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4화 〉 504. 신수 대전(5)
* * *
“이…바보야아아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구슬.
섬멸옥을 발견한 에린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절규했다.
천천히 아래로 강하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가까워져 가는 구슬이 담고 있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전신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고 꼬리가 바짝 서게 만든다.
“소란 떨지 마라.”
“어, 어떻게 그래!”
강대한 마력을 품고 있는 저 커다란 구체가 지면과 충돌한다면, 이 섬 전체가 소멸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 섬이 지워진다는 것은 곧, 이 섬에 땅을 딛고 있는 이들 전원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버린다는 의미.
자신과 구미호뿐만이 아니라 지인인 아르티아 기사단과 제라드, 가족인 은현과 엘레노아까지 모두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그 원흉을 만들어낸 구미호를 보며 에린이 따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온다고? 누가?”
이 상황을 만들어놓고 에린과 달리 팔짱을 끼고 태연한 태도를 보이는 구미호는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자신의 여우 귀를 쫑긋거렸다.
바닥을 차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두 사람분의 발소리를 듣고 씨익 미소지었다.
“왔군.”
“어…?”
뒤늦게 에린 또한 예민한 청각으로 구미호가 들은 두 사람분의 발소리를 깨닫고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은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신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은현과 그의 뒤를 따라 빠르게 쫓아오고 있는 제라드의 모습을 발견하고 심각했던 에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현아!”
이 급박한 상황 속에서 발견한 은현의 얼굴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에린의 신경이 그쪽의 방향으로 쏠렸다.
“미호오오!”
“아…!”
갑작스러운 구미호의 돌발행동과 은현의 등장으로 당황과 기쁨의 연속으로 인해, 미처 자신이 현재 전투 중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에린에게 있어선 매우 크나큰 실수였다.
분노의 감정이 치솟아 올라 미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돌진해오는 오르타스의 목소리를 들은 에린이 뒤늦게 상황을 자각하고 황급히 몸을 돌려 오르타스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오르타스는 에린을 지나쳐 구미호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흥.”
자신의 목을 베기 위한 오르타스의 살벌한 검격이 눈앞에서 휘둘러지고 있음에도, 구미호는 팔짱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위협을 느껴 무언가 행동을 하기는커녕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마치 오르타스의 검은 자신에게 닿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오르타스의 칼날이 마침내 구미호의 목에 가까워졌을 무렵, 멀리서 그 상황을 발견한 제라드가 곧바로 움직였다.
[제라드 속성비기]
[뇌신화]
파지직!
허공에 튀는 노란색 스파크가 번쩍임과 동시에, 한줄기의 섬광이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당도한다.
[제라드 속성비기]
[전광석화]
엘레노아의 신성력으로 집중케어를 받고 몸의 부담을 덜어내자마자 발동시킨 두 번째 뇌신화.
곧바로 기린의 마력을 끌어올려 전신에 금색의 뇌전을 두르기 시작한 제라드는 앞서 달려가고 있던 은현을 지나쳐 구미호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오르타스의 검을 쳐냈다.
카아앙!
오르타스의 검이 뇌광이 씌워진 제라드의 단검에 의해 위로 튕겨 나간다.
“크…윽!?”
칼날을 타고 전신으로 흘러들어와 퍼지는 강력한 전류에 의해, 순간적으로 감전의 상태에 빠진 오르타스가 신음했다.
이윽고 제라드가 뿜어내는 힘의 정체를 알아보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 존재했던 기린이라는 신수에 대해 알고 있지도, 들어본 적도 없는 오르타스였지만, 그가 두르고 있는 뇌광은 구미호의 마력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수준의 힘이 아닌, 상위 개념에 속하는 신수의 마력이라는 것은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미호님! 괜찮으십니까?”
“흥. 너무 늦었다. 하마터면 내 목에 상처가 생길 뻔하지 않았냐.”
“죄,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해하면서도, 구미호를 보며 멋쩍은 웃음을 보이는 제라드.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코웃음을 치면서 제라드의 접근을 거부하지 않는 구미호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오르타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구미호가 제라드를 보며 짓고 있는 표정은 환멸과 분노를 담아 자신을 보고 있던 아까의 표정과는 전혀 다르다.
그 표정은 아주 먼 옛날 그녀를 처음 만나 자신과 함께했던 시절 보여주었던 즐거워하는 표정과 닮아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런 힘을 인간이 다룰 수 있으며, 그런 자가 이 섬에 있는 것일까.
자신은 구미호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수명도, 희생도, 인간성도, 연모했던 이까지 모든 것을.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어떠한가.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성을 유지한 채, 신수의 힘을 다루고 있는 제라드는 자신이 몇백 년 동안 추구해왔던 완벽한 초월자의 모습 그 자체다.
그런 남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구미호의 옆에 서 있는 것이 참을 수 없었다.
오르타스의 가슴 속에 수많은 종류의 감정들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한때는 연모했으나 끝내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구미호가 부활하여 이제는 그녀와 동급의 존재가 되어 그녀를 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미 그녀의 옆에는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다른 이의 시점에서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구미호를 배신한 오르타스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경멸의 시선을 던졌을 터.
하지만 이미 이성이 망가지고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비겁한 합리화를 방어기재를 만들어둔 오르타스는 자신의 마음속 모순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로지 부활한 구미호의 옆에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매우 추해졌구나.”
오르타스의 감정을 읽어 들인 구미호는 그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를 응시하고 있는 구미호의 얼굴에는 더는 분노나 경멸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이성이 망가진 불멸자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끼는 동정의 시선.
“크…으윽!”
더는 여우 구슬에서 힘을 공급받지 못한 오르타스는 뇌광에 직격당하여 걸린 감전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실상 여우 구슬이 깨져버린 순간부터, 승리는 이미 정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니까 내가 말했었지. 너와 내가 둘이서만 이곳에 떨어진 시점부터, 네 패배는 정해져 있었다고.”
은현과 그 이외의 변수들에 대해 고려하기는커녕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구미호만을 경계했던 오르타스의 안일한 방심이 불러온 결과였다.
“미…호…!”
분한 표정을 드러내며 구미호를 부르는 오르타스를 본 구미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끝내라.”
스스로 직접 끝내고 싶다는 복수심마저 사라져버린 구미호는 오르타스의 숨통을 끊어놓는 그 역할을 자신이 아닌 제라드에게 넘겼다.
“…알겠습니다.”
구미호의 그 짧은 한마디에 제라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감전으로 인해 말을 듣지 않는 오르타스의 목에 망설임 없이 단검을 꽂아 넣는다.
“커…헉!”
단검의 칼날에 둘려 있는 뇌광이 꿰뚫는 목을 타고 오르타스의 전신에 퍼져나갔다.
몸속을 타고 흐르는 피가 모조리 증발하여 그의 전신이 새까맣게 타오른다.
여우 구슬의 파손으로 더는 신수의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그는 더는 몸을 회복시키지 못한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오르타스의 몸이 풀썩 바닥에 주저앉아 쓰러졌다.
“현아아!”
뒤늦게 도착한 에린이 은현의 품에 안기려던 찰나, 굳은 표정으로 하늘 위에서 강하하고 있는 거대한 섬멸옥을 응시하고 있는 은현의 반응을 보고 멈칫했다.
“내, 내가 한 게 아니야!”
에린은 황급히 변명했다.
이윽고 구미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미호가 한 거야! 나는 말렸다구!”
“흥.”
자신의 독단 행동을 쏜살같이 달려가 일러바치는 에린의 언행에 구미호는 고개를 홱 돌리며 코웃음을 쳤다.
“어떡하지!? 저게 떨어지면, 우리는 물론이고 기사단이나 다른 분들까지…!”
“괜찮아.”
은현은 일단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에린을 진정시켰다.
이윽고 구미호와 제라드 쪽으로 시선을 흘끗 옮겨 상황을 확인하고, 깔끔한 오르타스의 패배를 확인했다.
“가자.”
“…응?”
은현의 결정은 몹시 신속했다.
품에서 마법이 각인된 아티팩트를 꺼내어 활성화했다.
다른 장소로 가는 통로를 강제로 개설하여 문을 만들어내는 그 마법은 은현과 일리아나가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게이트 마법이다.
“어, 어…?”
은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에린의 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제라드를 향해 소리쳤다.
“제라드! 아까 말한 대로 이탈한다!”
“알겠습니다! 미호님! 지금은 조금 참아주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제라드가 곧바로 구미호를 안아 들었다.
평소에는 자신의 몸에 손대지 말라며 맨발로 발길질했었던 구미호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제라드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고분고분하게 안겨 있던 것은 아니다.
“흥. 지금 내 엉덩이를 만진다면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아! 지금까지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을 상상했던 적은 있었겠지! 내가 네놈의 그 음흉한 시선을 모를 줄 알았느냐?!”
투덕거리며 제라드의 품 안에서 작은 난동을 부리던 구미호, 둘을 보고 저 둘은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뭘 하는 건가 싶었지만.
은현은 이쪽으로 달려오는 제라드를 뒤로하고, 에린을 안아 들어 게이트의 입구 안으로 뛰어들었다.
게이트 입구가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를 남겨두고 이어서 구미호를 안고 있던 제라드가 게이트 속으로 뛰어들었다.
쿠우우우우
게이트가 사라지고, 마침내 섬의 지면까지 내려온 구미호의 섬멸옥이 풀숲을 휩쓸고 대지를 붕괴시켰다.
제라드의 공격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르타스의 육체가 섬멸옥의 강력한 마력에 휩쓸려 거칠게 찢어 발겨졌다.
“……!”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르타스가 비명을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뇌광으로 인해 성대가 불타버린 그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경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붕괴한 대지는 가루조차 남지 않아 소멸해버리고 바다조차 집어삼킨 섬멸옥은 오르비스 섬 자체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버렸다.
몇백 년 동안 반영구적인 불멸의 삶을 살아왔던 오르타스의 최후는 너무도 허무한 결말을 맞이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