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2화 〉 512. 동굴 난쟁이(1)
* * *
더러워진 에린의 몸을 씻기고, 욕실을 나와 의자에 앉힌 은현은 타월로 몸을 정성스레 닦았다.
“설 수 있겠어?”
“…아니. 허리가 말을 안 들어.”
아무리 애를 써봐도 한번 빠져버린 허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과의 시간이 격렬했다는 뜻이기도 하여, 은현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능숙하게 에린에게 옷을 입혀주기를 완료하자마자 에린이 은현의 목을 끌어안아 어리광을 부렸다.
“안아줘.”
“그래.”
귀여운 어리광을 받아주며 에린의 몸을 안아 들어 올렸고, 그대로 침실로 들어왔다.
“어서 와.”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을 반겨준 것은 일리아나와 릴리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같이 자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릴리는 웃음을 지으며 침대 위에 에린이 누울 수 있도록 이불을 걷어주었다.
거기에 맞춰 은현이 에린을 눕히자마자, 에린은 진이 빠진 몸을 움직여 일리아나에게로 다가갔고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꼭 껴안았다.
“어머나?”
“일리아나님…. 현이가 저 괴롭혔어요. 혼내주세요.”
“후후.”
마치 엄마에게 질 나쁜 장난을 했던 오빠의 만행을 고자질하듯 어리광을 부려오는 에린의 행동에 일리아나는 웃음꽃을 피우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약 자신이 결혼을 일찍 했더라면, 에린 또래의 딸 아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하자니 이런 작은 칭얼거림도 귀찮다기보다는 꽤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막 샤워를 마치고 정성스레 말려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쓸어 내려주고 침대 위로 올라오는 은현과 릴리를 보며 일리아나는 말했다.
“재밌는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네.”
일리아나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꼭 끌어안긴 에린은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어른이 되었어도 아가는 아가구나.”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음에도 일리아나가 에린을 아가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의 따뜻한 품을 갈구하고 그리워하는 그녀의 성향은 어렸을 적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로부터 추잡한 시선과 학대를 받아왔던 불우한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
당시의 상황을 알고 있었던 일리아나는 이러한 이유로 에린의 어리광을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자신과 맞닥뜨리고 자신을 어려워했던 때와는 달리 이렇게 거리감을 좁히고 어리광을 부려주는 쪽이 더 좋다.
일리아나 또한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복잡한 인간관계로 얽히는 것을 매우 귀찮게 여기는 성격이었지만 가족이 된 이를 누구보다도 아끼기 때문에 에린을 더욱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품에서 잠이 든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일리아나는 은현에게 물었다.
“엘레노아는?”
“아직 티르니스령.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은현은 미처 신수의 기운을 다 흡수하지 못하면서, 에린으로 인해 생길 뻔했던 불상사에 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일리아나와 릴리가 얼굴을 살짝 굳혔다.
“그건…. 확실히 위험했겠네요.”
종족이라는 카테고리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지만, 릴리는 에린과 비슷한 쪽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타인의 감정을 건드리고 조종하는 최면과 세뇌 계열 쪽의 힘은 인간의 경계를 초월한 사기적인 능력이지만, 이것을 컨트롤하지 못할 경우 리스크가 아주 큰 능력이기도 하다.
주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닌, 주위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는 능력인 만큼 릴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곧바로 이해했었다.
“그래도 엘레노아를 혼자 두고 와도 괜찮았던 거야?”
“나는 곧바로 돌아가 봐야지. 알렉스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남편인데 어떻게 아내를 혼자 두겠어.”
은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은현은 에린의 몸속에 남아있는 저 욕정들을 모조리 해소하기 위해서 게이트를 이용하여 곧장 집으로 온 것이다.
일단은 에린의 문제가 해결된 이상 저쪽의 뒷수습을 위해서 곧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엘레노아도 내색은 하지 않겠지만 서운해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모양새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에린은 저희가 돌볼게요.”
“갔다 와.”
“부탁할게.”
은현은 간단히 두 사람의 뺨에 입을 맞추어 애정을 표시하고 다시 게이트를 통하여 티르니스 범선으로 복귀했다.
침대 위에서 일리아나의 품에 안겨 곤히 자는 에린을 사이에 끼워두고 옆자리에 앉은 릴리는 일리아나에게 살짝 우려가 섞인 시선을 지으며 물었다.
“주인님께 상담하지 않으실 건가요?”
“…….”
은현이 사라지자마자 에린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던 일리아나가 릴리의 질문에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아꼈다.
릴리의 질문은 최근 페르닌에 있는 일리아나의 집에 누군가가 침입하여 장기간에 걸쳐 생활했었던 자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일리아나의 명령으로 흑랑단에 그녀의 집에 무언가 수작질을 해두었거나 수상한 정황이 있는지에 대한 정보 수집 명령을 내리고 둘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릴리는 이 문제가 굉장히 꺼림칙했다.
여덟 자릿수라는 마법사들 사이의 정점에 있는 그녀의 집에 침입한 것도 모자라, 제집처럼 생활했고, 그 흔적을 숨길 생각도, 아무런 목적도 보이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이 문제에 대해 계속해서 조사하면서도, 은현과 상담하지 않고 있는 일리아나의 행동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무언가 이번 문제에 대해서 일리아나는 은현에게 상담하기는커녕 오히려 감추고 싶어 하는 의도까지 엿보이고 있었다.
“확신이요?”
릴리는 일리아나의 중얼거림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은 이미 어떠한 단서를 잡았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마님께서는…. 혹시 누가 마님의 가택을 침입했는지 범인을 알고 계신다는 건가요?”
“…맞아.”
애초에 자신의 고위 자릿수 결계를 손상도 입히지 않고 자연스레 침입해온 것부터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물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고 일리아나는 그 침입자가 누구인지까지 이미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 어째서 주인님께…?”
하지만 그것을 은현에게 상담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걔한테는 아직 말하면 안 돼. 이건 현이를 위한 거기도 해. 그러니까 릴리.”
일리아나는 굳은 표정으로 릴리를 바라보며 강하게 당부했다.
“이 문제는 현이한테 말하지 마. 절대로.”
“…알겠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아내 중에서도 누구보다도 은현을 극도로 아끼는 그녀가 은현에게 해가 될 행동을 할 리가 없다.
릴리는 그 강한 의사를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게이트를 작동시켜 내부로 들어가자 개통된 상대 쪽 게이트로 나온 은현이 도달한 장소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로 장식된 객실이었다.
“오셨어요?”
“응.”
은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장소를 파악했다.
꽤나 고급스러운 침대와 이불, 내부의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범선의 비좁은 객실이 아니다.
“바로 티르니스령에 복귀한 거야?”
“네. 당신과 에린이 간 이후로 티르니스 범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항구에 도착했어요.”
“그랬구나.”
사실 구미호의 섬멸옥으로 인해 섬 전체를 지워버리고, 그 후폭풍으로 불안정했던 해류를 벗어난 상태였으니, 이후로는 순항으로 티르니스 항구에 도착했을 것이다.
“다시 와주셔서 기뻐요.”
“당연히 와야지.”
기쁜 듯 미소를 짓는 엘레노아와 정다운 허그로 몸을 밀착시키고 서로의 애정을 교환하는 둘의 모습을 보고 같은 객실에 있던 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하, 참나. 아주 깨가 쏟아지네. 쏟아져.”
신랄하게 비아냥대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 주인은 다름 아닌 유리아였다.
“왕녀님…. 말투를 조금….”
“아, 왜요. 뭐. 알렉스는 지금 남사스러운 저 꼴을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 나요?”
“그야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알렉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공작 가문의 여식으로서 언제나 명석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왔던 여동생의 여자로서 모습은 알렉스로서도 몹시 낯설었지만, 유리아처럼 꼴도 보기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유리아의 경우에는 엘레노아보다는 은현의 저 모습에 짜증을 느끼고 있는 것일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있어 은인인 은현과 엘레노아의 모습은 그렇게 보기 흉한 광경이 아니었다.
그래도 남들에게는 보여주기에는 남사스러운 모습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저와 제 아내가 애정을 좀 표현하겠다는데, 왜 그렇게 구시렁거리시는 거죠?”
“아, 애정 행각은 둘이서만 있을 때 하라고요! 누구는 지금 어떤 인간 때문에 앞으로의 일 때문에 위장이 아픈데, 정작 일을 벌여 놓은 그 어떤 인간은 지금 태평하게 아내와 알콩달콩 아주 깨가 쏟아지고 있으니까 내가 복장이 터져요. 안 터져요?”
“딱히 관심 없습니다만.”
“진짜 내가 여왕이 되기만 해봐…. 모든 건수를 만들어서 당신부터 엿을 먹일 거야.”
“그것도 딱히 관심 없습니다.”
“아오!”
한마디도 지지 않는 대꾸에 열을 터뜨리는 유리아나, 재미있다는 듯 맞받아치는 은현의 대화에 알렉스나 엘레노아는 복잡하면서도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도저히 차기 여왕과 귀족 사이의 정상적인 대화 흐름이 아니다.
“자자,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고, 슬슬 진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죠.”
“…씨이.”
유리아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씩씩거렸지만,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머릿속의 분을 삭여야만 했다.
어찌 되었건 이곳에서 대화와 계획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은현이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번 원정의 목적은 선대 국왕인 안드레아 페르니아스의 장례와 왕세자로 정해진 데미안 왕자의 왕위 계승을 공개적으로 알리기 위함.
이미 데미안의 몸을 빼앗아 잠식한 오르타스가 사망하면서 자연스레 함께 사망하게 된 데미안에 대한 진실을 감추고 수습하는 것이 첫 번째 선결 과제다.
“그 건에 관해서는 이미 손을 써두었습니다.”
페르니아스 왕국의 뒷면에 숨겨져 있던 오르타스와 구미호 사이에 있었던 악연, 그리고 자신의 핏줄이자 후손들의 육체를 빼앗아 반영구적인 영생을 누리고 있던 그의 만행은 은현의 폭로로 인해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되었다.
페르니아스의 왕족들뿐 만이 아니라 그들의 호위 임무를 하고 있던 아르티아 기사단원들 또한 모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예정대로 올리비온 공작께서 손을 써주셔서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의 입단속은 어떻게든 될 것 같아요. 더 큰 문제는….”
“페르닌에 있는 궁정 귀족들이 문제지.”
데미안 왕자의 죽음을 어떤 식으로, 어떤 형태로 덮어씌워야 이 나라의 추악한 뒷면을 감출 수가 있을까.
사실 이 또한 그렇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딱 한 사람이 이 상황을 납득하고 거짓말에만 동참해주기만 한다면.
“디아네 왕비께서…데미안 왕자의 죽음을 다른 사실로 덮어씌우는데…. 동의 해주셨어요.”
그것은 이쪽으로서 매우 고마운 이야기였지만, 그 사실을 입에 담는 엘레노아의 표정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유리아나 알렉스 또한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침묵했다.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데 필요하다는 자기합리화로 부정부패에서 눈을 돌리고 억압하고 견제했던 디아네 왕비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데미안의 죽음으로 폐인이 되어버렸다.
정치적인 분쟁으로 적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몇 년 사이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지쳐가는 그녀의 신세에 조금이나마 동정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군요.”
은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동정은 하지만 그저 거기까지.
애초부터 그녀 또한 오르타스에게 간접적으로 이용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디아네 왕비가 아집과 자만에 빠져 무리하지만 않았어도 페르니아스 왕국의 내실이 이렇게 개판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정심이 드는 이도 있겠지만 은현은 자업자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데미안 왕자의 죽음을 항해 중 해양 마수의 출몰 사고로 사망했다고 하고 각종 증언을 조작한다면…. 가능은 하겠군요.”
적어도 의구심은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의문을 직접 제기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사실 이 문제만 해결이 된다면, 유리아 왕녀의 왕위 계승 문제는 거의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르미타스와 올리비온의 두 공작 가문, 현재 국내에서 무력과 경제력의 정점에 서 있는 두 가문이 지지하는 유리아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섣불리 반대하지 못한다.
“그리고…이걸 통해서 당신은 내실을 통합하고 나중에 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힘을 키워야 한다고 했죠?”
“그랬죠.”
“이후에 또 뭘 꾸미고 있는 건지 나한테 미리 말해요. 또 내 뒤통수를 칠 생각을 할 생각하지 말고.”
아무래도 유리아는 라면 하나에 낚여서 자신의 신세가 이토록 파란만장해진 것에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은현은 피식 웃으며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오는 유리아에게 답했다.
“왕녀님. 강해지는 방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하죠.”
“그런데요.”
“시간과 노력을 들여 훈련하고 강해지는 것은 개인마다 엄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그 한계의 끝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럼 이 한계에 달했을 때 더 강해지고 싶다면 왕녀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리아는 퀴즈를 내는 것 같은 은현의 질문에 잠시간 고민을 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답을 내놓았다.
“뛰어난 성능을 가진 아티팩트나 무기를…? 아!”
이윽고 중얼거리는 자신의 말 속에서 무언가 답을 찾아낸 유리아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유리아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종족이라고는 수인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엘레노아를 통해서 엘프라는 종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으며. 공교롭게도 은현이 야금술 쪽에도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녀의 머릿속에 야금술에 특화된 특별한 종족의 인상이 떠올랐다.
“당신 설마…?”
“네. 땅굴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난쟁이들을 한번 꾀어 볼 생각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