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7화 〉 507. 새로운 왕(3)
* * *
순간 격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던 유리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후우우….”
짜증이 치밀어 올라 주체할 수 없어져 이곳이 어떤 자리인지를 망각하고 소리쳐버렸다.
“…….”
헬레나 후비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딸의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왕족으로서 위엄과 격식을 갖추고 누구에게나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던 평소의 유리아와는 다르다.
빠르게 주위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반응을 살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 아르미타스 남매들이나,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리오드의 태도들이, 헬레나 후비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지금의 이런 상황이 한 번 있었던 게 아니었던 거 같은 기묘한 분위기에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딸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로 마음을 터놓고 막말을 하며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던 이가 있었던가.
순간 이 남자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런 건 아니야. 굳이 따지자면…. 친구?’
신분이나 남녀의 관계를 떠나서, 정말로 거리낌 없이 대할 수 있는 친구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런 헬레나 후비의 생각을 뒤로하고, 유리아는 마음을 진정시키자마자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할게요. 어차피…. 나한테 선택권 같은 건 없어 보이니까.”
이미 구미호에게도 반협박과도 같은 기회라는 것을 부여받은 이상, 유리아에게 거부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짜 내가 어쩌다가….’
유리아는 졸지에 왕이 되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작게 한숨을 쉬어야 했다.
자신은 그저 평온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지금보다도 더욱 많은 책임과 역할이 부여되어 막대한 부담감이 유리아의 마음을 짓눌렀다.
“후우….”
다시 한번 심호흡으로 부담으로 짓눌려있던 마음을 다잡고, 결의에 찬 눈으로 은현과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대신 제 쪽에서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뭔가요.”
“당신을 저를 왕으로 추천한다고는 했지만, 그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겠죠?”
“물론입니다.”
은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국왕의 자리가 공석이며, 마땅한 인물이 유리아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녀를 왕위에 올리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페르니아스 왕국의 역사상 왕녀가 왕위를 계승 받아 여왕이 탄생했던 사례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왕국에 소속되어 있는 궁정 귀족들을 포함한 다수의 인사도 데미안 왕자의 사망에 대한 진실을 감추면서 설득을 시켜야 하니, 말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진다.
무엇보다도 유리아 본인이 왕위를 이어받기 위한 준비가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제왕학이나 정치학 등 국가를 경영하고 누군가의 위에 서서 통솔하는 교육과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
아마 왕국의 귀족들이 유리아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런데도 유리아는 자신이 여왕이 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신은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우월하다는 자신과 자만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다.
자신을 왕으로 만들려는 것이, 다름 아닌 은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는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결과를 끌어내는 남자다.
이미 간접적으로 은현의 무서운 면모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를 의심할 수 없었다.
은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아의 질문에 입을 열어 답했다.
“먼저 예전 에반 왕자님의 왕세자 책봉을 지지했던 것처럼, 왕녀님을 지지하는 파벌 세력을 만들 겁니다.”
“그건 또 왕국 내부에 또 혼란을 일으키는….”
“아뇨. 불가능하죠. 경쟁의 상대였던 데미안 왕자는 이제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아.”
아까도 말했듯이 에반 왕자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마땅한 사람은 유리아 뿐.
굳이 비유를 들자면 지금의 상황은 후보가 딱 한 명만이 출마한 선거이며, 그 선거에서 후보자가 당선되는 것을 찬성할지, 반대할지에 대한 찬반론을 나누는 선거와 비슷하다.
“그래도 귀족들이 제 대관을 순순히 찬성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요.”
“그야 지지하여 힘을 실어주는 세력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죠.”
유리아는 곧바로 아르미타스 남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담담히 은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두 사람은 살짝 불안한 유리아의 시선에도 그저 쓴웃음만을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전부터 에반 왕자의 왕세자 책봉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해주었던 공작 가문이지만, 아무리 지금의 상황이 더 유리하더라도 자신의 왕위 계승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가 있을까.
“제가 알렉스와 그의 집안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 하나만으로는….”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영웅인 남자가 왕녀님을 지지한다고 해도 힘들 것으로 보이십니까?”
“…아!”
유리아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무덤덤한 표정을 보이는 리오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그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중립의 태도를 유지했던 리오드가 한쪽 파벌을 지지한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오, 올리비온 공작님…? 어째서…?”
“이 녀석이 필요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몹시 간결하고 명료해서 단순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다.
“…….”
흘끗 은현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하는 리오드의 답변에 유리아는 물론 헬레나 후비까지 꿀 먹은 벙어리와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많은 귀족을 포함하여 디아네 왕비까지도 리오드를 포섭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음에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던 그가 너무나도 쉽게 행동에 나선 것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허무함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왕족조차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던 남자를 움직이는 이가 다름 아닌 은현이라는 사실이 더욱 당혹스럽다.
“그리고 단순히 왕녀님을 지지하겠다고 선언만 하는 게 아닙니다. 아르미타스 공작 가문 측에서도 금전적인 지원을 통해 왕국의 내정을 회복시키는 데 도울 예정이기도 하죠.”
현재의 아르미타스 공작령은 많은 유입 인구를 통해 큰 발전을 이루어냈고 그 노동력과 상업을 기반으로 대량의 재화를 쓸어 담고 있는 영지다.
이전 디아네 왕비로부터 모그라프령에 지원 병력을 보냈던 것을 공훈으로 인정받아 세금의 감면을 약속받았고, 그 결과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는 만큼, 유리아에게 지원할 예정인 금액 또한 어마어마하다.
아마 궁정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대량의 예산을 지원받을 이 기회를 쉽게 거절할 수는 없을 터.
“어떠신가요? 이 정도면 꽤나 든든하지 않습니까?”
“…….”
무력 부분으로는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대륙의 영웅인 올리비온 공작이, 재력 부분으로는 현재 왕국 내부에서 왕가보다도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르미타스 공작이 지원을 해주겠다는 상황.
각자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분야에서 정점에 서 있는 공작 가문이 자신을 밀어주겠다는 이 상황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이렇게까지 한다면, 페르니아스 왕국의 궁정 귀족들은 유리아의 왕위 계승을 막지 못한다.
막는 것보다 받아들이는 쪽이 손실도, 이득도 최소와 최대로 가져갈 수 있는데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녀의 왕위 계승을 막을 수 있을까.
잘 짜인 구성과 단계들.
은현이 준비해둔 이 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현실성이 짙어지고 구체화되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걸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이 인간은?’
적어도 이 원정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한 구성이 아니다.
몇 개월, 또는 1년 이상의 시간과 공을 들여도 이 상황과 판을 짤 수 있겠냐고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유리아는 절대로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지지세력에 관한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어요. 저를 왕으로 만든다고 해도, 그 자리에 앉는다고 제가 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왕좌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왕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리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필수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유리아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거리낌 없이 밝히며 집어내었다.
이대로 왕위를 계승했다가는 아무런 소양도 갖추지 못한 무능한 왕이라는 인식이 박히면서 귀족들이 유리아를 얕보고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추진하여 밀어붙이는 경우의 수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뭐 본인이 배우시고 직접 실적을 내셔야 하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긴 한데, 당신이 그런 얘기를 하니까 더 짜증나요.”
유리아는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후로도 회의는 계속해서 지속하였다.
주된 내용은 유리아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면, 그 이후의 계획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몇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유리아는 은현의 계획에 동참하여 페르니아스 왕국 최초로 여왕이 되는 길을 걷는 것을 선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요.”
많은 생각으로 복잡함이 담겨 있는 유리아가 무거운 목소리로 퇴실하는 은현 일행에게 답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단원들의 상태를 점검해야겠지. 엘레노아에게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
“아니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엘레노아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던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의 치료를 맡았던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리오드의 말에 미소지으며 답했다.
그녀의 신성력과 결계 덕분에, 경상으로 그치고 단원들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이만.”
“그래. 나중에 페르닌에서 보자.”
“알았다.”
“그러면 저와 오라버니도 올리비온 공작님을 따라 부상자들을 돌보러 가도 될까요?”
“응.”
딱히 안 될 것도 없었던 은현이 흔쾌히 승낙하자 기사단원들이 있는 선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리오드의 뒤를 따라 엘레노아와 알렉스도 움직였다.
복도 안에는 은현과 구미호, 제라드로 셋만이 남았다.
“잠깐 자리를 비워라. 내가 긴히 이놈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알겠습니다.”
구미호가 제라드를 향해 눈짓하자, 제라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이제는 둘만이 남게 되자 은현이 그녀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미숙한 것은 지금 어디 있지?”
은현은 구미호가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에린이요?”
“그래.”
“아마 지금쯤 방에서 쉬고 있지 않을까요?”
“…흐음.”
팔짱을 끼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구미호의 태도는 자못 진지했다.
“슬슬 때가 되었는데….”
“때가 되었다고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은현이 되묻자, 구미호는 복도 주위를 슬쩍 둘러보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작은 목소리로 은현에게 답했다.
“그 미숙한 것이 나와 마찬가지로 깨진 여우 구슬에서 흘러나온 내 마력의 일부를 흡수한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예. 그렇죠.”
“본래 그 힘은 인간이 감당해낼 힘이 아니다. 그 미숙한 것은 이미 나의 일부를 받아들여 익숙해지긴 했다지만, 여우 구슬 속에 담겨 있던 내 마력은 내 유해 속에 포함되어 있던 마력과는 질도, 양도 차원이 다르지.”
“…….”
구미호의 설명을 들은 은현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고 자신에게 어떤 경고를 하려는 것인지 눈치챘다.
“내 마력에 취해서 그 미숙한 것이 사고를 치기 전에, 어서 서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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