폐쇄성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드워프는 땅굴 속에 터전을 잡고 물리적인 방벽을 세움으로써 물리적인 분야로 외부와 자신들을 단절시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지상에서 종적을 감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건가?”
“그렇지. 그리고 완전히 종적을 감춘 것도 아니야.”
“그건…무슨 의미지?”
“제대로 속세로 나와 인간들과 연을 맺고 거래하고 있기도 하다는 뜻이지. 계속해서 속세와 연을 끊고 세계수의 축복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삶을 이어나갔던 엘프들과는 달라.”
그런데도 아직도 대륙에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특정의 어떤 곳과 교류를 하고 있으며 그 사실이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당신은 그 드워프라는 종족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건가요?”
“지금은 저도 모르죠. 제가 그들을 만난 건 약 300년 전쯤입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는 유리아는 새삼 은현이 그 외관과는 달리 영생을 사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새겼다.
“그러면 어떻게 그들을 찾으려고요?”
“알고 있을 만한 이를 압니다. 그래서 조만간 그쪽에 가볼 생각이기도 하고요.”
◆ ◆ ◆
페르니아스 왕국의 수도인 페르닌의 왕궁에 도착한 이후, 왕국의 내부는 또다시 큰 파란을 맞이했다.
데미안 왕세자의 사망 소식은 현재 공석인 국왕의 자리에 관해 또 한 번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이미 대비를 하고 전략을 짜두었던 대로 대처하여 혼란을 수습했다.
새롭게 왕위 계승자로서 거론된 유리아는 당연히 궁정 귀족들의 반대를 받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아직 왕으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여 미숙하다는 의견이 다수 있었음에도 리오드와 알렉스의 지원으로 지지세력을 이미 탄탄히 굳혀둔 그녀를 강하게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유리아가 두 공작 가문의 지원을 받아 혼란해진 페르니아스 왕국의 내정을 수습하고 왕위 계승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은현도 여행의 준비를 마치고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면 통신으로 바로 연락해.”
“알았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하고 어떻게든 구해다 줄 테니까.”
“그렇게까지는 안 해줘도 되는데.”
“혹시 아프거나 그러면….”
“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빨리 가!”
일리아나는 출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계속 말을 늘어놓는 은현을 귀찮다는 듯 흘겨보았다.
아직 임신 초기에 불과한 일리아나의 곁을 지키지 못하고 또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리는 듯하다.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이성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될 예정이라는 사실은 은현의 이성을 무뎌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당신의 빈자리는 제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엘레노아는 쓴웃음을 짓고는 일리아나의 손을 맞잡으며 은현을 안심시켰다.
현재 유리아의 왕위 계승 준비로 인해 알렉스가 그녀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게 되면서, 부족해진 공작령의 관리를 보조하게 된 엘레노아는 이번 은현의 일에 동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저 말고도 에린도 있으니까요.”
“히잉…. 나도 가고 싶었는데.”
엘레노아의 옆에서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에린 또한 개인의 사정으로 은현을 따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번에 범선에서 큰일을 치를 뻔했던 사건으로 인하여 구미호가 본격적으로 에린을 가르칠 생각이니, 두고 가라는 구미호의 단호한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에린. 일리아나님을 같이 돌봐드려야지.”
“그, 그게 싫은 건 아니에요. 미호가…또 저를 엄청 혼낼 것 같아서….”
구미호의 교육은 정말로 싫었지만, 현재 임신중인 일리아나를 돌보는 것은 에린으로서도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리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풀이 죽어있는 에린을 보고 한차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은현과 그의 옆에 있는 릴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릴리. 잘 갔다 와. 다치지 말고.”
“네. 마님들. 주인님을 잘 보필하여 다녀오겠습니다.”
릴리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에게 인사를 전했다.
에린이나 엘레노아, 은현이 선대 국왕의 장례를 위해 장기간 자리를 비웠던 동안 일리아나의 상태를 케어했던 것은 릴리였다.
“휴가라고 생각해. 그동안 날 신경 써줘서 고마웠어.”
처음 가져보는 아기에 대해 생전 처음 가져보는 근심으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을 때, 임산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보고 자신을 돌봐주었던 릴리에게 일리아나는 솔직한 고마움을 전했다.
그래서 일리아나는 은현에게 휴가차 릴리를 동행해줄 것을 권했다.
“그럼 갔다 올게.”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집을 나온 두 사람은 미리 개설해둔 게이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행과 마주쳤다.
“준비는 다 끝났어?”
“예. 저희는 모두 끝나고 두 분이 나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데르킨은 웃으며 은현에게 답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하게 된 것은 데르킨과 앨리스 부부, 그리고 둘의 딸인 에리스와 엘빈이었다.
목적지는 본래 데르킨의 고향이자, 그의 가족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던 엘프들의 마을.
두 눈을 고치고 시력을 회복하게 된 앨리스가 자신이 살았던 엘프들의 마을을 두 눈에 새기고 싶다고 해서, 데르킨은 아내의 말을 듣고 은현에게 상담했다.
은현은 흔쾌히 데르킨의 가족들이 귀향할 수 있도록 이번 여행에 동행시켜주었다.
한 가지 의외가 있었던 점을 꼽자면.
“너도 가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들의 귀향에 엘빈이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동행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의 한쪽 손을 꼭 붙잡고 오랜만의 집에 간다는 생각에 들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프 엘프 소녀를 본 은현은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에리스는 엘빈이 같이 갔으면 좋겠니?”
“네! 집에서 엘빈 오빠랑 놀 거에요!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엘빈 오빠를 소개해주고 싶어요!”
“후후.”
“크흠!”
딸의 해맑은 미소와 말을 접한 두 부부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앨리스는 귀엽다는 듯이 에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지만, 데르킨은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 추임새를 넣을 뿐이었다.
에리스에게 손을 꼭 붙들려 있는 엘빈의 표정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복잡해 보였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은현은 릴리와 함께 그저 피식 웃어넘기고는 게이트를 작동시켰다.
게이트의 너머에 연결된 곳은 가끔가다가 은현이 일리아나나 엘레노아와 함께 사용했던 나무 위에 만들어진 목조 주택이다.
“그럼 오랜만의 귀향. 좋은 시간 보내.”
“감사합니다. 은현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한 가족의 감사 인사를 뒤로하고 가족끼리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은현과 릴리는 곧바로 데르킨 가족과 헤어졌다.
지난 고대 마수와 치렀던 싸움의 여파로 손상된 부분을 모두 복원시켰는지, 마을의 길거리는 매우 밝고 활기찼다.
“아, 아니!?”
이윽고 순찰을 돌고 있던 엘프의 군대, 엘븐 가드의 일원이 은현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 은인께서 저희 마을에는 어쩐 일로…?”
“레지나를 만나러 왔어. 안내해 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븐 가드의 엘프 전사는 은현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오히려 그를 엘프 여왕이 있는 알현장까지 안내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다.
지난 고대 마수와의 전투에서 은현과 일리아나가 보여주었던 무력을 체감한 엘븐 가드의 엘프들은 세계수와 엘프의 숲을 고대 마수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은현 일행을 떠받들어 모시듯 대우했다.
이미 엘프 여왕의 바로 아래, 원로급의 대우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방인에 불과한 인간이 엘프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엘프 여왕을 만나고 싶다는 부탁을 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게 여겼다.
오히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엘프 여왕에게 안내하고 있는 것은 현 여왕인 레지나의 최우선 지시사항이기도 했다.
“은인께서 오셨다고 여왕님께 전해주십시오.”
알현실을 지키고 있는 엘븐 가드 경비들이 뒤따라온 은현과 릴리의 얼굴을 확인하고,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레지나에게 은현의 방문 사실을 전한 엘븐 가드 경비가 다시 나오며 은현에게 레지나의 말을 전했다.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은인분.”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은현은 굉장히 극진한 대우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엘븐 가드 경비의 안내를 받으며 릴리와 함께 내부로 진입했다.
“어서오세요. 선생님.”
은현이 알현실에 도착하자마자, 레지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랜만에 방문한 은현을 환영했다.
“오랜만이야.”
이윽고 레지나는 릴리에게로 시선을 옮겨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
다른 엘프들보다 민감한 눈을 통해 마력의 흐름을 읽어 들일 수 있는 레지나는 곧바로 릴리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건….”
비록 은현의 동행으로 온 사람이었지만, 릴리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레지나가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려 한 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레지나.”
그런 레지나의 본능적인 적대적 태도를 진정시킨 것은 은현의 목소리였다.
“진정하고 제대로 봐.”
“…네?”
“세계수도 릴리가 이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어.”
그것은 세계수는 악마인 그녀를 이미 받아들였다는 사실과도 같았다.
그 사실을 자각하고 눈썹을 꿈틀거리며 동요를 보였던 레지나는 다시 한번 릴리의 상태를 관찰했다.
거무칙칙하고 꺼림칙한 느낌이 아닌, 은현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정갈하고 맑은 기운을 품고 있는 릴리의 몸을 보고 더욱 동요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어떻게 악마가 이런 깨끗한 마력을 더럽히지 않고 정갈하게 유지할 수가….”
그보다 어째서 이런 기운을 품고 있으면서 소멸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이런 악마는 지금까지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소개할게. 내 세 번째 아내야.”
“처음 뵙겠습니다. 여왕님. 주인님의 몸종인 릴리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릴리의 자기소개에 레지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까까지 경계의 태세를 취하며 극도의 긴장을 했었던 만큼 그에 대한 반동 때문인지 허탈한 마음이 몹시 컸다.
“…….”
레지나는 이미 은현이 일리아나와 엘레노아에 이어서 아내가 여럿 있다는 것까지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반려가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는 악마라니.
“선생님은 참…대단하시네요.”
평소였다면 그의 대단함에 감탄과 존경이 섞인 말로 들렸겠지만, 지금 레지나의 이 말은 기가 차서 어이가 없다는 의미가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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