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부활한 불멸자-503화 (486/730)

〈 503화 〉 503. 신수 대전(4)

* * *

은현과 리오드, 제라드의 세 사람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요호의 거체가 조금씩 반투명해지면서 형체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계속해서 데미지를 회복시켰던 요호가 마침내 한계에 달한 것이다.

그것은 계속해서 요호에게 끊임없이 마력을 제공했던, 오르비스 유적에 봉인된 여우 구슬이 깨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우웅

이어서 유적의 입구로부터 뿜어져 나온 강력한 마력의 파장이 순식간에 주위를 뒤덮었다.

“이건…!?”

“…대단하군.”

외부로 흘러나온, 정갈하면서도 밀도 높은 신수의 힘 일부를 직접 체감한 제라드가 경악했고, 리오드 또한 놀란 표정을 보이며 중얼거렸다.

그 기운들은 몇백 년 동안 구미호가 모아와 정성껏 갈무리해왔던 깨끗한 마력의 정수.

평범한 인간들이 다루는 마력과는 큰 차이가 존재했으며 그 힘을 체감하고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은현은 고개를 돌려 유적의 입구를 응시했다.

“성공했구나.”

이 현상은 유적 내부로 들어간 유리아와 알렉스가 봉인되어 있던 여우 구슬을 파괴하고 그 마력을 해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적을 지키고 있던 수호수 요호가 완전히 형체를 잃어 소멸하자, 순식간에 잠잠해진 땅 위에 고요한 바람이 불었다.

“전원 전투 종료! 그리고 빠르게 부상자의 상태를 파악해라!”

전투가 끝났음에도 리오드는 자신의 역할이 아직 끝나지 않아 계속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바로 호위대상인 왕족들의 상태와 단원들 사이에 중상자가 없는지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리오드와 달리 제라드는 요호가 사라지자마자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우….”

바닥이 뒤흔들리고, 폭풍이 몰아쳤던 것만 같은 난리가 끝났음을 암시하는 고요한 바람을 느낀 제라드는 탈진한 것처럼 신체를 축 늘어뜨렸다.

“괜찮냐?”

“아, 형님…. 뭐…. 그냥저냥 버틸 만은 합니다. 그래도…. 전만큼 몸이 타들어 갈 것처럼 아프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라드의 표정은 말만큼 좋지는 못했다.

엘레노아가 펼친 결계로 인해 신체적인 피로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는 지금.

제라드가 느끼고 있는 것은 육체적인 피로보다, 신수의 힘을 컨트롤하면서 소모한 정신적인 피로 쪽이다.

은현은 곁눈질로 그의 상태를 살피고는 웃었다.

탈진한 듯 바닥에 주저앉아 피로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제라드의 얼굴은 만족한 듯 제법 밝아 보였다.

“만족하냐?”

“…아뇨. 만족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앞이 보이니까요.”

제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전에는 기린의 마력을 집어삼키면서 한차례 버리기로 했던 목숨이다.

전력의 차이가 명확한 레이넌을, 이제는 변질하여 적으로 돌아서 버린 옛 동료를 자신의 손으로 막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비록 절반은커녕 4분의 1도 위력을 내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본래 목숨을 걸고 사용했던 기린의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주 특별하다.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이윽고 잠시나마 휴식을 취한 제라드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크….”

엘레노아의 결계로 인해 부담을 덜고 회복도 점차 되고 있다지만, 뇌신화를 해제하자마자 전신을 덮쳐오는 근육통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치 않았다.

“어디 가려고?”

“예? 그야 미호님께….”

“안 돼.”

“…예?”

제라드는 뜻밖의 제지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은현을 바라보았다.

“미호님을…돕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어, 어째서죠? 지금 미호님이 계신 곳에는….”

그곳에는 현재 에린도 같이 있을 터.

어째서 은현은 그녀들을 돕지 않는 것일까.

“이건 그분과 그자가 풀어야 할 문제야. 우리가 끼어들어선 안 돼.”

“하지만 형님은 에린양에게는….”

“에린은 그분의 힘을 이어받은 정식 후계나 다름이 없으니까.”

사실 구미호는 에린의 개입 또한 전혀 바라지 않고 있을 테지만, 에린을 개입시키는 것이 아슬아슬한 마지노선이 되리라는 것이 은현의 판단이었다.

“우린 그냥 조건을 동일하게만 만들어주면 그걸로 된 거야.”

이 오르비스 섬 위에서, 구미호에게서 강탈한 여우 구슬을 통해 끊임없이 마력을 공급받는 오르타스는 반영구적인 불사의 존재나 다름없는 사기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조건을 깨부수어줬으니, 싸움의 균형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

“고생하셨어요.”

이어서 아르티아 기사단원들의 호위를 받고 있던 엘레노아가 은현에게 다가왔다.

요호와의 전투에서 따로 상처를 입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엘레노아는 곧바로 신성력을 사용하여 은현의 몸을 회복시켰다.

“고마워.”

격렬한 움직임으로 소모된 체력과 긴장된 근육의 피로를 풀어주는 따뜻한 배려를 느낀 은현이 웃음을 지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소환했던 검을 없애고 그녀의 몸을 꼭 끌어안으려 했지만, 먼지로 뒤덮여 땀에 절어있는 몸을 생각하자니 순간 주저했다.

“당신은 정말 가끔가다 이상한 생각을 해요.”

은현의 마음을 알아챈 엘레노아가 쓰게 웃으며 은현의 품에 안겼다.

그런 것을 자신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주는 작은 배려가 고맙다.

“에린은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혼자라면 모를까, 상대편의 조건을 뒤집어, 열세인 상황을 동등한 수준으로 만들어주었다.

게다가 구미호와 함께 싸우고 있을 테니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직접 가르친 에린의 수준을 은현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가르쳤으니까.”

그러니 에린과 구미호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은현의 말에 엘레노아도 웃어 보였다.

“그렇겠죠.”

“일단은 왕녀님과 알렉스가 유적에서 나오는 걸 기다렸다가….”

다음의 계획과 지시를 전달하여 곧바로 움직이려 했을 때.

“다, 단장님! 하늘이…!”

백귀들과의 싸움을 마쳤음에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던 한 아르티아 기사단원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당황이 가득한 목소리를 들었던 은현과 엘레노아도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하늘 위에 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여 두 사람이 함께 얼굴을 굳혔다.

“저건….”

푸른색의 정갈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체.

그것을 본 아르티아 기사단의 일원인 차한성의 무심코 중얼거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기옥?”

하늘을 뒤덮고 태양을 가리는 거대한 푸른색의 구체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밝은 빛을 발산하여 눈부심을 선사하고 있다.

“저게…. 저게 도대체 뭐죠?”

“…….”

엘레노아가 얼굴을 굳히며 자신의 옆에 있는 은현에게 물었지만,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은현의 얼굴에 당황이 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뒤늦게 은현 또한 이 상황을 전혀 상정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에린과 신수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 그건 아니야.”

불길함을 느낀 엘레노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안 좋은 상상을 은현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저것은 오르타스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기어이 일을 저지르셨군.”

“네?”

미처 상정하지 못한 돌발의 상황에 작게 한숨을 내쉬는 은현의 중얼거림에 엘레노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돌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물으려던 찰나, 그녀보다도 은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엘레노아. 곧바로 제라드를 회복시켜줘.”

“가시려는 건가요?”

“원래는 갈 생각이 없었지만…. 아무래도 가야 할 것 같네. 그리고 리오드에게 이곳에 있는 전원을 바로 티르니스 백작의 범선에 탑승시키라고 전해줘.”

“지금 바로요? 하지만….”

전투를 이제 막 끝낸 차에, 모두가 피로에 누적된 상태인데 너무 서둘러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정으로 표현했지만, 지시를 내린 은현의 태도는 단호했다.

“지금 바로 이 섬을 나가야 해. 왜냐하면….”

하늘 위에 떠 있는 저 푸른색의 구체가 섬과 충돌한다면, 이 섬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이 섬은 곧 사라질 예정이거든.”

아무래도 구미호는 이 섬 자체를 없애버릴 생각인 모양이다.

◆ ◆ ◆

상황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급변했다.

여우 구슬이 깨져버리면서 무한정으로 정갈한 신수의 마력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오르타스는 얼굴을 굳혔다.

“표정이 아주 보기 좋구나.”

정체를 드러내면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동요를 보이는 오르타스의 얼굴을 보고 구미호가 비웃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늘을 향해 양손을 내뻗어 오르비스 섬 전체를 뒤덮은 신수의 힘을 흡수하고 있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여우 구슬을 파괴한 거겠지.”

“누가 그딴 걸 묻고 있다고…! 어째서 그렇게 태연한 거냐! 미호!”

처음으로 언성을 높인 오르타스는 얼굴을 붉히며 분개했다.

동시에 화를 내지 않는 구미호의 태도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아, 무엇하나 납득이 가지 않는 이 상황에 답답함은 점점 증폭되어만 갔다.

“여우 구슬이 파괴되었는데. 어째서 분노하지 않는 거지!?”

오르타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구미호에게 있어 여우 구슬은 자신의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저장시켜 몇백 년을 거쳐 정갈하고 깨끗하게 갈무리하여 밀도 높은 신수의 힘을 한데 응축시킨 구슬은 구미호에게 있어 힘의 동력원이었으며 영생과도 같은 시간을 선물해준 초월적인 물건.

오르타스가 구미호의 부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질 것이라는 상상은커녕 동요조차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구미호에게서 강탈했던 그 여우 구슬이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우 구슬이 봉인되어 있는 유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신수의 힘을 몸에 품고 있는 자 뿐.

당연히 그중에는 구미호도 포함된다.

파수꾼으로 만들어둔 요호를 쓰러뜨리고 유적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전력으로는 오직 구미호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던 오르타스는 그녀가 자신과 함께 이곳에 있는 이상, 절대로 자신이 질 수가 없다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스스로 몇백 년 동안 공을 들여 힘을 축적한 여우 구슬을 스스로 파괴할 것이라는 가능성조차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르타스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나한테서 빼앗아간 구슬이 파괴되었는데, 내가 분노하기를 바라는 건가?”

구미호는 이미 영혼과 이성이 망가져 제대로 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오르타스를 보고 비웃었다.

“확실히 이 상황은 나도 상정하지 못했지.”

여우 구슬을 파괴한다는 수단은 은현의 독단 행동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구미호에게 계획을 알리지 않고 일을 처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이었다면 자신이 몇백 년 동안 정성껏 모았던 힘이 담긴 여우 구슬을 파괴한다고 말을 꺼내자마자 말을 꺼낸 자의 뺨따귀를 몇백 대를 때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네.”

이미 한번 빼앗겨 자신의 손을 떠났기 때문일까.

여우 구슬이 파괴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도 구미호는 분노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멘탈이 무너진 네 면상을 볼 수 있게 되어서 되려 기분이 좋구나.”

“미호오오!”

“미숙한 것! 오르타스를 막아라!”

“알았어!”

구미호와 마찬가지로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밀도 높은 신수의 마력을 모조리 흡수하던 에린이 구미호의 외침에 곧바로 몸을 던졌다.

신수의 힘을 흡수하여 신체 능력이 평소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에린이 이성을 잃은 오르타스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그의 검을 튕겨냈다.

“비켜!”

분개한 그의 일갈과 함께 휘둘러진 검격은 아까까지 보여준 완성도 높은 기술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빠르고 강할 뿐인 공격은 많은 강자의 공격을 대처하는 훈련을 해왔던 에린에게는 위협이 되지 못한다.

‘아까보다…쉬워.’

오직 에린의 뒤에 있는 구미호에게 분노를 드러내고 있는 오르타스와 에린의 조건은 동등해졌다.

오히려 멘탈이 뒤흔들린 오르타스와 냉정을 되찾은 에린의 사이에서 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에린 쪽이었다.

지금껏 압도하고 있던 에린에게 공격이 가로막힌 오르타스를 보고, 구미호가 비웃었다.

“웃기는군. 나한테서 빼앗은 것을 내가 파괴했을 뿐인데. 되레 화를 내는 것은 너구나.”

오르타스가 분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구미호에게서 강탈한 여우 구슬을 이제는 완전히 본인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었던 여우 구슬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르타스는 여우 구슬이 깨졌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이성을 잃으며 날뛰었다.

카아앙!

레이피어로 오르타스의 무질서한 검격을 모조리 튕겨내던 찰나, 에린은 바닥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어?”

전투 중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위나 마찬가지였지만.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태양을 가리고 있는 듯한 이 상황에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태양을 가리고, 이 섬을 뒤덮는 듯한 거대한 푸른색의 구체는 여우 구슬이 깨지면서 외부로 흩어진 신수의 힘을 흡수하고 한 곳으로 응집시킨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

저것이 아래로 강하하여 지면과 충돌을 한다면, 생기는 피해가 어떠할지는 굳이 맞아보지 않아도 상상이 가, 에린의 등골이 서늘하게 떨렸다.

“미, 미호야.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황급히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본 에린은 무엇이 즐거운지 기쁜 듯 웃음을 흘리고 있는 구미호의 표정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이성을 잃어버린 오르타스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실 제일 위험한 존재가 자신의 뒤에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황급히 구미호를 말리려 했지만, 구미호는 에린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아닌 게 아니야. 이게 맞아.”

“지금 이 섬에는 현이나 엘레노아님 뿐 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엄청 많이 있단 말이야! 지금 그거 쓰지 마!”

“아, 몰라! 그놈이 알아서 다 살리겠지!”

구미호는 하늘 위로 높게 들어 올렸던 양팔을 아래로 내리며 하늘 위 높은 곳에 떠오른 거대한 푸른색의 구체를 섬 위로 강하시켰다.

[구미호 고유능력]

[섬멸옥]

“이 증오스러운 섬과 함께 모조리 사라져버려라!”

섬 하나를 소멸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진 강대한 마력이 응집되어 만들어진 집합체의 구슬이 오르타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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